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교회의 미래, 적응이냐 변혁이냐 [수정 보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8-01-15 00:42
조회
4047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동창회 제43회 백양세미나

2008년 1월 14일(월) 오후 4:00-6:00

연세대학교 동문회관 3층 대연회장  


* 수정 보완하여 <기독교사상> 2008년 3월호에 기고한 내용으로 다시 올립니다.



한국교회의 미래, 적응이냐 변혁이냐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적응이냐 변혁이냐


장로 대통령이 또 탄생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한국교회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사례이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점검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측해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특별히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 지형도와 관련해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음미해볼 만한 시사점들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주류 한국교회 전반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지대열에는, 뒤에서 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주류 한국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 교회 및 기독교 세력이 포함된다. 언론에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례만 통해서 보더라도 근래의 주류 한국교회를 대표할 만한 모든 세력이 포함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수의 유력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컨대 김홍도 목사와 김진홍 목사 등이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그 측근으로 소망교회의 곽선희 목사와 교회의 인맥이 중요한 몫을 하였다. 이명박 장로 자신이 속해 있는 소망교회는 이른바 강남의 후발 대형교회의 선구격에 해당하며, 김홍도 목사의 금란교회는 강북의 선발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김진홍 목사는 시민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해나가고 있는 뉴라이트 세력을 대표한다. 여기에 “청와대에 찬송과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자”는 구호와 함께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동조하고 나선 한국교회의 다수 평범한 교인들을 포함하면, 한국교회 전반이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지지 여부가 당락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교회 전반이 지지했다는 것은 교회 자체를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함축하고 있다.  

특정 정파의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 문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주류 한국교회의 일관된 경향과 상관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한국교회의 태도는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일과성 현상으로서보다는 한국 현대사에서 일관된 교회의 속성을 드러내주는 연속적 과정의 한 계기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과연 함축하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힘에 대한 숭배 성향을 강하게 띤 주류 한국교회의 속성을 드러내 주었다.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심층에 자리한 중요한 동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성장주의를 신앙의 성취로 인식하는 현세주의이며, 두 번째는 타자와의 소통보다는 일방적 태도를 고수하는 자기중심주의이다. 그와 같은 동기는 일체의 다른 문제들을 부차화시켜 버렸다. 예컨대 경제적 성장주의가 빚어낸 부의 양극화 문제를 비롯한 폐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심각한 윤리적 문제마저도 외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주류 한국교회는 중대한 정치적 국면에서 승리의 열매를 누리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과 불편한 관계를 맺어 왔고, 특히 참여정부 시절에는 사학법 개정 문제 등으로 더욱 심각한 갈등을 겪어 왔던 주류 한국교회의 입장에서는 그 성과를 충분히 자찬할 만한 상황이다.

주류 한국교회는 매우 뛰어난 현실 적응력을 갖고 있다. 정치적 조건에 따라 권력에 대해 협력과 저항을 오갔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 그 기본 동기를 그대로 지키는 가운데 그 적응력을 높여 왔다. 한국교회가 100여 년의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성장과 함께 해외선교의 대규모 확장을 이뤘을 뿐 아니라, 전체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을 훨씬 넘는 사회적 상층의 점유율 및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그 뛰어난 적응력에서 비롯된다. 한국교회는 한국적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능동적으로 적응한 세력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적 근대화에 가장 능동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은 근대화의 긍정적 성과와 함께 부정적 폐해 또한 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할 때 지금까지의 교회 모습 안에서 긍정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폐해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와 그 영향력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서 그 현실적인 존립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 사회적 조건을 뛰어넘어 그 조건 자체를 변혁시켜나가는 초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현실 적응의 측면만이 아니라 현실 변혁의 측면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평가를 따라 교회의 미래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사회의 압축적인 근대화시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해 온 교회들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하여, 민주화 이후 최근의 대안적인 교회운동들을 평가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성장 주도형 교회


한국적 근대화 과정에 가장 능동적으로 적응한 교회는 성장주의를 체질화함으로써 대형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물론 실제 대형화된 교회의 비율은 매우 미미하다. 하지만 대형화된 교회들은 한국교회 안에서 모든 교회들이 선망할 수밖에 없는 모범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는 양적 차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실제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대다수의 교회들은 대형교회들의 조직 원리와 신앙 언어를 모방하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 현상은 실제로 성공한 교회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현상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교회들을 선망하는 한국교회 전반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교회의 대형화 현상을 검토하는 것은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를 진단하는 분명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및 정치적 민주화의 발전과정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두 가지 단계를 거친다. 그 두 가지 단계는 오늘날 주류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 교회의 모형을 형성시킨 계기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계기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으로, 급속한 경제성장 정책이 추진됨과 동시에 정치적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이다. 이른바 개발독재체제가 지배하던 시기이다. 두 번째 계기는 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으로, 한국사회에 소비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정치적 민주화가 진척된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에 등장한 대형교회를 일러 ‘선발 대형교회’라 할 수 있다면, 두 번째 시기에 등장한 대형교회를 ‘후발 대형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김진호,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 그 식민지적 무의식”, 최형묵 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평사리, 2007 참조). 또는 서울의 남북을 경계로 하여 전자를 ‘강북형 대형교회’로, 후자를 ‘강남형 대형교회’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정정훈, “교회와 세상, 그 코드적 동일성에 관한 묵상”, <교회의 날 - 교회 다시보기> 발제문, 2007. 참조). 이 두 가지 모형의 대형교회는 한편으로는 명백히 구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 그 심층적 차원에서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 주류 한국교회를 형성하고 있다.

