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하나만 살짝 내려놓아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8-01 12:33
조회
3257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44번째 원고입니다(060801).


하나만 살짝 내려놓아도


서울 지하철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치 카메라에 한 장면이 포착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멀끔하게 정장을 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30대쯤 되었을까? 넥타이를 맨 양복정장의 이 사람은 한 손에는 검은 색의 깔끔한 서류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잠시의 여유를 즐기려는 듯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커피 잔을 들었다. 거기까지였으면 새삼스럽게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막 걸려온 핸드폰을 받아야만 했다. 한 손에 가방, 한 손에 커피 잔이 들려 있는데 핸드폰을 어떻게 받아야 했을까? 머리를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이고 한쪽 어깨를 치켜 올려 그 사이에 핸드폰을 끼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그 사람은 분명히 직장의 업무차 나서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여러 생각이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손으로 들어야만 하는 서류가방이 아니라 등에 매는 쌕이었다면 두 손이 자유로울 텐데... 정장에 쌕은 안 어울리나? 뭐 안 될 것 있나? 정 안 어울린다면 좀더 캐주얼한 복장을 하면 될 텐데... 그건 근무 복장으로 안 어울리나? 왜 안 어울리지? 그건 그렇고 커피는 식사 끝내고 여유롭게 마시지 어째 차를 기다려야 하는 그 짧은 시간에 마셔야 했을까? 뭐가 그리 바쁠까? 왜 하필 핸드폰은 그 순간에 울린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가방을 중간중간에 자리한 의자에 잠시 내려놓고 편안하게 받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나 보다. 뭐가 저 사람을 저리도 다그칠까? 이런 생각들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사실 예외적이거나 특이한 장면이 아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주인공은 지극히 정상적인 도시민의 한 사람이고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바삐 움직여야만 이 사회가 보장하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삐 움직일 수 있는 기회마저 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정말 한 없이 부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소리 없이 탄식을 자아내야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규격화된 질서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융통성 없는 복장, 일촌광음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주함, 매 순간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아야만 하는 빡빡한 삶의 관계를 그 한 장면에서 한꺼번에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 개인의 속마음이나 삶의 정황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의 이미지는 그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 하지만, 어느 것도 여유롭게 즐길 수 없는 삶으로 우리는 또 얼마나 분주해야 할까? 단 하나만 살짝 내려놓아도 삶은 훨씬 여유로울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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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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