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미 FTA에 대한 교회 시각의 분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8-17 21:00
조회
3630
교계 한미FTA 대응 긴급토론회

2006년 8월 17일(목) 오후 2~5시

예장여전도회관 8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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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한 <교계 한미FTA 대응 긴급 토론회>에 60여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참여해 한미FTA문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 이정훈



한미 FTA에 대한 교회 시각의 분석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한미 FTA에 대한 교회의 시각


한미 FTA에 관한 최근 여론의 추이를 보면 다소 놀랍다. 한미 FTA가 우리 사회의 현안이 된 초기만 하더라도 경제적 개방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는 대세 가운데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 체결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였다. 지난 6월 7일 미디어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반대가 29.2%에 불과했다. 그러나 7월 6일 코리아리서치 조사결과에서는 반대가 42.6%로 증가했고, 최근 <서울경제>신문의 여론조사결과에서는 찬성이 46.3%인데 반해 반대가 50.0%로 우세하게 나타났다. 두 달 어간에 여론이 역전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그간 <한미FTA저지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 운동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미FTA저지국민운동본부>가 기민하게 펴낸 방대한 분량의 『한미FTA 국민보고서』가 사회과학서적으로는 드물게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이를 두고 색깔 시비를 건 사실은 그 운동의 성과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정부가 국민적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거액의 홍보비용을 들여가며 일방적으로 한미 FTA 체결의 타당성을 선전해왔지만, 그 문제점이 다각도로 알려지면서 여론의 향배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간 교회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교회의 초기 대응은 그다지 기민하지 못했다. 그 득과 실을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경제적 차원의 사안으로 인식한 탓이었을까? 교회는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그리고 구체적 계기로서 IMF 위기 이후의 사회적 징후들을 통해 상당부분 예측할 수 있는 문제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교회는 그 판단을 머뭇거리고 있다. 판단근거의 빈약이 그 탓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혹시라도 또 다른 이유, 곧 정부와 한미 FTA 지지자들이 곧잘 이야기하는 경제의 선진화 논리에 교회가 은연중 동화되어 있는 탓이라면 차제에 한미 FTA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부터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한미 FTA에 대한 교회의 시각’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미 FTA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미 FTA가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교회의 시각과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교회로서는 그 파급효과가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물론 교회 자체가 동일한 이해관계 집단이 아니기에 그 영향을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한미 FTA와 도시농어촌선교 토론회에서 정혁현 목사가 주장하였듯이 “정치경제적 변동의 효과는 종교적 부문에 중층결정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그 영향을 쉽사리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정혁현, “한미 FTA가 교회에 미칠 영향”, <한미 FTA와 도시농어촌 선교 토론회> 2006. 7. 11. 발제문 참조).

하지만 거시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방화의 효과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폐해를 통해서도 판단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농촌교회의 해체가 급속히 진전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이세우, “한미 FTA와 농촌선교의 과제”, <한미 FTA와 도시농어촌 선교 토론회> 2006. 7. 11. 발제문 참조). 이미 농촌교회 교인의 평균연령이 60대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수 농촌교회가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해 준다. 그것은 마치 농촌의 초등학교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교회들의 사정은 어찌 될까? 사회적 격동이나 불안이 증대되는 시기에는 종교인구가 증가한다. 그 상식을 전제로 하고, 동시에 한미 FTA가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 전제한다면 도시교회의 교인은 증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로서는 한미 FTA의 수혜를 누리는 셈이 될까? 만일 그런 식으로 교회가 수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경제 선진화 논리에 의탁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러나 만일 경제 선진화 논리 그대로 한미 FTA 체결 결과 우리 사회가 보다 발전하고 안정되면 교회는 어찌 될까? 아마도 발전한 서구 사회의 교회 양상을 띠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예측될 경우 교회는 한미 FTA를 반겨야 할까 말아야 할까?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경제적 사회변동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수동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시각의 한계를 말해준다. 사회변동에 따른 교회의 존재방식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수동적 대응관계 안에서 스스로의 존립 여부만을 따지는 것은 사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교회의 본질적 측면을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그 태도를 넘어 교회가 사회 안에서 담당할 수 있는 적극적 역할을 모색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운 태도이다. 이 점에서 ‘한미 FTA에 대한 교회의 시각’은 한미 FTA가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 때 교회는 무엇보다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태도를 가장 소중히 해야 한다. 설령 한미 FTA가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더라도, 동시에 그로 인한 폐해가 뻔히 예측되는 상황이라면 교회는 그 폐해를 극복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나서야 한다. 고통이 벌어지고 있는 그 자리에 서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 더욱이 한미 FTA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두말할 나위 없다.          



