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배려받을 때와 배려할 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10-12 11:31
조회
3283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82번째 원고입니다(091012).


배려받을 때와 배려할 때


지난해 가을에는 일본 교토에 3주간 방문하여 호사를 누리고 왔다. 이번 여름에는 거꾸로 일본 교토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여 2주간 그 일정을 꾸리고 안내하였다. 세심한 배려를 받으면서 3주간의 일정을 행복하게 보냈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오신 손님을 그렇게 배려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편저편에서 상반되는 역할을 뒤바꾸어 연이어 맡다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라 상대편의 입장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무런 불편함 없이 3주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낸 것은 손님을 맞이해 하나하나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이들 덕분이었다. 그분들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지 그 당시로서도 이미 체감했지만 스스로 반대의 입장이 되어 보니 더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확연하게 대조되는 스스로의 처지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비교가 되었지만 가장 확연하게 대조된 것은 언어 문제였다.


나는 그때 일본에 방문하기에 앞서 일본어를 몇 달 동안 열심히 익혔다. 글을 읽은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였는데 그나마 익힌 덕에 그야말로 간단한 대화는 떠듬떠듬 할 수 있게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는 통역이 동반되었지만 그 밖의 시간에는 통역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면 떠듬떠듬하는 일본어 수준이었지만 용케도 공부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던 상황은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었다. 한국어 통역이 안 될 경우에는 피차간에 짧은 수준이라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 기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방문하신 손님은 오로지 일본어만 가능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내 입장에서는 통역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통역자를 샅샅이 물색하여 일정상 의사소통에 차질이 없도록 배려를 하였다. 하지만 역시 빈틈이 없을 수 없었으니, 그 때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일본에 있을 때보다 한국에서 일본 손님을 맞이하면서 일본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언어상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본 손님의 처지를 생각해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덕분에 일본어 실력이 눈곱만큼이라도 더 늘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경험을 통해 배려받을 때와 배려할 때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배려받을 때 맛보는 기쁨도 크지만 배려할 때 맛보는 뿌듯함은 그 기쁨을 앞질렀다. 사랑받을 때와 사랑할 때, 과연 어느 때 그 기쁨이 더 큰지 새삼 말할 것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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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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