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아프간 피랍사태의 교훈, 그리고 협력과 공존을 위한 선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9-18 23:43
조회
5350
한국종교의 바람직한 선교에 관한 종교ㆍ시민단체 토론회

주제: 종교를 넘어 인간에게 봉사하는 종교

2007년 9월 18일(화) 오후 3시 /만해 NGO센터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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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사태의 교훈, 그리고 협력과 공존을 위한 선교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아프간 피랍사태가 제기한 과제들


2007년 긴 여름 한 가운데 일어난 아프간 피랍사태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40여 일간의 긴 억류 기간 내내, 그리고 귀환 직후 국내외 언론은 협상 추이와 피랍자들의 석방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가운데서도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활동의 폐해를 중요한 쟁점으로 삼았다. 일부 언론은 피랍사태를 한국의 국력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성장통’이라는 시각으로 진단해 은연중 국가주의 내지는 경제적 성장주의와 기독교 성장주의와의 사실상 동맹관계를 암시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언론은 공격적 선교의 폐해를 지적하며 기독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논조를 펼쳤다. 언뜻 보기에 그 사태의 본질이 거의 전적으로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의 문제로 환원되는 듯이 보일 정도로 기독교의 선교 문제는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선교의 문제를 중심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지만, 한국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 그 사태는 비단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의 문제만을 함축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사태가 파생시킨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아프간 피랍 사태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미군의 동맹군으로서 한국군이 파병된 사실이다. 피랍자들의 석방을 위한 협상의 첫 번째 조건이 한국군의 철수였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협상 결과 피랍자들이 귀환한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테러 단체’와 한국 정부의 협상을 문제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인명을 구하기 위해 어떤 협상이든 배제할 수 없다는 차원뿐만 아니라 현지의 무장 세력이 저항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미군의 동맹군으로 군대를 파병한 한국 정부의 책임적인 태도의 차원에서도 대면 협상은 사실상 피할 수 없었다. 또한 탈레반이 납치를 감행한 것이 계획적이었는지 우발적이었는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계획적인 경우는 말할 것 없거니와 우발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탈레반의 입장에서 납치가 ‘유효’하게 된 것은 한국의 파병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이 사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의 정당성 문제와 함께 분쟁지역에서의 평화 수립의 과제를 다시 환기시켰다.  

둘째, 이미 지적한 대로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 문제는 이번 사태에서 피할 수 없는 쟁점이다. 탈레반이 내건 두 번째 협상 조건으로서 선교의 문제 역시 아프간 현지에서 한국군의 파병 문제와 유사한 맥락에 있다. 탈레반이 우발적으로 외국인 납치를 했다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인’은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이 경우 문제는, 일부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피랍으로 국력을 소모시키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린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선교지로’ 삼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불편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야기시키는 선교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다뤄야 하므로 우선 이 정도로만 지적하고 넘어간다.

