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 종교의 배타성을 넘어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6-27 00:46
조회
3597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 2006년 상반기 열린 포럼 <발제2>

2006년 7월 26일(월) 오후 5시~8시 / 한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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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배타성을 넘어서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1. 역사적ㆍ사회적 실체로서 종교, 그 배타성과 포용성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배타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도에 대한 열성과 함께 타종교를 우상시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배타성은 매우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제들을 둘러싸고 시민사회와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개신교의 배타성은 다시 확인되기도 한다. 사실 개신교는 교파 자체가 다양하고 따라서 그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까닭에 그 배타성의 이미지가 한국의 모든 개신교에 해당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설령 과잉 대표되었다 하더라도 주류 한국 개신교가 우리 사회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배타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다른 종교들은 상대적으로 배타성의 혐의를 덜 받고 있거나 포용적인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다른 천주교는 말할 것 없거니와 우리 역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불교는 매우 포용적인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상 때문에 각 종교의 특성은 역사적ㆍ사회적 실체로서 종교의 특성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아예 각 종교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컨대 신앙의 내면적 원리를 강조한 개신교는 처음부터 나 밖의 세계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반면 다양한 교회를 포섭해 온 천주교는 그 자체 안에 포용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거나,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불교는 그 자체로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고 인식된다.

과연 그와 같은 인식이 얼마만큼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까? 배타적이거나 포용적인 특성이 각각의 종교로 대별된다는 견해는 종교에 대한 본질론적 접근방식을 따른 것으로, 그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체이다. 역사적 시공간과 무관하게 본질적 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떤 종교는 당대 사회적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어떤 종교가 지니고 있는 배타성이나 포용성은 항구불변하는 그 종교의 특성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점의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종교의 배타성과 포용성은 역사적 산물일 뿐이지 항구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 특성들은 종교별로 대별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종교의 어떤 경향들로 대별되는 것이다. 동일한 종교라 하더라도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배타적일 수도 있고 포용적일 수도 있다.

개신교의 경우 동일한 개신교인들 사이의 대화보다 타종교인들과의 대화가 훨씬 쉽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외관상 동일한 믿음체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보다 다른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쉽다고 느껴지는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은 외관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믿음체계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성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믿음체계 안에서 배타성이 있는가 하면 포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관상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믿음체계 안에서의 배타적 입장과 포용적 입장이 만날 때보다는 그 종교의 포용적 입장과 다른 종교의 포용적 입장이 만날 때 그 소통이 훨씬 용이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개신교인들 가운데서 동일한 개신교인들 사이에서의 대화보다 타종교와의 대화가 훨씬 쉽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경우이다.

동일한 종교 안에서 배타성과 포용성이 공존한다면, 두 가지 형태 종교의 존재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컨대, 배타적인 개신교와 포용적인 개신교, 배타적인 천주교와 포용적인 천주교, 배타적인 불교와 포용적인 불교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배타성을 띠고, 반대로 어떤 조건에서 포용성을 띠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2. 종교 배타성의 기원


과연 어떤 조건에서 종교는 배타성을 띠게 되는 것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종교의 기원에 관한 논의를 장황하게 펼칠 수는 없지만, 역사적ㆍ사회적 실체로서 종교의 성격을 전제할 때 종교 배타성의 기원을 대략적으로 가늠해볼 수는 있다.

