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소통과 교감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힘 - 야고보서 5:13~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0-15 17:13
조회
1169
2023년 10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소통과 교감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힘
본문: 야고보서 5:13~16



우리에게 믿음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야고보서는 그에 대한 하나의 대답입니다.
대개 신앙생활에 입문하면 먼저 초보적인 교리를 접하고, 반복적인 예배와 더불어 교회 생활을 익힙니다. 그러면서 한편의 사람들은 실제 삶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교리적 명제들이 함축하는 신앙의 의미에 몰입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또 하나의 인간관계로 여길 뿐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체감하지 못하는 사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고보서는 그 두 가지 사태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아주 담담하게 삶의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행동하는 믿음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신앙에 상관 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등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을 일깨우고 격려합니다.
그 메시지의 성격 때문에 야고보서는 정경에 포함되어야 할지 오랫동안 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복음서와 대개 서신들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하는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그리스도론적인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교훈을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이유로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이미 초기 교회에서 벌어졌고, 또한 오늘날에도 있을 법한 사태에 대해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현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할 것입니다. 어떤 교리적 명제의 의미를 설파하기보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이름으로 된 이 서신은 세련된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있어서 실제로 야고보가 썼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내밀하게 알고 또한 초기 교회에서 의인으로 존경받았던 야고보의 인품과 무관하지 않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야고보서 교훈의 말미로서, 사람들이 흔히 처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 가운데서 어찌해야 할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 기쁠 때,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일러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방법은 언뜻 보기에 그저 병렬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요한 하나의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라고 할까요? 중심이 되는 초점은 거기에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 즐거운 사람, 고난을 받을 때, 즐거울 때는 아주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곤경을 겪을 때가 있는가 하면 즐거움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일반적인 상황으로서 그 두 가지 상황을 기본 전제로 하여 각각의 경우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고 나서, 정작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로서 세 번째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 기도하고 기쁠 때 찬양하라는 교훈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듯하지만 이 또한 의미심장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곤경에 처할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고, 기쁠 때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 점에서 이 교훈은 새삼스러울 것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교훈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 당연한 감정의 발로를 올바른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고난을 이길 힘을 구하는 것을 뜻하고,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자신이 누리는 삶의 기쁨에 감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경우든 하나님과 교통할 것을 말합니다. 그로써 슬픔과 곤경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쁨으로 오만에 빠지지 않는 삶을 누리도록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 전제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다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구체적인 상황입니다. 병이 든 상황, 그것은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일러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고 합니다. 요즘처럼 일반화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에도 의원을 찾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몸의 질병을 치료하는 전문적인 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 민중들이 병에 들었을 때 어찌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치유했고, 사도들도 병자를 치유했습니다. 그것은 사역의 중심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일반 민중들이 전문적인 의사를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는 것을 말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병자의 치유를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사도들의 시대가 마감되고 난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치유의 은사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지도자들일 뿐입니다. 이 사실은 그저 민중들이 전문적인 의사를 접하기 어려웠던 현실을 드러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치유의 여러 차원을 함축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병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기름을 바르는 것은 당시 근동에서 환자를 치유할 때 널리 쓰이던 방법입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기름으로 생명을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생리학적 치료 방법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문제가 되는 병인에 대해서만 치료하는 현대 서양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얼토당토 않는 방법일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도 몸 전체의 기력을 회복해주는 한방 의술이 유효한 치료 방법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의술이 분화되지 않은 당시에 기름을 바르는 치료 방법은 그렇게 황당한 방법만은 아닙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은 동시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것이 생리적 치유의 측면을 말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심리적 내지는 정신적 치유의 측면을 말합니다. 현대 의술에서는 정신과라는 특화된 차원에서만 이 치유 방법이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 시대에는 이 차원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요즘 의술에서 도무지 인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차원의 중요성을 압니다. 상담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의사를 만나면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지만, 상담만으로도 치유되는 경험을 적지 않게 경험합니다. 병자를 병자로만 대할 때와 사람으로 대할 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의료계에서 전인적 인간 이해가 실종된 것은 끔찍합니다. 의료계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그렇습니다.
이 행위를 일러주는 말씀에 덧붙여진 이야기 또한 흥미롭습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질병과 죄의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언급이 부가적으로 덧붙여져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사람을 속박하고 짓누르는 죄의식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치유의 바탕이자 동시 그 효과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전인적 인간 이해입니다. 사실은 성서 전반이 그렇지만, 이 점은 야고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몸과 정신을 지닌 개별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이 맺고 있는 삶의 관계 전반에 대해서도 전인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의 능력을 역설하는 마지막 강조점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 대목에서 특별히 소통과 교감의 능력으로서 기도를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이 말씀은 기도의 주술적 효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과 교감의 능력으로서 기도의 효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소통행위라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그저 간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놓고 그 상황 가운데서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과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보기도, 본문 말씀은 그 차원을 강조합니다. 본문 말씀은 장로들, 곧 교회 지도자들만의 기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각기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통과 교감, 신뢰와 의지의 차원입니다. 그것이 병든 사람을 온전하게 치유해 줍니다.
인간이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바로 그 차원을 상실한 것이 오늘 사람들의 삶입니다. 개별적인 몸뚱어리는 병 없이 살고 있다 할지라도 다들 병든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병든 삶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또 다른 차원에서 새겨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가운데 “기도에 대하여”의 한 대목입니다.
“너희는 어려운 일이 있고 부족이 있을 때 기도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기쁨이 넘치고 넉넉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체 기도가 무엇이냐? 너희 자신을 생명의 하늘 속에 활짝 펴는 것 아니냐? 너희의 어둠을 허공에 쏟는 것이 시원한 일이라면, 또 너희 가슴에 트는 새벽빛을 쏟아내는 것도 즐거움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혹 너희 혼이 너희를 불러 기도하게 할 때에 너희가 눈물을 흘려 기도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또 너희를 몰아치고 몰아쳐 울다 못해 마침내 웃고야 마는 데까지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는 일어나서 바로 그 시각에 기도하는 이들, 기도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공중에서 만나도록 하라.”
한 구절 한 구절 모두가 와 닿지만,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특별히 마지막 구절이 와 닿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는 일어나서 바로 그 시각에 기도하는 이들, 기도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공중에서 만나도록 하라.”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에서까지도 이 차원을 실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기도를 드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병으로부터 건강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도로 스스로 일어서고, 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며, 나아가 이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둔 삶의 열매에 감사하는 오늘 추수감사 주일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면서 거두어야 할 진실한 삶의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새기기를 바랍니다. 함께 진솔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더하기를 바라며, 저마다의 삶이 더욱 깊어지고 풍요롭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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