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 마가복음 8:31~3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2-27 17:01
조회
7356
2022년 2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본문: 마가복음 8:31~38



이번 주간 성회 수요일(2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을 앞둔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고 있는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뜻을 제대로 알면 함부로 선포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난주일 나눴던 양날 칼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까요?

오늘 말씀의 앞서는 부분(8:27~30)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길을 가는 중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답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베드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받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처음으로 예고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음에 이를 수 있느냐는 항변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은 상당히 극단적입니다. 어쩌자고 “사탄아, 물러가라!”고까지 했을까요? 이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생각하는 당신의 몫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몫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그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고난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예고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서슴없이 인정했던 베드로는 펄쩍 뛰며 예수께 항의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메시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당시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일반화된 메시아상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였습니다. 다윗 왕권의 회복이 곧 메시아의 도래로 간주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각한 것은 그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하는 메시아의 몫은 끝까지 섬기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중신학(김용복)은 이를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메시아적 정치’로 구분합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의 메시아니즘’과 ‘민중의 메시아니즘’ 또는 ‘지배의 메시아니즘’과 ‘섬김의 메시아니즘’의 대비입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선동에 맞서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라는 진실을 전하는 차이입니다.
사실 그렇게 대별되는 메시아상은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부터 있어 왔습니다. 한편에서는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를 대망하였는가 하면, 오늘 본문말씀 앞에 나온 것처럼 엘리야와 같은 메시아 또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그 진정한 해법 또한 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시대 전후로 오랫동안 분출한 메시아운동은 대개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를 그리는 염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승리자로서 전능한 메시아입니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섬김’의 메시아상은 그다지 강력하게 부상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권력에 의해 고난받고 희생당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예수님의 생각은 심지어 그 제자들에게까지도 쉽사리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은 자리다툼까지 벌이기도 했습니다(9:34). 베드로가 펄쩍 뛴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보고 엄하게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사탄’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의 사탄이라는 말은 예수의 길과는 대립되는 세상의 원리를 말합니다. 본문을 따르면 ‘하나님의 일’에 대비되는 ‘사람의 일’입니다. 인간사회의 지배원리를 말합니다. 사람들을 유혹하고 급기야는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그 힘입니다. 지배의 욕망, 군림의 욕망 곧 권력의 욕망입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그 길을 부정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8:34~35)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를 비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의 사형틀입니다.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 공로와 자기 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배의 욕망, 군림의 욕망, 권력의 욕망을 포기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공로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좌우할 수 있다는 태도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살겠다는 의지를 저버리고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각자 자신의 의지와 공로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벗어날 때 뭇 생명이 참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치입니다. 나는 결코 동물을 학대하지 않지만 고기를 먹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전쟁을 반대하지만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했을 때 그로 인한 어떤 혜택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정책에 반대하고 있지만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으로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고 할까요?
자기의 의지와 공로를 부정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와 공로로 감당한다는 착각을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의롭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피하고자 하는 일을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의로울 수 있고 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 삶의 적나라한 인과관계와 실상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고난 받을 수밖에 없고,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로마제국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분의 삶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분은 또한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사실 모든 사람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오로지 사랑을 실천한 분이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은 그분이 극형에 처해지도록 다들 방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삶의 실상을 들추어내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 말씀은 자기 부정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자기 긍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그 누군가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삶의 현실을 깨달아 함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 현실을 넘어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만 의로운 체 하는 그 태도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더불어 살아갈 수 있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도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뜻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삶의 가능성, 그 삶의 현실을 봅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타인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삶의 조건을 넘어서고자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신비한 주술과 같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3.1절 기념주일로 그 뜻을 기리는 동시에 입학과 졸업으로 또 새로운 삶의 여정에 진입한 젊은이들을 축하하는 가운데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3.1혁명의 역사적 쾌거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찌 되었을까요? 그래도 어찌어찌 열강에 의해 독립국가로 보장 받고 존속해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한의 나락과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부단히 딛고 일어서는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 나간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그 깨달음으로 시작된 동학 이래 다시 한 번 역사의 분수령을 형성한 3.1혁명의 사건은 우리 역사의 원동력이 되어 왔고, 우리의 자긍심의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남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불어 세우는 길이 되어야 한다는 정신, 곧 민족의 자주독립을 내세웠지만 보편적인 세계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독립선언의 숭고한 정신은 오늘의 상황에서도 결코 퇴색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3.1혁명은 더더욱 극적입니다. 동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3.1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곧 자기를 내어주는 사건이요 죽음을 뜻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았고 피를 흘렸습니까? 그것은 순교였고(함석헌), 곧 자기를 내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곧바로 독립을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 민중은 각성하였고 나의 나됨을 비로소 자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역사적 부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원점으로서 정치사회적 의의를 지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고, 고난과 부활의 역설을 재현한 사건으로서 신학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죽음으로써 오히려 살아낸 사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모든 사람의 십자가를 벗겨버린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야말로 원대한 꿈을 품기를 바랍니다. 자기 혼자 살 길을 찾는 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처럼 강요하는 부조리한 사회적 틀에 매여 움츠려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대남’, 그것 허상 아닙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생명을 보장하는 길을 따르는 위대한 믿음의 전통 안에 있으며, 피와 땀으로 얼룩진 고난의 역사를 딛고 일어선 역사의 전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 숭고한 뜻이 우리의 젊은이들의 가슴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 진정으로 자기를 실현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그 진실이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늘 말씀의 진실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