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유쾌한 초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6-27 12:01
조회
3044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42번째 원고입니다(060627).


유쾌한 초대


안타깝게도 한국팀의 16강 탈락으로 그 열기가 이내 식고 말았지만, 첫 경기 두 번째 경기가 이어질 때까지만 해도 다들 2002년 월드컵 신화가 재현되기를 바라는 열기로 가득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와의 한국팀 첫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경기가 열리기 한 시간 전 쯤, 그러니까 밤 아홉시 경 걸려온 전화를 받던 집사람이 큰 소리로 웃는다. 축구경기를 같이 보자는 한 교우 가정으로부터 전화란다. 어찌 해야 할지를 묻는다. 사실 그 때 나는 저 먼 남쪽 지방에 다녀와 몸도 피곤했고, 게다가 원고도 밀려 있었다. 그 시간에도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경기 시간 전까지는 원고를 기필코 마무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경기를 즐길 참이었다. 그 와중에 받은 뜻밖의 초대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더 일찍 서둘러 원고를 마감하고 초대에 응했다.

정말 유쾌하지 않은가? 그 밤중에 목사를 불러내 축구경기 같이 보자고 하다니! 나를 불러낸 그 교우는 만화를 그리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산도야지’ 고 화백이었다. 그의 작품집 제목이 <방자한 명상>이다. 그 제목처럼 어쩌면 방자하기 그지없는 초대일 수도 있었다. 서울시청앞 광장으로 나설거나, 그것도 아니면 천안터미널 야우리 앞마당으로 나설거나 고심을 했단다. 점잖은 선생님 체면 탓인지 차마 광장에 나서지는 못하고 집에서 보자니 그 썰렁함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불러낸 게 목사 가정이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들어서자 부부는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환영한다. 널따란 거실에는 목을 축일 음료와 주전부리꺼리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두 꼬맹이 녀석들도 잠드는 듯싶었다는데, 내가 나타나자 열광을 한다. ‘예수님’이 오셨다느니 ‘교회아저씨’가 오셨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목사님’이라는 어려운 말이 익숙치않은 그 녀석들은 평소에 나를 그렇게 부른다. 한 동안 이 녀석들과 놀아주느라 전반전 경기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또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전반전 경기에 몰두했더라면 1: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 속 쓰린 가슴을 쓸어안아야 했을 테니까. 녀석들이 지쳐 떨어지고 나서야 후반의 역전 드라마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날 밤 두 가족은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축구경기를 즐겼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그 댁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축구에 열광하던 날과는 달리 이성을 회복했는지(?) 그 때는 송구했단다. 그렇게 목사를 불러내서. 천만의 말씀! 다들 목사를 닮은 탓인지 점잖게 예의 격식을 차리기에 익숙한 교우들 틈바구니에서 목사를 친구 삼아 그렇게 방자하게 불러낼 수 있다니 얼마나 신선한가. ‘그 날 초대는 정말 유쾌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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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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