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의 편지 - 고린도후서 3:3~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0-22 18:09
조회
1198
2023년 10월 22(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의 편지
본문: 고린도후서 3:3~6



신약성서의 절반은 편지입니다.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하면 모두 편지입니다. ‘서신’이라 하니 그저 성서를 구성하는 하나의 문학 장르로만 인식하고 있지 ‘편지’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갖지 못한 채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라는 일상적 용어로 대할 때 우리는 그 내용을 훨씬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편지에 대한 절절한 느낌이 배어 있는 노래입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천 리 먼 길 서울에 있는 형과 누나들에게 부모님을 대신하여 편지를 쓰고 읽었던 몫을 맡았기에 그 편지에 대한 감은 곧바로 되살아납니다. 종이에 편지를 써서 소식을 주고받았던 경험을 지닌 세대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종이에 펜으로 쓴 편지가 사라진 오늘 그 느낌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메일’이라고 하면 도무지 그 느낌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대에 따른 감각의 차이가 있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편지에 대한 감을 지니고 있다면 그 감으로 말씀을 대하기를 바라며,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도 그 절절한 편지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가 바로 그 편지를 비유로 삼고 있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낸 편지’, 그것도 ‘사람의 가슴판에 쓴 편지’라는 말은 새길수록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사실 그리스어 원문은 ‘돌판’과 대비하여 ‘살로 된 마음 판’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언약을 사람의 가슴 속에 넣어주어 마음 판에 기록하겠다는 옛 예언(예레 31:33)을 환기하며, 또한 새로운 영으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들겠다는 말씀(에스 11:19, 36:26)을 연상시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 공동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로서 가슴판에 쓴 것이라 하고 있으니, 그 이상의 찬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본문 말씀은 일차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고린도교회 교우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대목에서 이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추천장 제도가 있지만,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도 추천장이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 문자로 된 그 어떤 추천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추천장을 내보여야 하는 관계도, 또는 추천장을 받아 그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서로 신뢰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은 사실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에 그 상황이 잘 드러나 있고, 그보다 반 년 내지는 일 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번째 편지에도 그 상황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고린도교회 교우들 가운데 어떤 사람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 사람이 뉘우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받고 쓴 편지가 두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를 다행으로 여기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 상황이 진정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의 직위를 강조해 권위를 내세우는 일(11:5; 12:1), 다른 교회의 추천장을 제시하는 일(3:1), 특별한 계시체험(12:2)과 황홀경(5:11~13)을 문제삼는 일, 성서해석의 현란함을 자랑하는 일(3:7~11), 그리고 심지어는 바울의 외모의 변변찮음과 말의 어눌함을 들어 깎아내리는 일(10:1~11; 11:6; 20~21) 등으로 착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여전히 고린도교회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다, 스스로 인신공격과 모독까지 경험한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그럼에도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평정심을 갖고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자신의 관계는 그 어떤 외적 증표로 보증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추천장을 가지고 와서 내밀어야 하는 관계, 또는 자신이 다른 데 나설 때 추천장을 써달라고 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고린도교회 그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보내 편지, 곧 진정한 추천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된 편지가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편지, 곧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의 삶과 인격 그 자체에 새겨진 편지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교회공동체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문제들에 휩싸여 있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보내는 사도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 신뢰를 보낸 이후 사도 바울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전적으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울의 일관된 신학적 입장을 드러냅니다. 사도의 사도 됨,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 인간적 업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정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업적을 따라 각자 몫을 정해 주는 세상의 질서를 무용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저 마음대로 하는 하나님의 임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인간의 질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은 간결한 명제로 부연해서 집약하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여기서 문자가 인간의 중요한 소통 수단으로서 문자 그 자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여기서 문자는 율법조문을 뜻합니다. 구약, 곧 율법입니다. 반면에 새 언약, 곧 신약은 영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3절 말씀이 환기하듯, 예레미야의 예언(31: 31~33)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 율법조문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영으로 된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를 연상하며 그렇게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조문도 광채가 났는데, 사람을 의롭게 하고 살리는 성령의 역할에는 더더욱 광채가 빛나지 않겠느냐 말합니다(3:7~11).

사도 바울이 법조문으로서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문맥에 따라서 율법의 완성을 말하는가 하면, 율법의 폐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완성을 말할 때, 그것은 율법이 담고 있는 본래 뜻, 그 긍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율법의 폐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형식 그 자체, 법의 한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적 규정의 근본적 한계를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법적 규정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만, 그 자체로 인간 삶의 길을 온전히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더욱이 법적 규정은 그 자체로 항상 어떤 배제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용될 경우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줄여 말하면 사도 바울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질서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구원의 희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인격의 변화로, 법조문에 의해 규정당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으로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뜻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는 일에 적극적 동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안전을 보장하고 생태계의 온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법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최소한 지켜야 할 가치를 명문화하자는 뜻입니다.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경우 법의 유용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법이 없어도 제 할 바를 다하고 타인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법의 무용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사형제가 있어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법이 자체의 논리에 충실할 때 사람을 옭아매는 경우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단적인 예입니다. 다른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정죄의 대상으로 삼는 이 법은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자유를 속박할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문자로 만들어 버린 현실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문자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는 새 역사 70주년을 맞이하여 오늘의 선교적 과제를 제시한 <제7문서>를 지난 9월 제108회 총회에서 채택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주 심도 있는 작성 과정과 심사숙고 끝에 준비된 신학적 문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념이 문제시되어 지금 조정 가운데 있습니다. ‘성평등’과 ‘성적지향’이라는 개념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가치판단을 시도하는 문맥은 아니고 불평등과 차별의 현상을 지적하는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집필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지혜를 구해, 원문을 그대로 두고 그 개념에 대해서는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각주로 표시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원문의 취지를 살려 풀어쓰고 거꾸로 원문을 각주로 표시하자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왜 그 개념이 문제시되었을까요? 문자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 1:27)는 문구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의미가 남녀가 하나 된 온전한 인간을 뜻하는 것(창세 2:7과 더불어)으로 보는 해석이 이미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초기 시대부터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 해석의 의미를 간과해 버린 탓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대의를 간과해 버린 탓입니다. 그렇게 문자에 매일 때 어떻게 됩니까? 엄연한 차별의 현실이 부정됩니다. 차별받는 사람이 배제됩니다. 문자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에 매이면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영의 약속을 새로운 희망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사람의 온전한 인격의 변화, 법조문에 의해 규정당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으로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7~18).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세의 율법을 대할 때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서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제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 진실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자신의 삶 자체에 그리스도를 새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이 완벽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 스스로 그렇게 완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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