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 마태복음 7:1~5(오가사와라 준 목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3-10-29 22:46
조회
1239
日時場所 2023年10月29日、大田老會交流プログラム、天安サルリム教会
일시장소 2023년 10월 29일 대전노회 교류 프로그램 / 천안살림교회
聖書箇所 マタイによる福音書7章1−5節。본문 : 마태복음 7:1~5절
「大きな丸太が目の中から」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오가사와라 준(小笠原純) 목사(교토 헤이안平安교회) / 통역: 김성윤 교우



こんにちは。はじめまして。わたしは小笠原純と申します。平安教会の牧師をしています。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가사와라쥰 이라고 합니다. 교토의 헤이안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습니다
天安サルリム教会に招かれまして、こうして皆様と共に礼拝を守ることができますことを、まず神さまに感謝したいと思います。 천안살림교회에 초대받아 이렇게 여러분들과 예배를 드릴수 있게 되어 우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韓国の教会は私たち日本の教会に、キリスト教における赦しの大切さを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 한국교회는 우리들 일본교회에 기독교의 용서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日本基督教団は1967年に「第二次大戦下における日本基督教団の責任についての告白」を公にいたしました。일본기독교단은 1967년에 “제2차 세계대전 하에서의 일본 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アジアの諸教会はこのことを受けとめてくださり、日本基督教団の諸教会に対して赦しと和解の道を示してくださいました。아시아의 제교회는 이것을 받아주시고 일본기독교단의 제교회에 대하여 용서와 화해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今回、独立記念館や柳寛順歴史遺跡等などをお訪ねすることができ、感謝でした。大田老会の諸教会との交わりをこころから感謝いたします。이번에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대전노회의 여러 교회와의 교류를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わたしはこの0夏、ひとりで釜山を旅行いたしました。釜山博物館を訪ねる途中で、スマートフォンを落としてしまいました。釜山博物館を見学している途中に気が付き、博物館の方々が博物館の中を探し回ってくださいましたが、見つかりませんでした。 저는 이번 여름 홀로 부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부산박물관을 방문하던 도중 핸드폰을 분실하였습니다. 부산박물관을 견학하고있던 도중 분실한 것을 알아차려, 박물관의 여러분들이 박물관 안을 찾아 주셨습니다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そのあと博物館の人と一緒に警察に届けにいきました。道で拾った人が釜山警察に届けてくださり、スマートフォンは帰ってきました。やっぱり韓国は良いところだと、とてもうれしかったのですが、その間、とんでもないことが起こっていました。
그 이후 박물관 직원과 함께 경찰에 분실신고를 하였습니다. 길에서 핸드폰을 습득하신 분이 부산경찰에 신고를 해주셔서 핸드폰은 무사히 찾게 되었습니다. 역시 한국은 좋은 곳이라고 매우 기뻤습니다만 동시에 엉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わたしの妻がたまたまわたしに電話をしていました。すると釜山警察の方が電話にでられました。「韓国警察ですけれども、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られたそうです。わたしの妻はびっくり仰天しました。まさか夫に電話をして、韓国警察の人が出るとは思ってなかったからです。 제 처가 때마침 전화를 걸어왔고 부산 경찰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 경찰입니다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처는 엄청 놀랐었습니다. 설마 남편에 전화를 했는데 한국 경찰이 대답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あなたはこのスマートフォンの持ち主とどういう関係ですか」と聞かれて、「妻です」と答えたそうです。妻はわたしが釜山で事故に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心臓が止まりそうになったと言っていました。“당신은 이 스마트폰의 주인과 어떤 관계이십니까?”라고 질문을 들었고 “아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제가 부산에서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고 합니다.
釜山警察からスマートフォンが戻ってきたあと、わたしが妻に電話をすると、「人生の中で一番びっくりした」と言われ、怒られてしまいました。「あなた、スマートフォン落としたの、これで二度目だよ。旅行する時は首からかけていなさい」と言われ、こうして今回はスマートフォンを首からかけています。 부산경찰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아내에게 전화를 거니 “인생에서 가장 놀랐다”고 혼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핸드폰 잃어버린 게 이번이 두번째에요. 여행할 때는 목에다 걸고 있으세요”라고 해서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이렇게 목에다 걸고 있습니다.
