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민주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묻는 공(公)의 의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7-12 10:40
조회
3278
안병무 다시 읽기 / 공(公)의 역사적 지평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민주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묻는 공(公)의 의미



1. 신학적 언어의 공전(空轉)을 넘어서


안병무는 “민중신학은 어떤 주의(ism)를 가진 것도 아니요 어떤 주의도 아니”라며 “민중도 민중중심으로 세계를 바꾸어보려는 구체적인 설계도를 가지면 민중주의에 떨어지게 될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대안을 제시하려는 태도에 대해 경계하는 입장은 1세대 민중신학에서 공통된 경향이지만, 안병무에게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와 같은 태도는 민중신학이 출발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의 민중신학자들의 경험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출발 당시 민중신학은 전통적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이자 동시에 1970년대 한국상황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민중신학은 신학적 체계라는 면에서나 역사적 상황이라는 면에서 동시에 ‘반(反)신학’이었다. 안병무는 ‘체제에서의 해방’을 누차 강조하였다. 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일차적 임무는 당시의 유신독재 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해 결과적으로 그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전통적 신학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비판을 통해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은 확실히 이데올로기 비판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가 1980년대의 상황에서도 지속되어 대안적인 체제를 모색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내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민중신학이 섣부른 대안적 체제의 모색에 대해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해서, 그에 관한 논의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중신학이 민중현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기본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한 민중의 의지와 희망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이 민중현실을 증언한다는 것은, 고난받는 민중의 삶 자체만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것까지도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는 “민중의 욕구와 희망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식인의 언어”로 바꾸어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중주의’의 위험성을 말한 안병무의 동요일까? 언뜻 보기에는 모순되어 보이는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요구와 갈망을 진지하게 읽고자 한 안병무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병무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갈망”이 곧 “하느님 나라 사상”이라고까지 하였다. 그것은 민중들의 갈망이 개인적 욕구를 넘어선 차원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 새로운 차원, 곧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민중들의 갈망 하나 하나를 양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이 아니다. 민중들의 갈망이 실현되어 전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민중들의 갈망을 하나로 묶어내는 언어, 그것이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물론 그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인 이념이나 체제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이며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즉자적 갈망과 궁극적 대안인 하느님 나라를 매개하는 언어가 필요하게 된다. 바로 그 언어를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대안적인 체제라 보아도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어떤 ‘주의(ism)’나 ‘이념’에 대한 주장을 경계하는 민중신학의 논리는 대안 모색의 원천 불가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위험성을 지적한 셈이다. 첫째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기존 체제나 이념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며, 둘째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는 민중에 근거하지 않는 체제나 이념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민중의 눈으로 세계와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가 이미 민중적 당파성에 입각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민중현장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고유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민중의 삶으로부터 요구되는 대안의 모색은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안병무 신학 또는 민중신학에서 어울리지 않는 외재적 요소가 아니라 그 내적 논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실제로 민중신학은 이 문제를 백안시 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본격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을 뿐이다. 사실 1980년대 제2세대 민중신학이 대안적인 사회의 모색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한 것은 새삼스러운 과제였다기보다는 민중신학의 내적 논리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안병무는 민중현실에 다가서기 위한 신학적 언어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그것은 민중현실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한 신학적 인식론의 모색과정이었다. 민중신학의 또 다른 정초자 서남동이 기독교 민중전통과 한국 민중전통의 합류를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은유로 해명하며 사회경제사적 내지는 문학사회학적 해석을 제안할 때, 안병무는 그와 다른 수사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다르지 않은 신학적 인식의 전환을 역설했다. 예수의 민중운동과 현실의 민중운동을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학적 언어의 공전을 뛰어넘어서기 위하여 “물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역설한다.


“한국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 형성과 관계하여 중요하게 관심해야 할 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物, Materie)과 계급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공유와 정의로운 분배를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알아야 한다. 이 사랑의 행동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한국역사 속에서 그 정체를 형성할 수 없다. ... 둘째, 지금까지 금기가 되어온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안병무는 신학적 언어들이 공전(空轉) 하는 것은 물질적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여기에서 초점은, 신학이 당대의 물질적 현실과 그에 의해 규정받고 있는 인간의 사회적 제관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 전통적 언어에 매달려 있게 될 때 그것은 천상의 독백이요, 공념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구체적인 물질적 세계 속에서 이러저러하게 관계 맺고 있는 인간들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로서 안병무에게서 그와 같은 과제는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2. 어디에서 벗어날 것인가?