먼저 선발 대형교회는 개발독재체제하의 한국사회의 속성과 상응한다. 교회는 한편으로 돌진적 근대화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급격한 경제개발정책의 추진으로 전통적인 공동체성이 와해되어갈 때 교회는 그 대안이 되었다. 그것은 도시에 이주한 농촌출신을 중심으로 하는 선발 대형교회 인적 구성의 특징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즉각적인 응답을 추구하는 신앙적 욕구에 대한 충족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진적 근대화가 지니는 문제를 그대로 자신 안에 체현하기도 하였다. 교회는 돌진적 근대화를 추동한 사회적 효율성을 부지불식간에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그와 상응하는 속성을 체질화하게 된다. 교회 성장주의는 경제적 성장주의와 상응하고, 목회자의 절대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교회구조는 권력의 독점화 현상과 상응한다. 이 교회는 성장을 위한 고도의 효율성을 갖추기 위해 일사분란한 위계질서하에서 신앙의 균질화를 지향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이 절대화되고 부패되는 것처럼, 이 교회는 때때로 그 양상마저도 닮았다. 교회 세습과 목회자 윤리 문제의 돌출 등 근래 심심치 않게 발생한 여러 문제들은 내부로부터의 제어기능 및 자정능력이 부재한 한계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후발 대형교회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단계를 벗어나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자본주의가 안정화되고 나름대로 합리성을 띠게 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사회적 상황에 상응한다. 이 교회는 대체적으로 전문직을 비롯한 중상층 이상의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인적 구성을 갖추며, 이전의 선발 대형교회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그 특성은 경영혁신, 권력분점, 도덕적 쇄신 등 이 시대의 합리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시대에 기업경영은 저돌적 추진력보다 참신한 창의성을 요구받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안을 요구받고 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으로 권력의 독점은 더 이상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권력의 분점을 기본 전제로 하는 상호 제어와 조화가 바람직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합리성은 당연히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도덕적 쇄신의 기풍을 진작시킨다. 후발 대형교회는 그 모든 미덕을 현명하게 교회화하고 있다. 한 사람의 목회자를 정점으로 하는 교회조직보다는 분야별로 분담하는 교회구조를 지향하고, 평신도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한편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키는 방향을 추구한다. 교회 스스로 재정 불투명성 문제나 또 다른 어떤 비리에 휘말리는 경우도 드물고,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도 도덕적 의제를 선점하려는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한다. 선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발 대형교회는 이 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교회의 모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두 교회 모형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힘에 대한 숭배 지향적 성격으로, 그 밑바탕에는 여전히 성장주의적 가치관을 따른 현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더 자세한 내용은 최형묵, “욕망과 배제의 구조로서 기독교적 가치”, 『당대비평』2001.봄;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 제3회맑스코뮤날레조직위원회 엮음,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 문화과학사, 2007 참조). 물론 교회 스스로는 이를 유일한 구원의 기관으로서 교회의 성장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교회적 언어로의 변화를 의미할 뿐 현실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변용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뿐만 아니라 근래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가 경합관계에 있는 여러 사회 세력들 가운데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할 뿐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체득되는 신앙은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논리를 정당화해주거나 그 모순을 무마시키는 역할을 할 뿐 근본적인 변혁의 원동력으로서는 전혀 역할하지  못하고 있다. 국익 논리와 경제선진화 논리 등이 다른 어떤 보편적 가치에 앞서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재 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교회 현실과 관련하여, 사회학자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 나무, 2007)이라는 저작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오늘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결정짓는 문화적 문법을 근본적 문법과 파생적 문법으로 나누어 12가지로 분류하면서, 근본적 문법의 가장 첫 번째 순위로 ‘현세적 물질주의’를 꼽고 있다. 이 책은 문화적 문법의 원천으로서 종교를 주목하고 있는데, 오늘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짓는 가장 첫 번째 순위에 오른 현세적 물질주의는 무교와 유교를 통해 응결되었고, 그것이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그리고 경제개발의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본다. 우리의 관점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와 관련된 기독교의 역할이다.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성에 따른 보편적 윤리를 제시하는 성격을 지닌 기독교마저도 한국사회에서는 그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현세적 물질주의에 포섭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한국교회는 과연 얼마만큼 적절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3. 변혁 지향형 교회  


현실 적응의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놀라운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현실 변혁의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돌진적 근대화가 이뤄지고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적응보다는 변혁의 길을 추구한 한국교회의 전통에 대해서도 우리는 적절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주류 교회의 양적 규모에 비해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도 그 역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비주류 한국교회 역시 그 역사적 계기를 따라 두 가지 모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특징을 단적으로 일러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주로 1970-1980년대 개발독재체제하에서 민주화 인권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1980년대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적 모형을 추구하는 교회로 분류된다.