翌日、途中までしか見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釜山博物館をお訪ねし、お礼を言ったあと、ゆっくりと展示を見ることができました。釜山の歴史や、日本との関係。日本の豊臣秀吉による侵略の出来事である「壬辰倭乱」。アジア・太平洋戦争における日本による侵略の歴史。そうしたことも謝罪の気持ちを持ちつつ、じっくりと見ることができました。また朝鮮戦争のことなども学ぶことができました。 다음날 중도에 멈출 수 밖에 없었던 박물관을 다시 방문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린 후 천천히 다시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역사와 일본과의 관계,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침략 사건인 임진왜란.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침략 역사. 이러한 내용 등을 사죄의 마음을 갖고 차분히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その翌日は、朝鮮通信使歴史館を訪れました。「壬辰倭乱」のあと、日本の江戸時代、朝鮮通信使による外交によって、200年の間、朝鮮と日本との間に、平和と友好のときが保たれ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 그 다음날은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방문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에도시대는 조선통신사와의 외교를 통해 약 200년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에 평화와 우호의 시간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朝鮮通信使は、わたしが住んでいる京都も尋ねてくださっています。朝鮮通信使の働きを見ながら、大田老會と京都教区の交流で、韓国のクリスチャンと日本のクリスチャンが行き来をして、交流をするということも、とても大切なことだと思いました。大田老會との交流が、朝鮮通信使の働きのように、神さまの導きによって、平和と友好の働きとなるようにしたいと思いました。 조선통신사는 제가 살고 있는 교토도 방문해 주셨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을 보며서 대전노회와 교토교구의 교류를 통해 양국의 크리스챤들이 서로 왕래하며 교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전노회와의 교류가 조선통신사의 역사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평화와 우호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今日はどのような説教をすればよいだろうかと、わたしなりに考えました。あまりよそゆきの格調高い話をするのではなく、わたしが日本の教会でするようなふつうの話をするのが良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そうすると日本の教会のことが少しでもわかっていただけ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금일 저는 어떤 설교를 하면 좋을까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무 진지하고 점잖은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제가 일본의 교회에서 하는 평범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일본의 교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わたしは昔、保育園の園長をしていました。キリスト教主義の保育園でしたから、目を閉じてお祈りをする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お祈りのときには目を閉じましょうね」と、みんな保育士の先生から言われているわけです。「手を合わせ、目を閉じて、みんな静かにいたしましょう。 かみさま、ぼくのわたしの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ささげます」という歌をあと、お祈りをします。저는 예전에 어린이집 원장을 했습니다. 크리스챤계 어린이집이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기도할 때는 눈을 감는 거에요”라고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지요.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모두 조용히 합시다. 하나님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세요”라고 하는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保育士の先生がお祈りをし、そしてお祈りが終わったあとに、保育士の先生のところにやってきて、「先生、聖子ちゃんが、お祈りのとき、目をあけていました」と教えてくれるこどもがいます。「先生、聖子ちゃんが、お祈りのとき、目をあけていました」と教えてくれるこどもがいます。先生が「ほんと?。教えてくれて、ありがとう。でもどうして聖子ちゃんがお祈りのとき目を開けていたって、明菜ちゃんにわかったの?」。 선생님이 기도를 하고, 기도가 끝난 후 한 어린이가 선생님에게 와서 “선생님 세이코가 기도할 때 눈을 떴어요” 하고 가르쳐 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가르쳐 줘서 고마워. 그런데 어떻게 세이코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있다는걸 아키나는 어떻게 알았어?”