대체로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이 등장하기 이전의 종교는 특별히 문제될 만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종교 그 자체가 특정한 사회적 부문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생활 자체가 곧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그 시대적 조건에서 종교는 특권화되지 않았다. 종교적 임무에 종사하는 사람 역시 다른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겸하는 형태를 취하고 종교만의 고유한 임무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종교가 배타성을 띠게 된 것은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의 등장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계급의 분화는 특정한 계급이 또 다른 계급을 배제하거나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의 성립을 의미한다. 그 관계 안에서 노동의 분업 역시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라 일정한 위계적 서열관계 안에 자리잡게 된다. 종교의 배타성은 대개 이러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종교가 우월한 사회적 계급과 긴밀히 관계를 맺게 될 때 발생한다. 말하자면 종교와 권력이 유착을 하면서 지배와 배제의 논리로서 배타성을 강화해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종교가 권력과 유착하면서 배타성을 강화한다는 점은, 동일한 계급사회 안에서 정반대의 경우를 볼 때 더 분명해진다. 예컨대 초기 기독교의 경우를 보면 그 관계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알다시피 기독교의 등장은 이미 오랜 세월 자리잡은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의 모체가 된 예수의 복음은, 정ㆍ부정의 율법체계로 사실상 지배계급의 지배와 배제의 논리와 동일시되던 유대교와 대립하였다. 예수의 복음은 명백히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고 사랑의 종교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 사랑의 종교로서 초기 기독교는 배타성의 논리와는 상관없다. 혹 그 나름의 열정으로 종교적 배타성을 띠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존의 지배와 배제의 논리와 그 체제를 해체하는 계기로서 의미를 지닐 뿐이다. 배타성의 논리와 그 체제를 ‘배타’하는 성격을 지닌 것일 뿐 자기 존립을 위한 배타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요컨대 지금 우리가 문제시하는 배타성은 명백히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며, 그 배타성은 지배의 권력과 결합할 때 강화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탄생한 많은 종교들이 초기의 포용성을 잃고 어느덧 배타성을 강화해가는 현상은 그런 사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종교의 배타성은 계급사회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띤다. 특정한 종교가 당대 사회의 지배체제와 동일시되는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적 계급관계에서든 종교적 관계에서든 경쟁적 상황으로 바뀔 때 종교의 배타성은 더욱 강화된다.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근대사회에 이르러 종교의 배타성은 이전의 양상과는 또 다르다.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이미 보장된 독점적 지위를 잃게 되었을 때 종교는 권력과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일종의 신사협정으로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는 관계를 맺는다. 외관상 종교와 국가의 분리, 그러나 사실상 더욱 내밀한 종교와 국가의 관계와 역할 분담의 성격을 띤 근대적 종교와 국가 관계는 그렇게 성립하였다. 이 때 종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파트너로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권력친화적인 성격과 논리를 강화하게 된다. 권력의 성격에 따라 그와 신사협정을 맺는 종교의 성격 또한 달라질 수 있고, 따라서 보다 배타적이거나 보다 포용적인 정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는 한에서 권력일 수 있고, 그것은 배제의 논리를 필수적인 속성으로 한다. 그러므로 권력과 유착하는 종교는 필연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자기의 속성으로 체득하게 된다. 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사실상 근대 개신교의 모형을 따르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새삼 주목해야 한다.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세계의 팽창과 함께 개신교는 전 세계로 팽창하여 나갔다. 이른바 선교 모형으로서 개신교는 마치 하나의 표준과 같이 근대적 종교의 모형을 전파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개신교 영향하에서 탄생한 근대 종교학 이론의 효과 차원에서뿐 아니라, 근대 개신교는 그와 접하게 된 다른 종교에도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종교의 척도로 삼고 있는 경전, 인격적인 절대자, 구원, 도덕성의 유무와 같은 기준은 사실상 개신교 모형에서 비롯되고 있다. 근대 이후 세계 여러 종교들은 사실상 그와 같은 척도 안에서 스스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개신교가 급속히 선교적 팽창을 해나가면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 우월성을 점하려고 시도했던 논리에 맞서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종교들 사이의 경쟁 효과를 유발하여 종교적 행동양식의 유사성을 만들어냈다. 그 유사성 안에는 권력과의 관계 맺기 방식까지도 포함되었다. 물론 다른 종교들이 전적으로 개신교의 행동양식을 닮게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개신교의 행동양식이 종교간 경쟁적 관계를 강화시키고 그 가운데서 일정부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3. 한국 종교 배타성의 현상과 문제


