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좁은 길을 기꺼이 걷는 용기 -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진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1-01 21:07
조회
3231
* <뉴스앤조이> 요청을  받고 쓴 새해 첫 원고입니다(2007.1.1)



좁은 길을 기꺼이 걷는 용기 -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진로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설 때면,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그 길이 바른 길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독교운동의 진로에 관한 모색은 마치 그와 같다. 출발점과 종착지가 분명한 대로행에 익숙한 경우에는 길을 묻는 것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갈래 길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거나 때로는 아직 나지 않은 길을 내면서 나아가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길을 내야 할지 묻는 것이 당연하다. 그 점에서 길을 찾는 물음이 그치지 않는 한 기독교운동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대로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매우 자명한 구원의 도식과 단선적인 현실인식에 기초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경우 대로를 걷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경우에 물음은 별로 필요 없다. 있는 길을 그저 달리면 그만이다. 보수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수주의는 사유의 중단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이미 명약관화하다고 믿어 더 이상 생각하기를 중단하고 자기 아집만 강화하며 그 아집을 따라 세상을 재단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실체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쉽기 때문에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진보적 기독교운동도 한 때 대로를 달리는 것과 같이 생각한 적이 있다. 1980년대 한국사회의 진보적 사회운동 모두가 그와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했던 전선 자체가 매우 선명했고, 그 대결의 전선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사람들은 쉽게 모일 수 있었고 연대조직을 꾸리는 것도 쉬었다.

오늘 기독교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절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기대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1980년대의 운동이 과연 대로행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이뤄내고,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운동의 길은 사실 좁은 길이었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은 고통을 감내할 만한 용기를 가져야 했고 따라서 비장한 결단을 동반해야 했다. 오늘날 이른바 대오가 잘 형성되지 않는 운동의 현실에 비춰보자니 대로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 역시 좁은 길이었다. 기억을 더듬을 것 같으면, 오늘날 ‘영광스러운 과거’로 기억하는 1980년대 상황에서도 부단히 물음을 제기했다. 오늘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던지고 있는 물음들에 비해 결코 단순하지 않은 복잡다단한 물음들을 던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디뎠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지 운동 상황의 난관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길을 찾고자 한다면 문제를 회피하기보다는 문제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제기되는 문제들을 회피하기보다 하나하나 따지며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운동의 족적이며 될 것이며 가고자 하는 어떤 길로 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길을 찾는 심정으로 오늘 진보적 기독교운동이 헤쳐 나가야 할 문제의 영역을 몇 가지 짚어보려고 한다.



2.


그간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의 민중운동과 연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1970년대 기독교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중운동을 배태하는 역할을 했고, 분화된 부문운동의 발전과 그 조직적 연대를 특징으로 하는 1980년대 민중운동 상황에서도 기독교운동은 일반 사회운동과 연대 속에서 그 몫을 감당했다.

‘환멸의 90년대’라고 했던가? 1987년 민주화대투쟁을 정점으로,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이뤄지던 즈음부터 민중운동의 역동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 민중운동의 약화는 매우 복합적인 요인을 지녔다. 문민정부의 등장은 더디기는 했지만 민주주의의 제도화 결과인 것은 분명했고 재야의 민중운동은 제도정치 영역에 그 몫을 일정부분 위임해버린 감이 있다. 노동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의 양상은 달랐지만, 그간 민중운동에 동참했던 세력의 상당 부분은 그와 같은 인식에 사로잡혔다. 특별히 많은 지도적 인사들이 정치권에 참여하게 된 진보적 기독교운동 진영에서 그와 같은 인식은 더욱 농후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운동 진영에서 이와 같은 경향은 지속적인 하나의 추세가 되었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비자본주의의 본격화는 사람들에게 풍요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사회 변혁적 전망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회 변혁에 대한 전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민중운동에 적지 않은 충격이 되었다. 그와 같은 복합적 요인으로 민중운동은 위축되었고 그에 동참했던 진보적 기독교운동 역시 그 위기를 공유했다.