聖子ちゃんがお祈りのときに目を開けているということがわかるには、明菜ちゃんも目を開けていなければわからないわけです。大人であれば自分も目をあけているということがわかるので、「先生、聖子ちゃんが、お祈りのとき、目をあけていました」と報告にいくことはしないわけです。でも保育園のこどもはあまりそんなこと考えないで、報告にいくわけです。 세이코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있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아키나도 눈을 뜨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어른이라면 자신도 눈을 뜨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선생님, 세이코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있어요”라고 선생님께 보고하러 가지 않지요. 그러나 어린이집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이르는 것입니다.
今日の聖書の箇所の「人を裁くな」というところは、ひじょうに端的に話されてい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7章1−2節には【「人を裁くな。あなたがたも裁か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あなたがたは、自分の裁く裁きで裁かれ、自分の量る秤で量り与えられる】とあります。イエスさまは「自分が裁くと、人もあなたを裁く」と言われました。裁きの世界に生きている限り、互いに裁きあい、傷つけ合うだけだと言われました。 오늘 말씀 중 “남을 심판하지말라”는 말씀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 이는 너희도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들은 너희가 심판하는 심판으로 판단을 받고 자신이 재는 저울로 재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심판하는 대로 남도 너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서로를 심판하고 상처를 줄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私たちはよく自分が相手を非難している内容で、同じように非難されることがあるわけです。たとえばこうです。 우리들은 종종 자신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동일하게 비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大澤さんと小笠原さんと波頭さんがいるとして、こんな感じです。波頭さんが大澤さんがこう言うわけです。「小笠原さんは陰で人の悪口ばっかりいって、とんでもない人ですよね。悪口をいうのなら、陰でこそこそいわないで目の前でいったらいいのに。ねえ、大澤さん」。そして大澤さんが言います。「そうだね。波頭さん。でも、小笠原さん、いまここにいないよ」。陰口を言っている人を非難するのに、陰口で非難しているわけです。私たちの日常って、こんなことがありますね。 오오사와상과 오가사와라상, 하토상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런 식입니다. “ 오가사와라상은 뒤에서 사토의 뒷담화만 하는 정말 못된 사람이죠. 험담을 하려면 뒤에서 몰래하지 말고 사람 앞에서 하면 좋겠어요. 그렇죠 오오사와씨… 그러자 오오사와씨는 말합니다. 그렇네요 하토씨.. 그렇지만 오가사와라씨 지금 여기 없잖아요… 뒷담화를 자주하는 사람을 비난하는데.. 뒷담화로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의 일상 중에 이런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マタイによる福音書7章3ー4節には【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おが屑は見えるのに、なぜ自分の目の中の丸太に気づかないのか。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おが屑を取ら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えようか。自分の目に丸太があるではないか】とあります。 마태복음 7장 3~4절 에는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형제를 향하여 네 눈 속에서 티끌을 빼게 해달라고 말할수 있는가?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닌가 말씀하십니다.
自分のほうに実は原因があるのに、相手の方がおかしな事をしていると思いこんでしまうことが、私たちにはあります。昔、こんなことがありました。友人のつれあいに連れられて、私たち家族は、木のおもちゃ屋さんに行きました。すてきなおもちゃが、いっぱいあります。でも値段をみると、またびっくりします。高いわけです。それでもまあ、記念に何か、娘に買ってやろうということで、わたしは娘にコマを買ってあげることにしました。コマなら300円くらいで売っていました。 사실은 나에게 원인이 있음에도 상대방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부부에 이끌려 우리 가족은 나무 장난감 가게에 갔습니다. 멋진 장난감이 가득했습니다만 가격을 보고 또 한번 놀랐습니다. 비싼거죠. 그래도 뭐 기념으로 딸에게 사주자고 해서 저는 딸에게 팽이를 사주기로 했습니다. 팽이는 300엔 정도에 팔고 있었습니다.
