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비기독교 문화와 ‘구별되는’ 기독교 문화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9-27 10:55
조회
4049
* 월간 <새가정> 2007년 10월호 원고입니다(070904).


비기독교 문화와 ‘구별되는’ 기독교 문화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기독교인의 문화, 다른 눈으로 보면?  


기독교가 요즘 들어 부쩍 세간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에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계기로 선교 문제가 불거지면서 새삼스러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 밖의 여러 계기들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주목 대상이 되어 왔다.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의제들에 대해 기독교만의 고유한 입장 천명으로 차별성을 드러낸 탓이다. 그 독특한 입장은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도드라진 경우도 많다.

일상생활의 차원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에 상영된 영화 <밀양>은 죄의 용서라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일상생활 안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영화에서 그려진 그 풍경은 평소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인데도, 보통사람들의 모습과 동시적으로 펼쳐졌을 때 확연히 구별되어보였다.

그렇게 제3의 시선으로 구별되는 모습을 목격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짐짓 불편해했다. 그 영화가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를 두고 한 편에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와중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풍경을 두고 기독교를 희화화했다느니 어쨌다느니 논란을 벌인 것을 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영화가 그려낸 자신들의 풍경에 짐짓 불편해한 것이 분명하다.

일상적으로 스스로를 구별하는 태도를 누군가가 들춰내 지적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태도는 자기가 가진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겨를 없이 자기 세계에 안주해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배타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차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자기의 시선으로만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 하나의 시선을 기준 삼아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기독교인들의 문화, 보편적 한국문화와 얼마나 다른가?


과연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이 평범한 한국인들의 삶과 얼마나 구별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대로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구별되는 징표들이 많다. 스스로를 ‘성도’로 구별하는 만큼 그 언어와 행동양식에서 보통의 한국사람들과 많은 점에서 구별된다. 특별히 종교적 언어표현과 행동양식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자신의 집 앞에는 성도의 집이라 구별하는 교패를 자연스럽게 달고, ‘형제’ ‘자매’ ‘성도’ 그리고 그 밖의 교회 직분들(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등)을 일상적인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요일이면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하고 주중에도 교회의 집회에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 진지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밖에도 일상생활 영역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스스로를 구별한다. 어디서든 식사 때면 경건하게 기도를 한다. 금주금연을 신앙의 차원에서 지키는가 하면 영화나 출판물 등 대중매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남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것들은 일상에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을 구별하는 표지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기독교 문화와 비기독교 문화는 확실히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을까? 거두절미하고 말해, 누구나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두어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 등에 대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이에 관한 의식이나 실상을 보여주는 통계자료를 본 적이 없어 계량화된 수치로 그에 관한 태도의 경향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경험적으로 만나는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에 대해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견해를 가진 기독교인들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소유권이 보장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탓할 수 없다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구별된’ 삶의 양식으로서 고유한 문화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조건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뭔가 다른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평균적인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식은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삶의 양식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성장의 논리에 매몰된 교회 안에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경제적 규모의 성장을 곧 축복으로 인식하는 신앙을 형성해왔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성장에 대한 추구와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갈망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상 같은 것이다. 하나가 세속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종교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가치추구 면에서 구별되는 기독교 문화


겉으로 드러난 표현양식의 차이로만 기독교 문화와 비기독교 문화를 구분한다면 그 차이는 너무나 뚜렷하다. 하지만 가치의 추구와 그 추구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삶의 양식으로서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문화와 비기독교 문화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 그러니, 다행일까?

그것이 다행일 수 없는 것은 성공한 이들만을 선망하는 획일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데 있다. 획일적인 하나의 시선을 고집하는 태도에서 인식된 차이는 불완전한 존재의 조건, 따라서 차별과 배타의 조건이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그렇게 저마다의 시선들이 서로 주고받음 없이 엇갈리고 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문화는 취약하다. 그렇기에 특정한 시선에서 일정한 기준을 갖추지 못한 수없이 많은 ‘낙오자들’이 고통을 겪는 살벌한 풍경이 일상화되어있다. 기독교 역시 외적 규모를 키우면서 자기영역을 확장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입장을 바꿔 다시 생각하는 지혜를 추구하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만일 이런 태도에 대한 성찰이 없이 기독교 문화‘만’을 고집하며 비기독교 문화 모두를 배격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타종교를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고 전통문화를 깡그리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또는 현실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띤 어떤 대중문화를 방어하는 것으로 기독교 문화의 정당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복음의 진정한 뜻을 삶의 양식으로 구체화하는 데 기독교 문화의 고유성이 있다. 복음의 진정한 뜻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 하늘이 땅이 되는 사건에 있다. 시각의 반전,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그것은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하는 것과 통한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에서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고 바로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인 스스로 일상과 ‘구별하는’ 감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양식에 상관없이 새로운 문화를 일구고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표현양식의 차이는 배척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게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을까?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