그와 같은 민중운동의 위기 상황에서 운동의 지형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른바 시민운동이 기존의 민중운동과는 차별성을 내세우며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기존 민중운동의 성과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 연속성보다는 차별성을 강조했고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제와 더욱 밀착된 의제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갔다. 경실련의 등장은 그 하나의 사례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진전된 운동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도화의 틀 안에 있는 운동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운동의 지형도 안에서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표류하였다. 이전의 민중운동 의제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시민운동 영역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못했다. 1990년대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스스로의 입지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여기에서 한편으로 이른바 ‘영성’에 대한 높은 관심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관심으로 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환멸의 90년대’를 표류하고 있는 동안 사회적 상황은 또 바뀌기 시작했다. 외환위기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쳤고, 동시에 민주주의의 제도화의 한계 상황이 노정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로 사회적 양극화가 급속히 진전되었고,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안정성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제도화, 곧 사실상 절차적 민주화로 한정된 민주주의의 제도화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반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른바 ‘민주화 시대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도를 다시 개선해야 하느냐 제도의 운영을 새롭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최근 제기되고 있지만, 현재 정치적 민주화의 성과가 경제적 차원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만큼은 너무나 뚜렷하다. 이로 인해, 한 때 우리 사회가 이미 넘어선 것으로 생각했던 민중 생존권의 문제가 다시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질곡의 상태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고 절대 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성장의 신화는 여전히 위용을 떨치고 있다. 여기에 국익과 안보의 논리가 가세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다. ‘새만금’ ‘대추리’ 문제 등은 중첩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2000년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들은 절차적 민주화가 실질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질적 민주화 없이 소수의 세력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가 계속되는 한 민중의 생존권과 국가적 자주권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환경의 파괴 또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오늘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그와 같은 문제들을 새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문제들을 넘어서기 위해 사회의 여러 운동들과 다시 연대를 하고 있다. 사회적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는 필수적이다. 기독교운동은 과거의 경험을 이어받아 그 연대를 강화하는 가운데 제 몫을 감당해야 한다.

한편 기독교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들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대해야 한다. 이 점에서도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선구적인 경험을 갖고 있다. 예컨대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문제 등과 같은 사안을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기독교운동의 몫이 적지 않다. 한편의 압도적인 보수적 기독교세력의 자기방어적 논리와 행태 때문에,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성과마저 덩달아 묻혀버리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몫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요컨대 기독교운동은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공론화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해 왔다. 기독교운동의 그와 같은 몫은 배제된 소수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와 매우 잘 부합한다. 기독교운동은 앞으로도 그 경험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3.


1970년대와 80년대 급성장한 민중운동과 함께 해온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교회개혁의 과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진보적 기독교운동 안에서 교회개혁은 사회변혁과 병행한다는 원론적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교회가 사회변혁 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회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여전히 원칙적으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적으로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지고 교회 지도력의 상당수가 정권에 참여하거나 또는 민주화의 과제를 ‘과거지사’로 돌리는 경향을 띠게 되었을 때 교회의 실상은 그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절대 다수 교회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 내지는 권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인한 보수세력의 반동과 함께 노골적으로 보수화의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한 교회들의 정치행태 때문에 그와 같이 인식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상 과거에 진보적 기독교운동 진영에 속한 교회들마저도 그 내적 구조와 신앙의 성향은 보수적 교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 교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이라면 대개 개별교회 단위에서 제도적 구조나 신도들의 신앙 성향이 그다지 크게 차별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 의제들을 둘러싼 대결의 국면에서 보수교회와 진보교회는 명확히 구별되는 양상을 띠고 있지만 개별교회 단위에서는 결코 그와 같이 선명하게 대비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상황은 사회의 민주화 또는 변화가 교회의 민주화 또는 변화와 기계적으로 직결되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진보적 기독교운동을 주도했던 지도력들이 사회 민주화의 과제에는 헌신을 다했지만 정작 교회의 민주화나 변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외람된 평가일 수 있지만,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구성원들을 그 투쟁을 지지해 주고 동원되는 대상으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체질 개선이 이뤄지거나 교회 구성원들이 진정한 주체로 성장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교회 현실에 대한 인식은 교회에 대한 급진적인 이해와 함께 대안적인 교회운동을 낳는 배경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시대 기독교운동은 실질적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자기 스스로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운동의 상층 지도력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기독교운동의 한 축으로서 급진적인 교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인식의 결과 한편에서는 교회해체론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한다. 항간에서 교회해체론은 교회의 존재 의의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반기독교적 인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 진의는 사실 교회의 구성원리를 전적으로 새롭게 하자는 데 있다. 교회가 자기 존립을 목적으로 하면서 너무나도 쉽사리 오늘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및 그 체제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점에서 교회해체론은 현재의 교회를 재구성하려는 여러 교회운동들과 괴리되어 있지 않고 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흔히 대안적 교회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교회운동은 사회적 운동들과의 연대 및 소통을 중요시하면서 동시에 교회 스스로의 구조와 신앙생활의 풍토 자체를 새롭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오늘 일상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적 구조, 그리고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면 교회는 전사회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데 기여해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 대안적인 삶을 구현하는 공동체로서 몫을 다해야 한다.