셋째, 이번 사태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 또는 국가와 비정부민간단체(NGO)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측면은 주로 피랍사태가 마무리되면서 피랍자들에 대한 정부의 구상권 청구 여부 논란과 관련하여 새삼 문제시되고 있기는 하나, 구상권 문제는 국가와 교회 관계에서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과연 교회나 비정부민간단체의 활동이 국가의 정책 한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여부에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교회나 비정부민간단체의 자율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 때 자율성이란 자기편의적인 임의성을 뜻한다기보다는 보편적 공공성을 따르는 적극적인 활동의 자율성을 뜻한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두고 정부의 허락 여부가 선교활동의 정당성 문제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는 시각은, 국익을 보편적인 가치기준으로 설정하지 않는 한 타당성이 없다. 오히려 문제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전적으로 정부에 의존했다가 그 사태가 해결되고 나니까 선교를 제한하는 협상에 동의한 정부를 비난하는 교회의 일관성 없는 태도에 있다. 그것은 교회가 자기편의적인 임의성에 익숙할 뿐 보편적 공공성을 따른 자율성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임의성과 비일관성이 정부의 전적인 정당성을 반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태의 경우 정부는 이번 피랍사태를 해결하여 인명을 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아프간 현지인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고 피랍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 복잡성은 국가 또는 정부와 교회 및 비정부민간단체와의 관계를 더욱 면밀하게 다시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넷째, 이번 사태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공격적 배타성의 문제를 노정시켰다. 한국사회에서 공격적 배타성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 까닭에 지금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 배타성은 거꾸로 집중 공격을 받고 있고,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경계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불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저주성 발언들이 거침없이 쏟아진 현상은 쉽사리 수긍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기독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언론의 주장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티즌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주장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국민’과 ‘비국민’의 도식이 아무런 성찰 없이 통용되고 배타적 대상에 대한 저주성 발언들이 아무런 제약없이 통용되고 있다. 문제 삼는 기독교의 공격적 배타성과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일종의 파시즘적 징후가 아닌가 염려될 정도이다. 절대적 빈곤의 상태에서 단기간에 고도의 압축적 성장을 해온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서 그 성장주의를 가장 효율적으로 체득한 기독교가 공격적 배타주의를 체질로 해 왔다면, 압축적 경제성장의 부정적 효과의 극대화로 양극화가 심화된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공격적 배타성이 잉태되고 강화된 것은 아닌지 추정해봄직하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의 공격적 배타성과 한국사회 또 다른 한편의 공격적 배타성은 일종의 쌍생아 관계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이번 사태는 기독교의 공격적 배타성을 자성케 하는 계기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 일반의 공격적 배타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른 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각각 문제의 측면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의 문제를 검토하고, 그 대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해외선교 급증 현상과 그 메커니즘


한국 기독교는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1만 6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절대수치 면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하며, 기독교인 인구비율로 따지면 첫 번째에 해당한다. 불과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 기독교로서는 놀라운 성과이다. 국내에서 단기간에 급성장을 한 한국 기독교는 해외선교에서도 그와 동일한 추세로 급속도로 스스로를 확장해 가고 있는 셈이다.

한국 기독교의 해외선교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이다. 이 사실은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두 가지 차원의 계기와 결합되어 있다. 하나는 한국경제의 성장이요, 또 하나는 국내적 차원에서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둔화 추세이다.

첫째,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고 해외진출에 나선 한국경제는 기독교의 해외확장에도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이는 기독교에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경제적 발전과정의 수혜를 적극적으로 누린 교회들이 풍부한 인적 물적 자산을 보유하게 된 것을 뜻하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성장과 함께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기독교의 해외선교 활동에도 매우 용이한 조건을 형성해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해외 단기선교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성장이 기독교의 해외선교의 급속한 성장의 기본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기독교가 일방적으로 그 수혜를 입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민 내지는 국가적 정체성을 공통분모로 하는 여러 해외진출 세력들은 음으로 양으로 심정적인 유대를 형성하고 실질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개연성이 높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부 언론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를 한국인의 세계적 진출 과정에서 빚어진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보는 시각은 경제적 성장주의와 기독교의 성장주의가 내적으로 긴밀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해외진출 한국 기업과 선교사 내지는 선교기관과의 네트워크에 관한 문제는 더 확인해봐야 할 과제이지만, 이라크와 아프간 등 한국군 파병이 이뤄진 지역에 한국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히 이뤄진 점 등은 모종의 실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의 해외선교는 기독교만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어쨌든 기독교의 입장에서 한국의 경제적 국력신장은 해외확장의 좋은 발판을 형성해 준 것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기독교의 성장은 꾸준히 둔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었기에 한국 기독교는 이미 확보된 유리한 조건을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돌파구를 필요로 했다. 해외선교는 더 없이 좋은 그 돌파구였다. 게다가 해외선교는 한국 기독교의 해외확장이라는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국내적 위기를 타개하는 데도 적절한 방법이었다. 해외선교를 하는 기독교는 사회적 평판과 위신을 높일 수 있었고, 그 결과는 곧바로 교회 자체의 성장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교회 내적 구성원의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양적 성장을 추구해 온 기독교의 입장에서 해외선교는 명분의 차원에서나 실리의 차원에서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타개책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1970-80년대 급속한 성장을 하면서 성장주의를 내면화하고 그로 인해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고 그것이 결국 기독교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터였는데, 해외선교는 국내적 시야에서 볼 때 교회가 자기 몸집만을 키운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 됨과 동시에 교회 내부를 결속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한국 기독교의 활발한 해외선교가 왜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공격적 선교’라는 말이 압축적으로 시사하듯이, 일차적으로 그 배타적 선교방식이 문제다. 진리를 독점한 듯한 태도로 타문화나 종교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여 결과적으로 ‘개종’을 노리는 선교가 지금 문제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방식은 일관되게 성장주의를 추구해 온 그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경제적 성장에 편승하고, 교회적 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로서 해외선교가 채택된 조건 자체가 성장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해 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장주의는 힘에 대한 숭배를 그 요체로 하고 있으며,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다. 근대화를 곧 기독교화로 이해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돌진적 근대화를 민족복음화의 기반으로 삼았던 주류 한국 기독교는 매우 일관되게 그와 같은 가치관을 답습해 왔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주류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와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극단적인 전도활동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특별히 199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바와 같이 시민사회의 공공성에 반하여 자기이익에 침해되는 사안에 대해 공격적으로 자기이익을 방어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정치적 활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한 기독교의 배타성이 해외선교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특별히 단기선교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속성을 더욱더 압축적으로 극대화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장기선교는 어떻든 선교현지의 문화나 관습에 익숙해질 여유가 있다. 설령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현지 사정에 밝아지고 그에 따라 선교적 접근방식을 달리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단기선교는 말 그대로 단기적 효과를 노리기 때문에 태도의 재점검 가능성이 희박하고 단기적 목적달성에 집착할 가능성이 많다. 사전 준비가 된 경우라 하더라도 궤도수정의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단기선교는 실제로 성장주의를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매우 효과적인 선교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입장에서나 그 참여자의 입장에서 동시에 효과적이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선교사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도 선교활동의 과시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보람 있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해 주기에 선호된다. 남들이 그저 외유 삼아 해외여행을 할 때 자신들은 의미 있는 선교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성취감은 더욱 배가되는 셈이다.

