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일장춘몽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1-29 11:27
조회
3199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53번째 원고입니다(070126).


일장춘몽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그처럼 목회 삼년이면 설교가 줄줄 쏟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목사는 성경만 펼치면 아무런 준비 없이도 적절한 말씀이 쏟아져 나온다는데... 그러기에 일주일에 기십 편씩 설교를 감당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도통 그런 경지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성서연구를 제외하고는 일주일에 딱 한번 말씀을 준비하는 데도 번번이 전전긍긍이다. 감히 목회 이력을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이력이 붙었는데도 말이다. 청년시절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과 연구소에서 순전히 서생으로 있었던 시절을 제외하고도 목회일선에 뛰어든 지 물경 10여년이 지났다. 부목사로 3년 반 일할 때도 설교에 제법 심혈을 기울였고, 교회를 개척하고 7년이 지나는 동안에는 더더욱 설교에 혼신을 투여하고자 애써 왔다. 꽉 찬 설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 빈 설교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번번이 전전긍긍이라니 이거 참 목사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 탓이다. 일주일 가운데 하루 설교를 준비하는 날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완전한 원고를 작성하는 내 설교기법상 원고의 마지막 방점을 찍기까지는 한시도 방심하지 못하지만, 설교를 준비하기로 정한 날 하루는 열 일 제치고 설교준비에만 몰두한다. 어쩌다 곧바로 영감이 떠올라 술술 풀리는 날이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영감을 얻기까지 고군분투한다. 안절부절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까? 일단 성서일과를 참조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참조할 뿐 그대로 따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성서일과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 다음부터는 온통 성서를 뒤적거린다. 그 다음에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서가에 꽂힌 이 책 저 책을 수없이 넘겨댄다. 마당을 수없이 들락거리기도 한다. 그러고도 영감을 얻지 못할 경우는 묵상에 잠겼다가 결국은 가수면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어느 날도 그렇게 가수면 상태에 빠졌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감으로 충만해진 듯했다. 메시지의 핵심과 그 얼개가 뇌리 속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이제 원고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벅찬 기대감으로 눈을 떴다. 산뜻하게 세수를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으려고 부산을 떨었다. 그 순간까지는 좋았다. 정신 번쩍 들게 얼굴에 물을 끼얹는 순간 머리가 휑한 느낌이다. 뇌리에 가득한 메시지가 빨리 원고로 옮겨달라고 아우성치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휑해진다. 일장춘몽이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데 때 아닌 일장춘몽이라니!

어찌나 허망하던지? 이미 해가 저물어갈 무렵 다시 고군분투 끝에 설교 준비를 마치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무능을 절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그 사태를 즐기는  지도 모르겠다.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을 간절히 구하다가 어느 순간 영감이 스쳤다고 느낄 때 그 희열을 말이다. 그 희열을 청중에게도 전할 수만 있다면 목사로서 체면 구기고 있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 또한 혼자만의 일장춘몽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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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전체 2
  • 2007-04-01 07:44
    아, 그 설교 듣고 싶어라. 목회연한이 길어질수록 설교준비는 더 어려운 것 같아요.
    rn평신도들이 그걸 알까?

  • 2007-04-05 20:06
    목사님도 그러시군요. ㅋㅎ
    rn연륜이 쌓이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