근대 이후 종교적 경쟁관계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종교의 행동양식의 문제는 다종교 상황인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 종교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급성장한 데에는 거시적으로는 근대성을 향유하는 방식,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미군정을 통해서였다. 미군정은 한국사회를 통치하는 데 서구적으로 계몽된 지식인을 필요로 하였고,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거의 기독교뿐이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미군정의 고위관료들로 참여하였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친기독교정책으로 기독교인들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미국 원조물자 수급에서 교회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민간창구 역할을 한 덕에 기독교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체제 수호 의지까지 덧붙여져 친미 반공체제하의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무시못할 정도로 확고해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친기독교정책을 표방한 바 없지만, 한국 기독교는 기왕에 확보된 사회적 영향력에 더하여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을 가장 능동적으로 향유함으로써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조찬기도회가 시사하듯이 과도한 반공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기독교는 국가권력과 손쉽게 결탁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더더욱 확장하였다. 이렇게 권력과 결탁한 기독교가 지배체제를 위한 배제의 논리에 동화되거나 그것을 강화하는 내면성을 갖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최근 기독교 보수세력이 정부에 대한 비판의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어 마치 정치권력으로부터 이탈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권으로부터의 소외로 인한 권력에의 향수를 나타내는 것일 뿐 기독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욱더 강력한 권력에의 욕망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이다.

국가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온 점에서 개신교와 천주교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같은 기독교라 하지만 분명히 다른 역사적 경험의 전통을 이어받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 없으나,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동시에 그 권력의 배제 논리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장면 부통령의 등장으로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가 초기와 달리 갈등관계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사태가 친미반공체제를 수호하는 권력과의 갈등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태는 종교와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다른 지배와 배제의 논리와는 다른 종교성을 구현하는 경향을 낳았다는 점에서도 거의 유사하다.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기독교가 발 빠르게 권력과 유착해 그 영향력을 확대해갈 때 불교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불교의 상황에 대해서는 과문한 탓에 단언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자였던 기독교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적극적으로 권력에 다가서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취했다면 불교는 오랜 역사 동안 기왕에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어 새삼 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방대한 재산의 독점권 확보를 위해 종단내 배타적 세력이 국가권력과 은밀한 거래방식을 즐기는 태도를 취해 온 것 같다. 불교 종단내의 고질적인 분규는 그런 사정에서 비롯된다. 이승만정권 시절 종단 내의 분규를 스스로 수습하지 못해 정권의 개입으로 사태가 봉합되고 그 결과 오늘 한국 불교의 주류가 형성된 사실은 그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후에도 불교 내부에서는 물적ㆍ인적 자원의 독점을 둘러싼 분규가 끊이지 않고 그 때마다 국가권력과의 은밀한 거래는 사태 해결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불교 내의 그러한 사정은 불교 자체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사태이며, 불교의 사회적 발언을 제약하는 조건임에 틀림없다.

기독교가 활발한 대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취하는 반면 불교가 그 점에서 은인자중하는 듯해 보이는 것은 종교적 전통과 관련된 현상만이 아니라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회적 현상에 일일이 발언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종종 내놓는 불교 최고 지도자의 심원한 발언은 불교의 도덕적ㆍ영적 무게감을 느끼게도 해 준다. 그 점은 개신교의 ‘값싼 입놀림’과 다른 불교의 이미지를 형성해 주며, 그 점에서 천주교와 불교는 매우 닮았다. 하지만 그 심원한 발언은 때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주류 한국 불교의 무심함을 드러내주기도 하고 서로의 아집으로 내홍을 앓고 있는 불교내의 복잡한 사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 경우 포용력 있고 중후한 불교적 태도는 일종의 자기기만이요 사회에 대한 기만일 수 있다.

한국사회 주요 종교들의 배타성 발현형태는 외관상 꼭 동일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의 배타성은 대체로 ‘노골적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개신교는 타종교에 대해 거침없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고, 사회적 의제들에 대해 시민사회의 공감대와는 다른 이견을 제출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자신의 동일성을 해치는 이질성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제거하는 방법도 수시로 동원한다. 천주교의 배타성은 대단히 ‘권위적이다.’(점잖게 말해 ‘권위적’이지 사실은 ‘음흉하다.’) 스스로 교회의 권위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사람들이 그 권위에 은연중 승복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흔히 천주교의 대사회적 발언이나 활동은 도덕적 지표의 마지노선을 제시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쉽사리 얻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도덕적 지표는 복잡한 사회적 현실에서 진전되어야 할 논의를 차단하는 효과를 지닐 때가 많다. 그런 경우 교회 스스로의 정당성과 권위는 내세울 수 있지만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할 수도 있다. 불교의 배타성은 ‘은폐되어 있다.’ 은폐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은 그 배타성을 쉽사리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종단 내부 파벌과 문중간의 배타적 권력 확보 시도로 분규가 쉽사리 가라안지 않고, 따라서 불교 자체의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스스로 잠식하고 있다.