그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지는 단기선교는 자기정당성만을 강화해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선교현지 주민들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자기과시적 활동을 통한 성취감만을 누리는 선교 아닌 선교활동만 이뤄질 뿐이다. 그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땅 밟기’ 프로그램일 것이다. 그저 어떤 지역의 땅을 밟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고 착각하는 행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자신만이 아는 흔적을 남김으로써 성취감을 맛보고 그것으로 선교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착적인 정복주의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차마 웃지 못할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이른바 ‘미전도종족지역’이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여놓고 공격적 선교를 펼치는 대부분의 선교기관의 공식적 태도는 그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태도마저도 선교로 착각하게 할 만큼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협력과 공존을 위한 선교


사실상 자기정당성만을 확인시켜주고 자기중심적 세계의 확장에 지나지 않은 선교는 이제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아프간 피랍사태가 발생하면서 쟁점이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선교’냐 ‘봉사’냐 하는 것이었다. ‘선교’가 개종 곧 기독교화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봉사’는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돕는 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분당샘물교회에서는 ‘단기선교’가 아니라 ‘단기봉사’라고 그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이것이 나름대로 유용한 구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선교는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계속 변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뿐 아니라 따라서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수용하고 있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기존의 교회중심적 선교 곧 기독교화를 넘어 세계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것 자체를 선교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중심적 기독교화가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과 맞물리면서 일으킨 폐해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민중신학은 그와 같은 ‘하느님의 선교’ 개념을 기본 입장으로 하고 있다. 이 개념에서는 개종을 뜻하는 전도로서의 선교와 마찬가지로 봉사 역시 시혜를 베풂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라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선교의 주체를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것은 세계 안에서의 여러 주체들의 동등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 내지는 기독교마저도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선교의 요체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주체들이 동등한 관계 안에서 협력을 통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

