논단

흔들리지 않은 삶 어디 있으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8-08-25 12:46
조회
3619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70번째 원고입니다(080824).


흔들리지 않은 삶 어디 있으랴


서울 다녀오는 길 교보문고 부근에서 길거리 전도자들과 마주쳤다. 기독교 전도자들은 아니고 처음에는 어떤 종파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상복의 아주머니 두 분이었는데, 미륵불 계통의 출가 스님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나를 붙잡고 던지는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았다. 첫 인상에서 시작해서 줄줄 풀어놓는 이야기가 제법 솔깃했다. 미묘하게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일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내 신상과 속사정으로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졌다. 다소 섬뜩한 느낌과 동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뇌리에 박히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는 데마다 덕을 끼치지만 자기 복은 챙기지 못한다.” 내심 목사의 삶이 그런 거라면 뭘 바라겠느냐 싶었다. 물론 아직 내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거 기고만장하게 만드는군요. 그러면 됐지, 뭘 바라겠습니까?” 그 말에 미리 대답을 준비했다는 듯이 곧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 본인은 언제나 마음이 공허하고 외롭지요.” 순간 체면이 걸린 걸까? 평소에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은 그 이야기가 마치 정곡을 찌른 듯이 느껴졌다. 어찌 마음 한가운데 파문이 일지 않았겠는가?  


결국 더 이어진 몇 마디 이야기 끝에 내 신분마저 밝혀졌다. “목사님이세요? 역시 기운이 다르게 느껴졌어요.” 이거 참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그분들 말 대로 뭘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딜 나오라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항상 사는 게 그렇게 종종 발걸음!”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비의적인 이야기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닌가? 그 이야기에 나 스스로를 매어두는 결과를 빚을 게 뻔해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 여운이 쉽사리 사라질 턱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아니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분들이 던진 이야기들이 뇌리 가운데 뱅뱅 돌며 떠나지를 않는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게 도종환 시인의 시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 주간 말씀을 준비하자니 겹쳐 떠오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오는 본문을 들여다보니 흥미롭다.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풍랑을 잔잔케 하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신 이야기다. 확고부동한 지식과 신념 또는 요지부동한 소유와 지위로 삶의 안정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요동을 치고, 거꾸로 머리 둘 곳 없이 흔들리는 삶을 사신 예수께서 세상을 평정하고 사람을 다스렸다는 것은 분명 역설이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야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그나저나 내 복 챙겨도 못 좋으니 이렇게 저렇게 마음 쓰는 일들이 하나하나 풀려나간다면 더 없이 좋겠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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