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3] 인간, 남자와 여자 - 창세기 2:4~2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7-19 21:24
조회
2508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3 (7/19) 인간, 남자와 여자 - 창세기 2:4~25


1. 인간의 조건(2:4~17)


창세기 2:4부터는 우리가 ‘에덴 동산’ 이야기로 알고 있는 창조 이야기가 등장한다. 통상 J 기자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이 창조 이야기는 보다 더 고대의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보다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생명의 기운으로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탄생 의미와 인간의 조건을 동시에 함축한다. 인간의 조건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질료를 몸으로 하고 있으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를 이어받고 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입음으로써 완전한 생명체가 되었다. 이것은 땅과 하늘의 결합으로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축하는 이해 방식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세 신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내용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되며, 어떤 대목에서는 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본문의 인간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인간의 탄생은 작은 신들의 반란에서 비롯된다.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을 부려 흙을 파게 하고 일을 하게 했는데, 그 노역에 지친 작은 신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큰 신들이 쉴 수가 없어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잡아죽이고 그 살과 피에 흙을 뒤섞어 사람을 만들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을 대신하여 노역을 담당하게 했다. 이렇게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은 혼을 지니게 되었으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생명이 유한한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 이 사실, 곧 마지막 결론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 아주 유사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탄생 이야기와 성서의 인간 탄생 이야기는, 형태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결정적 차이들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신화에서 인간의 탄생은 일종의 저주의 결과이다. 흙을 파며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들의 숙명론적인 삶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을 하지 않는 신의 아들들(고대의 제왕들)과 일을 해야만 하는 저주받은 신의 자식들(민중들)의 이분법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거대한 권력과 무시무시한 자연적 재난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탄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인간의 탄생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 인간을 두셨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축복을 의미한다. 고대 세계에서 ‘동산’, ‘정원’은 힘있는 제왕들의 소유일 뿐이었다. 그것은 배타적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 낙원이 인간에 허락되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로 생명을 누리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낙원이었다. 창조성 없는 노동의 고통(소외된 노동)은 처음부터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 운명이 아니었다. 동산을 가꾸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 그러한 시각은, 이집트 대제국의 권력 아래서 종살이 경험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전통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는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을 억압하는 불행한 일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 하는 염원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그 인간의 조건은 운명적으로 규정된 저주의 결과였다. 그러나 성서에서, 축복받은 존재로서 인간의 조건은 한계와 가능성을 말한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를 지닌 생명체, 자연의 질료로 이루어졌으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순환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인간 존재 성격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그러나 운명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계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숙명론에 빠지고 허무주의에 빠진다. 반면에 가능성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무모해지고 기고만장한다. 그리고 그 무모함과 기고만장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게 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고대 세계에서 고된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민중들과,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보는 신의 아들들, 곧 제왕들의 삶이 갈리는 것은 이런 이치이다. 성서의 기자는 그런 세상과 그런 세상을 빚어내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와 동시에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자신에 주어진 조건과 능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적절함, 그 균형의 지표가 바로 ‘선악과’요 ‘생명나무’이다. 동산 가운데 나무가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조금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나 뒤의 3장 22절에서 둘을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둘의 의미를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어코 범하고 말았던 나무의 이름이 왜 하필 ‘선악과’였을까? ‘선과 악을 가르는 열매’, 그것은 인간의 분별 능력을 지시합니다. 이것과 저것, 선한 것과 악한 것, 나와 너, 우리와 다른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남자와 여자 등등을 가르는 분별능력이다.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별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인간은 고통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는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중심에 있다는 상징적 표현에 유의해야 한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것은 공유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 중심을 말한다. 그것은 너나 없이 공유되어야 할 어떤 것의 표징이다. 예컨대, 마을 한 자리에 있는 정자나무는 그 자리에 있어야 마을의 정자나무로서 몫을 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를 범했다는 것은, 그 분별 능력의 남용을 말한다. 자기의 편의적인 기준에 따라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판단하는 차별의식을 말한다. 자기만이 진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사회의 현상을 말한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분명하게 지시하는 상징이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범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내가 따 먹을 수 있지만, 그 다음에 다가올 다른 사람의 고통과 마침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고통을 예측하라는 이야기이다(이에 대해서는 3장을 다룰 때 더 보충).


2. 남자와 여자(2:18~25)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탄생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해묵은 관계, 이것은 끊임없이 논란거리이다. 전통적으로 이 창조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자는 남자의 부속적인 존재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간주되었다. 그 논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1534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갈빗대가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했을 때 그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지탄받았다. 요즘은 남자와 여자의 갈빗대가 다르다고 믿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가 남자를 따르는 것이 창조 질서에 부합한다고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과연 갈빗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갈빗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라’는 그냥 ‘한쪽’을 의미할 뿐이다. 또 한편 수메르어 ‘갈비뼈’와 ‘생명’은 ‘ti’의 동음이어이기도 하다. 갈비뼈는 활과 달(iti)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여성을 ‘생명’과 연관지어 이해한 고대적 인간인해의 흔적일 뿐이다.

더 결정적으로 성서는 하와를 일러 아담의 ‘알맞은 짝’이라 한다. ‘알맞은 짝’, 그 말은 원래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뜻한다. 마치 자반 고등어처럼, 반으로 딱 갈라져 좌우대칭을 이루고 한 가운데는 서로 붙어 있는 모양을 뜻한다. 남녀관계는 그와 같이, 붙어 있지만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지만 동등하게 한 형상을 취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을 시사한다. 남자와 여자는 같으면서 다른 존재,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이다.*


* 다음 주제는 “실낙원, 무너진 창조질서”(창세기 3:1~24)입니다.

  한 달 방학 후 8월 30일(수)에 다시 개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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