이렇게 그 배타성의 발현형태는 다르지만, 권력에의 욕망, 더 구체적으로 국가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배타성을 강화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여러 종교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히 분단국가 체제하의 한국사회에서 국가권력과 유착된 종교의 배타성은 더욱 강화되어 왔다. 종교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체제가 지닌 배제와 증오의 논리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 왔다는 것을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한국사회 종교는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에서 오는 불안심리를 위무하는 역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에서 내세우는 자기 정당성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 전형적인 경우를 친미 반공주의 체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 기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기독교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좀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해방직후 이념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종교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분단체제가 확고해진 이후 좌파적 성향의 종교들이 급격히 쇠퇴하고 우파적 성향의 종교들이 성장하게 된 상황은 이를 반증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장은 불교 천주교 개신교 3대 종교의 의례로 치러진다. 이승만정권 시절 군종을 파송할 수 있는 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로 제한되었는데, 이후 불교가 추가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원불교가 그 자격을 얻었다. 이제 머지않아 국장에도 원불교 의례가 추가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종교들이 국가권력의 승인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여타의 종교들을 배제하는 상황을 쉽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4. 종교 배타성을 넘어  


모든 종교들이 사실상 배타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쉽사리 인식되지 않은 사연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배타적 종교성의 발현형태가 대체로 노골적인 권력투쟁 양상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권력에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태가 아니라 고상한 종교적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천당과 지옥, 구원과 심판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불안심리와 보상심리를 동시에 자극하는 극단적인 종교 배타성을 개신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다른 많은 경우 그 배타성은 그처럼 원색적인 형태를 띠기보다는 세련된 형태를 띠고 있다.

종교의 언어는 의미의 세계로서, 배타성의 종교적 표현은 빈틈없는 의미의 세계와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것도 거의 예외 없이 모든 것을 해명해주는 의미의 체계이다. 그 체계는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담배를 피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빈치코드>를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명쾌한 답을 주는 체계이다.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시콜콜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답을 줄 수 있는 의미의 체계임을 자임하고 행세하는 데서 종교의 배타성은 ‘종교적으로’ 완성된다. 적나라한 권력의 야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독점한 듯한 고고한 자세로 종교는 그 배타성을 관철해나간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안에서 자신의 체험이 단지 하나의 체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해버리고 오직 유일한 체험이라고 내세우는 방식이다. 종교 배타성은 그렇게 진리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내면의식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우리는 앞에서 그와 같은 종교의 배타성이 갈등관계 안에 있는 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유일한 선택으로서 종교 배타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관계 안에 있기에 보편을 참칭하는 세력과 그에 편승에 종교 분파가 독점권을 행사하기 위해 배타성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갈등하는 그 조건은 동시에 전혀 다른 종교성을 배태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역시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사실은 오늘날 중요 종교들의 탄생 자체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된다. 가깝게는 우리사회 안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물질과 권력을 독점한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종교의 전통이 존재해왔고, 그에 따라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성과는 전혀 다른 종교성 또한 존재한다. 그 종교성의 특징을 배타성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포용성이라 단정지을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배타성에 저항하는 종교성은 적어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배제와 증오의 논리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의 과제는 배제와 증오의 논리를 기반으로 강화시켜온 종교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와 다른 종교성을 구현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과제는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 선례와 당대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종교성의 실제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배와 독점의 욕망을 거부하고 섬김과 사랑의 영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배와 독점의 욕망으로 짜여진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사회적 운동들과 연대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배타적 지배체제 밖에 있는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종교 운동들과 교류하고 연대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 이 때 우리의 종교성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진리를 스스로 독점한 듯한 내면의식을 뛰어넘어 언제나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진리를 향한 물음을 그치지 않는 겸허한 내면의식과 함께 할 것이다.*




<주요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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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신문> 보도기사***
"종교 달라도 배타적 태도 닮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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