오늘 그와 같은 인식에서 폭넓게 새로운 교회운동들이 펼쳐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굳이 교회적 존재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관계적 성격을 띠고 있고, 따라서 신앙생활 또한 그 관계성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의 교회적 발현 형태는 여전히 유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안적 교회운동은 기독교운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회를 변화시켜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데서 이른바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인식을 공유하고 수렴해가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 운동은 교회 스스로를 변화시켜 그 구성원들을 진정한 삶의 주체로 형성하게 할 뿐 아니라, 최근 급격히 추락한 교회의 공신력을 회복하는 데도 커다란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바닥으로부터 새로운 교회운동은 기존의 교회일치운동의 구도 또한 새롭게 재편하기를 요구한다. 그간 진보적 기독교운동 진영에서 교회연합 내지는 일치운동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이하 ‘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일치운동은 1970ㆍ80년대를 경유하면서 ‘세계의 일치를 위한 교회의 일치’를 분명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왔다. 그것은 그간 에큐메니칼 운동의 요체이다. 그 정신에 입각해 교회협의회는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진보적 방향타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교회협의회는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정점으로 한 이래 사실상 한국 사회와 교회의 진보적 방향타로서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다. 진보적 기독교운동 안에서 교회협의회의 위상과 역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한 종합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현재 과거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등장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 축소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기총의 등장으로 교회협의회의 위상은 더 중요해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한기총과의 모호한 타협에 신경을 씀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렸다. 그 내부에서는 여전히 지난하게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으나 여전히 그 전망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도 않다. 지난해 총회에서는 지역과 부문단체의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교단간의 협의체제로 축소시켜 구조적으로 더 폐쇄적이고 경직된 체제를 갖추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원칙적으로 개방을 지향하는 것과 폐쇄적 구조를 갖추는 것은 큰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사학법개정안을 두고서도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개방형이사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추천권을 종단에 위임하자는 의견은 중재안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보수교단의 입장에 경도된 타협안에 가깝다.

아마도 교회협의회의 지도층은 교회 자체 그리고 그 연합체인 교회협의회의 위상을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의 역할로 설정하는 것 같다. 과거 정당성 없는 정권하에서처럼 단일한 대척 국면이 형성될 수 없는 조건하에서 노심초사한 교회의 진로 선택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정도는 타협에 있지 않다. 강자와 약자가 대결할 때, 사적 이해와 공공성이 충동할 때 타협은 정도가 되지 못한다. 이 때 타협은 이미 힘의 우위를 점한 세력에게 유리할 뿐이다. 정치공학적 판단에서는 타협이 미덕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적 판단에서는  정말 바른 길이 무엇인지 더욱더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재자로서 교회의 위상은 매우 그럴 듯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위상을 설정할 때 이미 어느 편에 경도되고 있지 않은지 깊이 되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심체로서 교회협의회가 그와 같은 진로모색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처럼 뒤뚱거리는 교회협의회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심으로서 역할 해온 교회협의회를 포기하는 것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 그 점에서 교회협의회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회일치 운동을 펼쳐야 한다. 기존의 교단 구조에 기반한, 그것도 교단 상층부의 연합에 불과한 교회일치 운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인 연합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각 지역과 부문에서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운동체들과 그 구조와 신앙의 풍토를 새롭게 하려는 교회들의 연대로서 교회일치 운동을 새롭게 펼쳐야 한다. 그것은 이미 동거할 수 없는 교회들간의 타협보다는 세계의 진정한 일치를 위한 교회일치 운동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직 미미하지만 그와 같은 운동 또한 전개되고 있다. 비록 미미할지언정 그 운동이 뚜렷한 족적을 형성할 경우, 오늘 세간에서 개신교 하면 싸잡아 자기이익에만 골몰하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는 인식 또한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5.


새롭게 모색하고자 하는 기독교운동의 진로는 필경 좁은 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한 때처럼 대중이 대거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든 기독교인 개인이든 너도 나도 앞다퉈 몰려들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 새로운 기독교운동은 그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를 유폐시켜 고인 물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소수의 무리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몰려드는 대로에 뭐 선한 게 있을까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시간을 아낄 수 있고 편할 때도 많다. 그러나 재미없고 피곤하다. 작은 길을 나서면 온갖 풍경이 눈에 밟힌다. 하나하나 즐길 만하다. 그 묘미에 더 익숙해지는 기독교운동이 훨씬 생명력이 강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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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