2. 사회 전반의 위기요인으로서 한미 FTA


비단 ‘제2의 한일합방’이라는 수사가 아니더라도 최근 몇 달간 우리 사회에서는 다각도로 한미 FTA의 위기적 성격을 밝혀내는 연구와 의견들이 활발히 개진되었다. 여기서는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칠 심대한 위기적 요소로서 한미 FTA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교회적 시각의 의미를 살려보려고 한다.


1) 낙관할 수 없는 경제적 효과

엊그제 8.15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와 관련하여 “개방은 우리의 생존전략이자 기회”라며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일본을 넘어설 새로운 성공모델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미국시장에서, 특히 서비스 산업에서 미국과 경쟁하며 성공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에 관한 정부의 입장을 집약하고 있는 발언이다. 개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가간 경쟁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선진 경제권인 미국경제에 접목을 하겠다는 것이며, 서비스 산업을 경쟁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주력산업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시피 농업은 이미 경쟁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지경이고, 제조업 분야에서는 IT와 전자, 그리고 자동차 등이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비스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겠다는 의지의 천명은 제조업 분야에서의 일부 업종의 경쟁력이 그다지 신통치 않다는 것을 은연중 시사한다. 교육, 의료 및 공공영역 등을 포괄하는 서비스 산업은 미국의 절반 수준의 경쟁력밖에는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서비스 산업을 최상의 경쟁우위 분야로 만들겠다는 것은 제조업 분야에서의 자원의 제한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 잠재적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미 FTA를 통한 경제적 성공 시도 자체가 매우 불투명한 모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의 경제에 접목하여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에 앞서는 성공을 거두려고 하지만, 그 성공에 앞서 이미 절반의 실패를 안을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조건은 한미 FTA의 성격의 분명한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각 산업분야별 손익 대차대조는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많은 진단이 나오고 있는 상태이다. 여러 수준의 FTA가 있지만, 현재 추진중인 미국형 FTA 조건하에서 한국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거칠게 말해 경제적 총량규모에서 득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이득은 소수의 자본에 집중되는 것일 뿐 국가경제 전반에 고르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극소수의 분야를 제외하고는 경쟁력 없는 대다수 여타 분야는 파탄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제수준을 감안하지 않고 선진경제에 접목함으로써 경제적 성공을 거두겠다는 발상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2)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위기

한미 FTA가 경제협정이면서 동시에 군사안보적 협정이라는 사실은 한미 양국이 공히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분명하다. 애초 한국 정부가 FTA 체결 우선순위 국가로 중국을 지정했다가 미국으로 급선회한 것은 군사안보적 협정으로서 한미 FTA의 성격이 부각된 탓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군사안보적으로 대중국 견제의 안정적인 전초로 삼고, 경제적으로 대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것이다. 미국 역시 처음에는 한국과의 FTA 체결을 서두르지 않다가 최근에 서두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미 FTA는 단순히 경제적 협정이 아니라 한미간의 군사적 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한미 FTA 문제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과 맞물린 평택 대추리 기지 이전 문제가 우연히 동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맥락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한미간의 동맹관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며, 이와 동시에 한ㆍ미ㆍ일 공조체제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소외될 때 중국은 독자적 행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체제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개성공단을 인정받으려는 것이 한미 FTA를 서두르는 하나의 이유로 추측되고 있지만, 한미 관계가 군사적으로 밀착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경제적 통합의 성격이 더욱 강화될 때 북한 역시 압박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불안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애초 말했던 동북아시아 균형자로서 한국의 역할은 이런 조건에서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동아시아의 긴장은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 한미 FTA는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평화운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3)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위기