いろんなコマがある中から、「どれにする。これなんかおもしろいよ」と取り出したのが、このコマです。顔がかいてあって、なかなかかわいらしいのです。わたしはこのコマを回してみました。よくまわるのです。でもなんかかわいそうな気がしました。かわいらしい顔がかいてあるので、「こんなにまわしたら、この人形、目が回ってしまうだろう。それになんか、頭、もって回したりして、ちょっとかわいそうだなあ」と思ったわけです。 다양한 종류의 팽이중에서 “어떤 걸로 하래? 이런 게 재미있네”라며 고른 것이 이 팽이입니다. 얼굴이 그려져 있어 상당히 귀여웠습니다. 저는 이 팽이를 돌려보았습니다.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왠지 불쌍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귀여운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에 “이렇게 돌리면 이 인형의 눈이 돌아가 버리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머리를 들고 돌리기도 하고 좀 불쌍하다고 생각이 든거지요. でもよくまわるので、買うことにしました。そしてお金を払いながら、わたしは「このコマ、なんか、ちょっとかわいそうだねえ。目が回ってしまいそう」と、定員さんに言いました。すると定員さんは、とっても申し訳なさそうに、こう言いました。「それ、起きあがりこぼし、なんですけど・・・」。 그래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지불하면서 저는 “이 팽이 뭔가 조금 불쌍하네요. 눈이 돌아가 버리네요” 라고 점원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원이 대단히 미안한 표정으로 “그거 오뚜기 인형입니다만….”
わたしはお店の人の目におが屑があると思って、お店の人に、「これかわいそうだねえ」と言ったわけです。ちょっとこどものおもちゃとしては、おかしいいんじゃないかと思って、言ったわけです。しかしじっさいはわたしの目に丸太があって、コマにみえていただけなのです。 저는 이 점원의 눈에 티끌이 있다고 생각해서 점원에게 “이거 불쌍한 것 같아”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이의 장난감으로서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 눈 속에 들보가 있어 팽이로 보였던 것입니다. じつはそれはかわいそうでもなんでもない、起きあがりこぼしであったわけです。だいたい私たちはこういうことをするわけです。사실은 그것은 불쌍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오뚜기 인형이었습니다. 대체로 우리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自分の方にじつは非があるのに、ほかの人が悪いように思いこんでしまって、人を裁いてしまう。「わたしはぜったい悪くない。悪いのはあの人よ」。そんなふうに思うのです。 실은 자신에게 죄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나쁜 것처럼 생각해서 사람들을 판단해 버립니다. “나는 절대로 나쁘지 않아. 잘못된 것은 저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わたしはこのとてもしょーもない体験をとおして、「やっぱり裁いたらだめだなあ」と思います。このコマ、300円で、安い買い物だったなあと思います。 저는 매우 아주 별 것 아닌 경험을 통해서 “역시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팽이, 300엔으로 싸게 샀다고 생각했습니다. わたしは、このおきあがりこぼしを、戒めのおきあがりこぼしとして、ずっと大切にしています。一緒に韓国にまで、このおきあがりこぼしと一緒に来ることができて、とてもうれしいです。 저는 이 오뚜기 인형을 교훈을 주는 장난감으로서 계속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국에까지 이 오뚜기 인형과 함께 올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私たちはいろいろな欠点を抱えています。またおかしなことを言うときもあります。私たちは怒ることもあるし、機嫌が悪いこともあります。大きな悲しみを抱えて、自分で自分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こともあります。人が人を傷つけるのは、弱さのゆえだと思います。自分が馬鹿にされたような気がしたり、自分のことを人がわかってくれなかったり、孤独でさみしさを抱えているとき、私たちは人を傷つけてしまいます。 우리들은 이러저러한 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이상한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화를 낼 때도 있고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을 안고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바보취급 당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롭고 쓸쓸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しかしまた私たちにはいいところもたくさんあるのです。教会や保育園で働いていると、いろいろなことで支えられているなあと思わされます。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선한 부분도 많습니다. 교회와 어린이 집에서 일하고 있으면 여러가지 일로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わたしが「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仕事を、わたしのかわりにしてくださる方がいたりします。悩むことがあり、わたしがから笑顔をつくって笑っていると、わたしの身体を気遣って、声をかけてくださる人がいます。 저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저 대신에 해주시는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 걱정거리가 있어 제가 애써 웃음을 짓고 있으면 제 몸을 걱정하여 말을 걸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わたしの家族を誘って、戸外に連れ出してくださり、たのしいひとときをつくってくださる人がいます。人は支え合って生きているのだと、こころから思えます。 제 가족을 초대해 야외로 데리고 가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듭니다.
