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대를 이어가는 사랑의 공동체 - 요한1서 2:12~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1-05 17:20
조회
1105
2023년 11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세대를 이어가는 사랑의 공동체
본문: 요한1서 2:12~14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으로 집약되는 요한서신은 사실 어느 대목을 읽어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그 전후 맥락을 잘 모르면 무슨 뜻인지 얼른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뜻 그 자체로는 어렵지 않으나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의도로 이야기한 것인지 얼른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은 편지를 보내는 까닭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운율을 갖춘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크게 두 부분(12~13과 14)으로 나누어진 말씀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사실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앞부분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고, 뒷부분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보낸다’는 것과 ‘보냈다’는 차이뿐입니다. 형식과 내용에서 큰 차이 없이 그렇게 반복하면서 운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편지를 보낸 뜻을 두고두고 깊이 새겨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은 그 수신자 또는 청중을 세 부류로 호칭합니다. ‘자녀’, ‘아버지’, ‘젊은이’입니다. 호칭 그 자체로 보면 분명히 세 부류이지만, 전후 맥락을 통해서 볼 때 두 부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첫머리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통칭하는 것이고, 이어지는 ‘아버지’와 ‘젊은이’ 그 가운데 두 부류를 호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분에서 ‘자녀’ 대신에 ‘어린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세 부류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각기 다른 세대를 호칭하고 있는 것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어우러진 공동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세대가 함께 새겨야 할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모든 세대가 더불어 새기며 공유해야 할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반복되는 형식을 통해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대가 새겨야 할 진실은 무엇일까요? 먼저 첫머리를 볼까요? “자녀 된 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2).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정죄하는 일이 없이 온전한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대목을 볼까요? “아버지 된 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3a). ‘태초부터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믿음(요한 1:2)을 바탕으로 합니다. 여기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적어도 그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한 앞선 세대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대목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3b). 명확히 앞선 세대와 구별되는 신세대를 향한 말씀입니다. 신세대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그 신세대가 ‘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세력들입니다(참조. 2:18). 젊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게 미혹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상 이 편지를 쓴 배경이 이 대목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과거형으로 반복된 말씀(14)은 대동소이합니다. 어린이들이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점, 그리고 젊은이들이 악한 자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점이 다를 뿐 다른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본문 말씀의 뜻을 간략히 집약하면 이렇습니다. 진실을 체험하는 방식에서 세대간 차이가 있지만, 모두 그 진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유된 진실이 뭘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태초의 말씀이 성육신한 진실을 전제합니다(요한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이 성육신하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세대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아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하고자 하는 데 편지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본문 말씀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새삼스럽게 필요했을까요? 요한 공동체가 직면했던 상황이 그 배경입니다. 젊은이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는 이야기 가운데 그 직접적인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악한 자’로 지칭되는 이들이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공유했던 세대, 그리고 그렇게 그 삶을 공유했던 사도들이 가르쳤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비교적 생생하게 전해 받고 그 뜻을 알고 있던 세대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교회 안에는 다른 신앙의 형태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영지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지주의’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땅 위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신앙의 경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지니고 땅에서 살았던 삶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고 영적 지혜를 추구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신앙이 형성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악한 자’라고 한 것은 바로 그 신앙을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미혹한 이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좀 심하다 싶기는 하지만, 그것의 해악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자기만의 의를 내세우며 다른 자매형제들을 정죄한 것이 그 해악입니다. 본문 말씀의 첫머리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진실을 환기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을 정죄하는 자기 의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길(4:7)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지혜든 교리든 그것을 빌미로 자기 의에 빠지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용납하는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 계명이며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2:7~8).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물론 심지어 옛 율법의 정신 또한 그 사랑의 삶을 이루라는 데 근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모든 세대가 올곧게 그 길을 가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그 진실을 알게 된 경위와 체험의 방식은 서로 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세대가 일치합니다. 결국 본문 말씀은, 그렇게 다른 경험과 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알고 따르는 데서, 곧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데서 한 길로 나아갈 것을 새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본문 말씀을 마주하는 가운데 우리의 공동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여 년 전 처음 교회를 시작하고 한동안 어른들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기도가 이뤄졌습니다. 그다음에는 젊은이들이 모이고 활기를 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로 그 기도 제목도 이뤄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규모를 자랑할 수는 없지만, 모든 세대를 아울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공동체 정신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데서 누리게 된 복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완전하다고 자부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공동체 정신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교회가 그 정신으로 일관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전한 공동체로서 성격을 본질로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로서 사회적 실제라는 성격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초기 교회들이 수없이 맞아야 했던 위기들은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때마다 환기해야 하는 진실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공동체 정신입니다. 그 진실에 이르는 체험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그 본령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이 찾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올곶게 그 정신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로써 사랑의 온기를 직접 체험하고, 저마다의 의를 내세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삶을 이루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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