안병무는 바람직한 민족사의 발전을 위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모색하는 대목에서, 한국교회가 “분단구조”, “독재체제”, “자본주의 체제”에 유착하여 오히려 그러한 부패한 체제유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바로 이러한 체제가 당대 우리 사회에서 극복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임을 시사한 바 있다. 또한 일본과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민족자결의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당대의 과제임을 분명하게 역설하였다.

분단구조, 독재체제, 자본주의 체제, 외세의 지배구조로부터 벗어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안병무를 비롯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일지 이름을 붙이는 데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남동이 굳이 ‘참여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정도다. 1970년대 그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것과는 달리 1980년대에는 대안적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민중운동 진영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1980년대 대안적 사회 모색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어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념적 지형상 공공연하게 표방되기 어려웠고, 통일전선의 맥락에서 민중 민주주의로 표방되었다. 그 기본 요건은 흔히 자주ㆍ민주ㆍ통일의 3대 과제로 집약되었다. 이것은 사실 안병무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함께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 것과 다르지 않다. 당대 민중신학자들은 그 이름을 붙이는 데 주저하였을 뿐 당시 민중운동의 시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민중신학은 어째서 그 이름을 붙이는 데 주저하였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권의 이념공세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고려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용공시비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으로, 민중신학은 그 적대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용공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민중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이념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이유는 민중신학이 그 언어를 선택하는 데 매우 신중히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형성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정치적 이념이나 체제 선택의 위험성을 일관되게 의식해온 민중신학의 고유한 성격 때문이었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이 민중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것이 신학으로서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체제나 이념을 섣불리 정당화할 수 없는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안병무 신학은 그 점에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건이 민중현실을 규정짓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판단과 대안의 모색 그 자체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민중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신학적 언어의 종말론적 성격을 의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신학적 언어의 공전을 뛰어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안병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퇴조하는 1990년대 초반에 오히려 그 체제의 긍정성을 비교적 분명하게 말했다. 안병무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즈음의 스스로의 경험 탓인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해 말을 아끼며 미묘한 태도를 취해 왔다. 그 태도는 스스로 ‘크리스챤 마르크스주의자’라 칭하며 사회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온 서남동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격랑의 1980년대 민중운동을 경험한 탓일까? 아니면 거꾸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는 현실에서 발언하기가 용이해진 탓일까? 안병무는 역사적 대안의 실험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안병무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이전에 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분명히 밝힌 적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견해는 마치 현실 사회주의가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미리 진단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 계급과 대립시켜 전자의 편에 선 것은 예수의 입장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입장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며, 치명적인 차이로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계급성이 추상적 보편 개념이 되므로 그같은 개념 형성의 한 분자가 되었으면서 실은 그런 집단개념 아래 역사적 존재의 인권이 무시되고 비인간화되는 것이며, 둘째는 위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정치조직화하고 이른바 독재체제화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한 개개인들이 자기 운명을 자기들의 이름으로 도용한 소수로 구성된 통치자에게 바쳐버림으로써 철저한 피통치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편에 선 것은 예수의 입장과 상반되지 않는다고 보았듯이 사회주의적 실험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안병무는 사회주의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사회주의적 실험의 적극적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1980년대 중반 “물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말했지만, 그 이전에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의 화해”를 말했으며, “공산권에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때 대화가 가능하다고 밝혀 왔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가 닥친 시점에서는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의 성과를 인정한다.


“ ... 이남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고 이북은 형태야 어떻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 왔는데, 이북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받아 이제까지의 노선을 수정한다고 선언한다 해도, 저는 맑스주의가 불러일으켰고 레닌에 의해 실천된 사회주의의 기본정신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또 죽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주의의 기본정신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역사 속에서 작용을 하리라고 생각해요.”


안병무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고 또한 나름대로 실현한 점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그 실현과정에서 수반되었던 오류들, 특히 이율배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내세운다는 기치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주체성을 억압한 독점적 권력지배 현상을 문제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3. 무엇을 향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 현실 사회주의마저 문제를 지니고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안병무가 ‘공’(‘公’)을 말한 것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신학에서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공’ 사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독점적 지배체제에 대항해 싸우는 민중들의 염원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집약한 데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공’ 사상은 성서의 민중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안병무는 성서의 핵을 이루고 있는 ‘하느님의 주권‘ 사상의 전개과정, 특히 예수운동에서 체현된 ‘하느님의 주권’에서 ‘공’ 사상의 결정적 근거가 있음을 제시한다. ‘공’ 사상이 한국사회 현실에서 지배체제와 맞서 싸우는 민중의 실천에 의해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기독교적 뿌리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주권’ 신앙에 닿아 있다는 통찰 및 설명방식은 이른바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성서가 오늘 현실에서의 전략전술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의 전거에 의해서 신학적 공헌을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는 입장과도 부합한다.

