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6-14 11:14
조회
2889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060612)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할 때면 항상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그 느낌이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지난 주간 필리핀 여행은 내가 다녀온 먼 나라 여행 가운데서 설레는 마음이 사실 조금 덜 했다. 필리핀을 먼 미지의 나라로 느끼지 않았던 탓이다. 한국과 필리핀은 한 때 정치적으로 매우 유사한 상황을 공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로 우리 사회 안에 있고, 많은 농촌 총각들이 필리핀 여성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다. 바나나와 망고 등은 우리가 흔히 먹는 과일로 그 상당수가 필리핀 산이다. 타갈로그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를 쓰는 까닭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도 하고, 또 많은 한국의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때문에 필리핀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필리핀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난하고 정정이 불안한 나라, 그게 필리핀에 대한 이미지였다. 실제로 가 보니 그 이미지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에는 호화판 저택들이 눈에 띄는가 하면 또 한편에는 움막이나 다를 바 없는 남루한 주택들이 즐비한 모양, 최고급 외제 승용차들이 적지 않게 굴러다니는가 하면 미군이 남기고 간 지프차를 개조한 ‘지프니’와 세 발 오토바이 ‘트라이시클’이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에서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한국말과 한글은 그와 대조되는 한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인상은 오히려 피상적일 뿐이었다. 여행의 묘미는 쉽사리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나 사람들의 겉모습을 훑어보는 것으로는 맛볼 수 없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취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진미이다. 낯선 이방인에 대해 격의없이 호감과 정감을 표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서로에게 낯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그토록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여정 내내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사진을 찍어 귀한 추억의 순간을 붙잡아 준 조엘씨에게서는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에 노심초사하는 우리의 여느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보았다. 우리의 재래시장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울롱가포 시장에서는 정말 보통사람들의 체취를 그대로 맡을 수 있어 더 없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사실상 미국의 경제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구조적인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필리핀 경제의 문제를 엿볼 수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전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이 살아가는 필리핀 사람들의 느긋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민속공연, 그리고 생활문화와 언어 등을 보면서는 그야말로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필리핀 문화의 포용성을 짐작할 수도 있었다. 300년의 스페인지배와 100년의 미국지배, 그리고 짧은 일본점령은 필리핀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 필리핀의 문화적 잠재력을 볼 수 있었다. 결코 가난하고 후진적인 국가 이미지로 한정할 수 없는 단면을 눈꼽만큼은 체험한 셈이다.

고정관념을 고착시키는 기회가 아니라, 낯선 경험으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서 여행은 역시 즐겁다. 내 곁의 누군가를 고정관념이 아니라 언제나 경이감으로 대할 수 있다면 우리 일상의 삶 또한 그와 같이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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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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