イエスさまは「裁くな」と言われました。わたしは現代において、またキリスト教において、この「裁くな」と言われたイエスさまの教えは、とても「重い」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は「裁くな」と言われたのです。 예수님은 “판단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현대에 와서, 기독교에 있어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보다 무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私たち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裁くことではなくて、祈ること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ヤコブの手紙5章15節にはこんな御言葉が記されています。【信仰に基づく祈りは、病人を救い、主がその人を起き上がらせてくださいます。そ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あれば、主が赦してくださいます】。 야고보서 5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神さまは私たちが人を裁いて、その人を打ちのめすことよりも、「その人が起き上がること」を望んでおられます。そして「そ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あれば、主が赦してくださる」のです。 주님은 우리들이 사람을 심판하고 벌을 주는 것보다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라면 주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私たちの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はどのような歩みをされたのでしょうか。ルカによる福音書23章26節以下には、「十字架につけられる」という聖書の箇所があります。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길을 걸어오신 것일까요? 누가복음 23장 26절에는 “십자가를 지웠다”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23章32節以下をお読みいたします。23장 32절이하를 읽겠습니다. 【ほかにも、二人の犯罪人が、イエスと一緒に死刑にされるために、引かれて行った。「されこうべ」と呼ばれている所に来ると、そこで人々は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犯罪人も、一人は右に一人は左に、十字架につけた。】。“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한 사람은 오른쪽에, 또 한 사람은 왼쪽에 달았다. 〔そのとき、イエスは言われた。「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人々はくじを引いて、イエスの服を分け合った。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民衆は立って見つめていた。議員たちも、あざ笑って言った。「他人を救ったのだ。もし神からのメシアで、選ばれた者なら、自分を救うがよい。」 사람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란 사람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자라면 자기 자신이나 구원할 것을.. ‘ 兵士たちもイエスに近寄り、酸いぶどう酒を突きつけながら侮辱して、言った。「お前がユダヤ人の王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イエスの頭の上には、「これはユダヤ人の王」と書いた札も掲げてあった】。 병사들도 예수님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말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다.”
十字架につけられ、あざけられるイエスさま。目を覆いたくなるような光景で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した。「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 십자가에 달려 조롱당하신 예수님. 눈을 감고 싶어지는 광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イエスさまは人を裁くのではなく、自分が裁かれ、十字架の死に向かわれました。あざけられ、蔑まれながら、ゴルゴタの丘へと向かわれ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のすべてを知っていてくださり、裁きあいの世界ではなく、わかちあいの世界へ、祈りの世界へと、私たちを導いて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판단을 받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셨습니다. 조롱당하고 멸시받으며 골고다의 언덕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아시며 심판하는 세상이 아닌 나눔의 세계로, 기도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人を裁いたりすることの多い私たちです。しかし自分の目の中に丸太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謙虚な気持ちを忘れることなく、歩んで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と、神さまにお祈りしたいと思います。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겸손한 마음을 잊지 않고 이 삶을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2023年10月29日、大田老會交流プログラム、天安サルリム教会)

恵み深き主なる神さま。
どうかいたずらに人を裁くのではなく、謙虚な思いを持って歩んで行く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私たちを導いてください。
天安サルリム教会のみなさんの歩みがこれからも、神さまによって豊かに祝福されますように。お一人お一人が、あなたに愛され、ますます良き人として歩んで行く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この祈り、主イエス・キリストのお名前を通して、御前にお献げいたします。アーメン。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부디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천안살림교회의 모든 분들의 인생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 사랑받으며 점점 더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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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