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타자를 향한 개방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9-22 12:48
조회
3084
* <천안신문> 종교인칼럼 네번째 원고입니다(060922).


타자를 향한 개방성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이슬람이 사악하고 잔인한 종교인 듯 오도할 가능성이 농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발언은 아무래도 신중하지 못했다. 직접 사과에 나서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도진 무슬림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 같다. 그와 같은 발언은 교황 개인의 견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사실은 뿌리깊은 서구적 편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대개 이슬람 및 무슬림에 대해 상식 아닌 상식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이슬람은 아랍인들의 종교이고 중동에만 있다’ ‘이슬람은 전쟁과 테러를 조장하는 종교이다’ ‘9․11 테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무슬림 남자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베일을 쓰게 한다’ ‘이슬람 사회는 남자 중심적이다’ ‘이슬람은 학문과 과학의 발전에 저해되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이고 처음부터 원수였다’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도둑의 손을 자르고 간통한 사람을 돌로 쳐죽인다’ 등등.  

과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 교과서에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꾸란)”이라는 구호가 버젓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이슬람에 대한 첫인상을 갖게 된 사람들은, 이슬람은 매우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종교이고 무슬림들은 한결같이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성전’(지하드)를 벌이는 호전적인 사람들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통속적 편견들은 그와 같은 결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그와 같은 통념은 사실과 전혀 다르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식 아닌 상식들이 무비판적으로 유포되는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은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한 입지를 내세우거나 그 어떤 실리를 챙기려는 불온한 세력의 존재 때문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를 들었던 십자군의 실상을 무슬림 사회에 역투사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서구적 편견은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와 같은 편견에서 서구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전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동시에 서구 문명은 흔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곧 성서의 예언 전통과 그리스의 철학 전통이라는 두 가지 기둥을 골간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들은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원천만은 아니다. 그 두 가지 기둥은 이슬람 문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꾸란에 나와 있듯이 무슬림들은 유대인 및 기독교인과 함께 자신들을 ‘성서의 백성들’이라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성서 꾸란은 히브리 성서와 기독교의 성서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신학과 윤리 사상은 그리스 철학을 커다란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서구 세계에 라틴어로 소개된 그리스 철학의 고전이 사실은 아랍어 번역본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균적인 서구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세 기독교 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가 읽은 그리스 철학의 고전들은,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옮겨진 것을 다시 유대인들이 라틴어로 옮긴 것들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문명간의 관계의 본질이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사무엘 헌팅톤은 문명의 충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 내지는 미국 중심 세계관의 위기를 반영한 것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을 바로 보자면 문명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발전하고 공존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간의 관계 역시 그와 같은 교류와 공존을 중요한 기축으로 하여 왔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해주고 있다. 그것이 서로 별개이고 이질적이어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 또는 한편의 우월한 문명이 열등하고 쇠락한 문명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은 지극히 일방적인 억견일 뿐이다.

신앙의 요체는 타자를 향한 개방성에 있다. 절대자에 대한 관심은 사실은 낯선 곳, 낯선 이들을 향한 관심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병행시키는 성서의 요체는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 아닌 타자를 적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증오의 정치가 판치는 오늘 현실에서 그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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