그러면 ‘공’ 사상의 요체는 무엇일까? 먼저 안병무는,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 25,23).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상은 구약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참조. 출애 9,29; 19,5; 신명 10,14; 시편 50,10-12; 24,1-2; 역상 29,11-12).


“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도 땅에 대한 영구한 사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사람은 식객처럼 나에게 허락된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날까지 경작할 뿐이다. ‘하느님의 것’이라는 주장을 사회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땅에 대한 공(公) 개념이다. 아무도 사유할 수 없는 것, 모두를 위한 것이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소속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주라고 믿는 한, 이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것’(公)은 땅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物’이 다 하느님의 것이다.”


“物은 인간의 노동과 더불어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을 생산하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다. 物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현하며 인간은 物로써 자기를 구현한다.”


이것이 세계(物)를 창조하고 다음에 그 동반자로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의 참 뜻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연(物)을 계발할 임무를 지니며, 또한 그것을 사유화 할 수 없다. “물은 결코 독점하라는 것이 아니다.”


땅을 포함한 物, 혹은 땅으로 대표되는 物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은 권력 또한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땅은 하느님의 것(公)인데 그 소유(사유)권 쟁탈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고 그로 인해 불의가 자행되며, 사실상의 주인인 현주민은 가혹한 착취의 대상이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린당했다. 땅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은 바로 권력싸움이었다.”


이것은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언급한 것이지만, 이러한 양상, 곧 권력 싸움이 땅(物)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비단 그 시대만의 양상은 아니다.  안병무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고해 주는 것”이 “국가 권력의 존재이유”가 되어버렸고, 나아가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권력 역시 하느님에게만 속했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전제이다. 즉 “권력도 ‘공’이지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요컨대, 공(公)은 민중의 삶을 보장하는 경제적 제도로서의 공유제(公有制)로, 또한 권력을 공유화하는 정치제도로 구체화될 수 있다. 물론 경제적ㆍ정치적 제도로서 공유제는 그 개념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요건이 어떤 것인지 더 충분히 탐색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독점을 배제하는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성에 접근해 있다. 이 점에서 ‘공’은 ‘하느님 나라’의 구체화이자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민중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의 내적 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 것이라 하겠다.



4. 민주주의의 위기와 공(公)의 의미


1970-80년대 한국 민중운동은 물질과 권력을 독점한 군사정권과 대결하였다. 그 저항의 결과 이른바 ‘1987년 체제’라 일컬어지는 진전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1980년대 민중운동의 강렬한 민주주의 열망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하고 더딘 민주화의 과정이었지만, 1987년 체제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과연 안정궤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절차적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볼 것 같으면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이 결코 실질적 민주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1987년 체제 그 자체를 보면서 더욱 확연하게 확인하고 있다. 순전히 제도적 차원에서 볼 것 같으면 민의의 정확한 수렴을 위한 절차를 더 완벽을 기해야 할 필요성을 확인한다. 예컨대 실제 지지율과 다른 대표권, 국민의 직접적 대표권보다 우위에 서는 사법권의 전횡 등은 절차적 민주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절차적 민주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실질적 민주화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민정부의 등장, 그리고 비로소 사실상 정권교체에 해당하는 국민의 정부 등장, 이어 1987년 민주화항쟁의 한 주역이 청와대에 진입한 참여정부의 등장은 민주화의 진전임에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그만큼 기대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국민의 정부와 연이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반을 심각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IMF 위기와 더불어 등장한 국민의 정부는 경제적 성장의 활로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가속화하였고, 그 기조는 참여정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다. 경제와 사회의 공공성은 위축되었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삶의 질을 개선할 정책에 대한 이들의 참여 여지는 사실상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실질적 민주주의 기반의 와해는 허약한 정부의 개혁정책 실패라기보다는 자본의 효율성과 경제 규모의 성장에만 매달린 의도적 경제정책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그대로 답습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욱 강화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사실상 자본의 권력이 전 사회를 장악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간 이룬 정치적 민주화는 자본의 독점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사회적 공공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권력에 밀려 형해화되고 있는 지경이다. 민주화 시대라 불리는 오늘 우리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공’(公)의 의미를 새삼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다시 환기하는 것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일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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