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선교, 선한 동기에 스며드는 위험요소를 넘어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8-01 12:49
조회
3697
* <뉴스앤조이> 요청을 받고 기고한 글입니다(070801).


선교, 선한 동기에 스며드는 위험요소를 넘어야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아프간의 탈레반에게 붙잡힌 이들 가운데 이제 더 이상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고 이들이 제발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지만, 그 기대가 또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다.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것 외에 그 어떤 일이 지금 더 우선할 수 있을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몹시도 주저되고 불편하다.


하지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불행한 사태가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또 한편으로 그 불행한 사태가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에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애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공격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이후 다른 여러 나라들의 군대와 함께 우리나라의 군대가 그곳에 파견된 상황이 정당한 것인지 하는 물음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지상명령으로 생각하는 선교에 관한 물음이다.


선교사 파송규모 면에서 미국에 이어 한국은 두 번째 선교대국이 되었지만, 그것을 자랑하기만은 어렵다. 선교현지의 문화나 관습을 무시한 채 이뤄지는 일방적인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서구 교회들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기관간의 무분별한 경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슬람권에서의 선교는 이슬람이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성서를 원뿌리로 하고 있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권과의 극한적인 대결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점 등 양 측면을 충분히 헤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없는 것 같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 선교활동이 유별나게 이뤄진 탓이겠지만, 아프간에서 한국인은 곧 기독교 선교사로 인식될 정도이고 그만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다고 한다. 이번에 피랍된 이들의 활동은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선교’와는 다른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탈레반과 같은 무장세력에게 그 구별이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는 않다. 중동언론들이 피랍자들을 ‘한국인 기독교도’ 또는 ‘선교사’로 일컫고 있는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선교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완악함과 무지몽매함을 탓하며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얼마 전 캐나다연합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선교 개념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였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선교 개념이 자선(charity), 봉사(service), 옹호(advocacy), 정의(justice)로 변화를 거쳐 왔다고 설명했다. 푸드뱅크의 예를 들어 자선은 즉각적인 필요에 응하는 것으로, 봉사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것으로, 옹호는 공동체의 부엌과 신용협동조합 등을 만듦과 아울러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는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사실상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전도’와 같은 의미의 선교 개념은 이미 넘어서고 있다. 이른바 선교대상에게 절실한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을 선교로 보고 있는 셈인데, 그것마저도 시혜자와 수혜자 관계 안에 있는 선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선도 좋고, 봉사도 좋고, 옹호도 좋지만, 베푸는 사람과 베풂을 받는 사람이 구별되는 관계 안에서는 양자가 동시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베푸는 사람은 은연중 자기를 과시하게 되고 동시에 자기의 요구를 베풂을 받는 사람에게 강요함으로써 베풂을 받는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들로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정의는 그 불균등한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관계이다. 그것이 곧 선교의 본질 아닐까?


흔히 선교단체들이 이슬람권 지역이나 아프리카 등지를 ‘미전도종족지역’이라는 식으로 딱지를 붙여놓고 선교활동을 펼친다. 많은 경우 그와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선교활동은 자기과시적 활동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의 문제와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곳에 깃발 하나 꼽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아니라 자기과시적 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활동이 설령 선한 동기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삶의 정당성만을 확인하거나 자기중심적 세계의 확장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복음 전파를 가로막는 셈이다.


지금은 우리들 모두 피랍자들의 희생과 고통에 마음아파하고 남은 이들의 무사귀환을 바랄 때이지만, 동시에 한국교회의 선교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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