예컨대, 캐나다연합교회가 선교 개념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새로운 선교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선교 개념이 자선(charity), 봉사(service), 옹호(advocacy), 정의(justice)로 변화를 거쳐 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푸드뱅크의 예를 들자면, 자선은 즉각적인 필요에 응하는 것으로, 봉사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것으로, 옹호는 공동체의 부엌과 신용협동조합 등을 만듦과 아울러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는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사실상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전도’와 같은 의미의 선교 개념은 이미 넘어서고 있다. 이른바 선교대상에게 절실한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을 선교로 보고 있는 셈인데, 그것마저도 시혜자와 수혜자 관계 안에 있는 선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의 강요로서 개종을 노리는 선교는 말할 것 없거니와 봉사활동과 같이 선한 의지로 남을 돕는 활동마저도 베푸는 사람과 베풂을 받는 사람이 구별되는 관계 안에서라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베푸는 사람은 은연중 자기를 과시하게 되고 동시에 자기의 요구를 베풂을 받는 사람에게 강요함으로써 베풂을 받는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들로 만들 수 있다. 정의는 그 불균등한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 동등한 관계 안에서 협력을 통한 공존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구현으로서 진정한 선교의 본질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해외선교를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관이나 교회, 아니 주류 한국 기독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 안에서 제기되어 온 선교의 새로운 지평에 둔감하다. 여전히 개종을 통한 기독교화만이 선교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다. 아프간에서 피랍된 이들이 귀환하고 사태가 일단락될 즈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세계선교협의회가 내놓은 대책은 선교사 위기관리에 관한 사항에 집중되어 있을 뿐 해외선교의 문제를 다시 검토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지니는 일이 타인에게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 같다. 이와 같은 주류 한국 기독교의 태도는, 과연 이번 사태가 한국 기독교의 선교에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될 것인지 상당히 의심스럽게 한다. 이번 사태가 해외선교의 폐해를 넘어서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해외선교 활동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기관이나 교회 안에서 자성이 일어야 할 텐데, 기독교 내에서마저 해외선교를 주도적으로 펼친 이들과 자성을 촉구하며 대안을 추구하는 이들은 분리되어 있다. 이런 현실에서 자성을 촉구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다소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해외선교의 문제점에 대해 통감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책임 있는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대안 모색이 언젠가 변화를 불러올리라는 희망 섞인 기대감으로 말이다. 그 대안을 지금이라도 당장 실현 가능한 차원 그리고 선교 자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 성찰과 함께 가능한 차원을 동시에 고려하며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최소한 현재의 무분별한 자기과시적 선교경쟁을 조절할 수 있는 선교협의체를 구성하고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선교관의 급진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현재 과열화된 선교경쟁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실현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무제한적인 경쟁이 그 성과에서 꼭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경쟁이 부정적 폐해를 불러일으키고 그 폐해가 결국은 선교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일방적인 파송 형태보다는 현지와의 협력관계를 통한 선교방식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현지의 협력 상대는 교회나 민간단체일 수도 있고, 또는 현지 주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방적 개종을 노리는 선교라면 이것은 효과적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지 교회나 주민의 삶을 돕는 데 목적을 둔다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이미 이와 같은 방법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앞으로 권장되어야 하는 선교형태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 선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과 함께 진정한 협력을 통한 공존 모형으로서 선교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세계의 확장으로서 개종의 의도를 아예 포기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에 해당한다. 분쟁지역과 같은 곳에서 개종의 의도를 지니지 않은 가운데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사례들이 이미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생소한 방식만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협력과 공존이 교회나 민간단체 또는 가장 궁극적으로 현지 주민을 상대로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종교마저도 그 상대로 할 수 있을 만큼 확장된다면 보다 진일보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현재 이라크나 아프간 등 분쟁지역의 특수한 상황, 그것도 그 분쟁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간의 경계를 넘는 일은 다른 부정적 효과를 낳을 위험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흔히 종교적 성격을 띤 분쟁이 사실은 매우 정치적이며 근본적으로 지배와 권력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종교간의 경계를 넘어 협력하려는 시도는 종교 스스로를 지배와 권력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사실 국내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종교간 협력의 사례를 볼 수 있어 역시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 협력의 형태를 해외적 차원에서도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어떤 지역에서 선교를 한다고 할 때 그와 같은 협력과 공존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그 선교활동은 여전히 자기세계의 확장을 의도하는 식민주의의 재연이자 동시에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온존시키는 권력관계의 재생산 기제에 해당할 뿐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만일 그 의혹을 떨칠 수 없다면 선교라는 말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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