1970-1980년대 개발독재체제하에서 민주화 인권운동에 참여한 교회는 돌진적 근대화의 병폐에 주목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지녔다. 무엇보다도 돌진적 근대화를 추구하며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구축한 국가권력에 대하여 저항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취하며, 한국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민중운동을 배태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이 교회는 그 동력을 현저히 상실했다. 특히 문민정부와  사실상 정권교체가 이뤄진 국민의 정부 이후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상층 인사들이 국가권력에 여러 형태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국가권력에 대해 이전의 저항적 태도에서 협력적 태도로 방향을 선회하는 경향을 띠었다. 국가권력의 성격이 변화된 상황에서 변혁보다는 적응의 태도를 취한 셈이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은 정치제도상의 민주화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자본의 권력에 정치권력이 포섭되는 양상마저 띠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장을 명분으로 참여한 교회 세력은 국가권력 체제 안에서 의미있는 소수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포섭된 형국이었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성장주의의 외연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 주류 한국교회와 정치적 차원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자원 배분에서 주류 교회와의 경합관계를 야기하였고, 나아가 경제적 성장주의를 고수하는 권력에 동조함으로써 주류 교회와 사실상 동반자적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물론 교회 상층 인사들의 국가권력 참여와 그 결과를 두고 교회의 향배를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 및 상층부가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있는 행동을 할 때 그에 대한 교회의 일정한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교회 지도자 및 상층부의 성향을 교회의 성격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대개 1970-1980년대 민주화 인권 운동에 참여한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자체가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지 여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및 제도와 교회 안에 구축된 제도와 가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예컨대, 밖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교회 안에는 민주주의가 부재하였고, 밖으로는 경제적 정의를 외쳤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물질적 축복만이 지상의 가치로 존재하는 것이 문제였다. 대체적으로 사회적 적응을 지향하는 주류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상층부 및 지도자와 교회 회중 사이에 신념상 동질성이 강한 편이지만, 사회적 변혁을 지향하는 비주류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상층부 및 지도자와 교회 회중 사이에 신념상 이질성이 강한 편이다. 밖에서는 진보적인 목회자도 교회 안에서는 보수적이 되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1990년대 이후에 새로운 대안적 교회운동이 등장하게 된다. 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교회 안에서도 철저하게 구현하고, 나아가 현실 적응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여러 가지 동기들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려는 급진적인 교회 모형이 등장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대안교회’로 불리기 시작한 교회 모형이다. 이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미 1980년대에 등장한 민중교회의 맥을 잇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규모와 상관없이 현실적 사회제도와 부합하는 형태로 제도화된 교회를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며 대안적 교회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1980년대 민중교회에서 진일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체 한국교회 안에서 그 존재는 지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른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 전반에 걸쳐 한국교회의 여러 진영에서 대안 모형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등장하여 수렴되고 있는 현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교회는 매우 뚜렷하게 사회와 교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그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적 세력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교회 자체의 대형화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공동체적 친밀성을 교회 안팎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 또한 이 교회의 중요한 특성이다.



4. 한국교회의 미래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 살펴볼 때 매우 다양하다. 앞에서 살펴 본 네 가지 모형은 편의적으로 구분해 본 일종의 이념형들에 지나지 않는다. 교파, 지역, 규모, 인적구성, 성향 등등을 전반적으로 감안하면 더욱 다양한 교회들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종종 한국교회는 단일한 실체로 인식되기도 하며, 실제 서로의 차이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 사이에는 교회로서 유대의식과 책임의식이 공유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유대의식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된다. 객관적 분석대상으로서 교회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있게 그 미래를 전망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이다. 그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한 한국교회 미래상은 무엇일까?

아마도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면서도 그 긍정적인 영향력에 해당하는 사회적 공신력을 얻고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면 더 없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기대할 것 같으면 다양한 교회들은 각기 수준과 형편에 따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긍정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공신력은 낮아지는 현상을 우리는 근래에 경험하고 있다. 교회가 이기적인 권력집단으로 인식되는 사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서두에서 말한 또 한 번의 장로 대통령 탄생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는 될지언정 공신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일 계속해서 교회가 친권력적 성향을 내보인다면 한국교회의 공신력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한 공신력은 영향력의 확대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바람직한 교회의 미래상은 교회가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역동성에 얼마만큼 신실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자기가 가진 재물과 권력을 자랑하는 교회는 현실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가진 것이 많아도 겸손할 수 있는 교회와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는 교회가 서로 어울리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만일 그 길을 찾을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복음의 역동성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대열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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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