한미 FTA의 가장 심각한 위협 요소는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 위기는 안팎에서 동시에 다가온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는 최소한의 국민동의 절차마저 지키지 않고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홍보만 하고 있을 뿐, 그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국민적 의사수렴 절차를 일체 거치지 않고 있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의회에마저 그 절차는 생략되었다. 이미 현재까지 진행된 이 과정 자체만으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참여정부에서 국민의 사활이 달린 사안에 대한 국민의 참여는 배제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87년체제의 파산선고에 다름없다.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결과로 성립한 87년 체제는 한편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보여주었지만, 그 체제의 전개과정은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주기도 했다. 1987년 체제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방 정책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87년체제 주역의 실질적 부상으로 그 체제의 완성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 정점에서 스스로 파산선고를 내린 격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 국익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마저도 생략해버리고 있다. 그것은 폭력적 강제와는 다를지 몰라도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 논리와 전혀 다름없는 사태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미 FTA 체결로 다가올 후폭풍에 비하면 차라리 짤막한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FTA 체결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압력도 문제려니와 체결이 되고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을 때 정부의 역할은 사실상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국민적 동의와 상관없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현재 정부의 역할 역시 소수의 재벌 및 그와 밀착된 관료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FTA 체결 이후에는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과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에 저해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정부는 수시로 초국적 자본으로부터 제소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경우 공공성을 지닌 정부의 역할은 극도로 위축되고, 정부의 선택에 관한 국민적 권리는 별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사태이지만, 그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실로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스스로 경제개혁에 실패한 한국 정부는 입버릇처럼 외부 충격을 통한 구조조정과 경쟁력 강화를 외친다.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구조조정이 우리 사회에 어떤 폐해를 가져왔는지는 IMF 위기를 통해 익히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그 충격으로 국민들이 겪는 폐해는 중요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부, 그것은 자본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이룬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은 결코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국민 스스로 이룬 것임을 우리는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제의 선진화가 정말 절실한 것이라면 그 역시 스스로의 구상과 당당한 주권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해가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양극화와 삶의 위기

한국 정부는 한미 FTA로 경제 선진화와 동시에 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다. 경제 선진화로 얻은 재원으로 부의 불균등을 해소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이 망상에 가깝다는 것은 이미 여러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IMF 위기 이후 무방비 상태의 급속한 경제 개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개방하면 해결책이 모색될 수 있다는 발상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 한미 FTA 체결로 한국 경제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소수의 경쟁력 있는 분야에서의 성공을 의미할 뿐이다. 특정 소수의 자본에 그 이익이 집중될 뿐 국민적 경제 전반에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자본의 대리인으로서 이미 공공성을 상실한 정부는 사실상 부의 집중을 막을 수 있는 방편도, 집중된 부를 나눌 수 있는 수단도 전혀 가질 수 없다. 혹시라도 그러한 시도를 할라치면 곧바로 불공정 혐의로 제소를 당할 것이다. 그러니 경제 선진화와 양극화 해소는 허울뿐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자본에 이익이 집중될 때 나타날 양극화 현상은 다양한 양태로 표출된다. 기업 및 산업의 양극화, 고용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 교육 및 건강의 양극화 등등이다. 이러한 양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 자체의 양극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가진 것을 향유하며 시혜를 베푸는 소수의 유능한 인간과 구차하게 시혜를 요청하며 연명해가는 다수의 무능한 인간으로 나눠지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인간 삶의 관계성과 연대성은 무색해진다. 동시에 인간 자체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자본의 전능성만이 위력을 떨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예견이 극단의 상상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를 예견할 수 있을 때 그나마 차선의 대안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견은  ‘잃은 양 한 마리’라도 끝까지 찾아내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교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3. 한국교회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한미 FTA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긴급하게 토론회를 연 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반길 만한 일이다. 이처럼 공동으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 다소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결코 늦지는 않았다. 한미 FTA는 이미 종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진행중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요즘 흔히 한미 FTA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면 개방을 반대하는 쇄국론자로 매도를 당한다. 찬성은 곧 개방이요 반대는 곧 쇄국이라는 구도 안에서 모든 논의를 판단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는 그와 같은 구도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이 곧 개방을 반대하는 것이고 따라서 쇄국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개방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 FTA에는 여러 수준의 여러 형태가 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이의제기를 하는 것은 모든 산업 분야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미국형 FTA에 대한 것이다. 사실상 우월한 자본의 독점을 보장하여 국민경제 전반을 파탄내고 사회적 공공성을 위축시키는 한편 여타의 폐해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한미 FTA의 파급효과를 염려하는 것이다. 만일 현재로서 그 길밖에 없다면,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 불가피한 개방의 추세 속에서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그 대안을 찾고 제안하는 것이 또 다른 대안이 될 것이다. 이 때 대안을 모색하는 원칙은 그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이 한미 FTA의 문제를 지적하는 국민적 운동과 연대해 교회가 담당해야 할 당면한 현실적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와 같은 과제 수행과정에는 여러 가지 다른 노력 또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그 문제점에 대해 공유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한미 FTA는 추상적인 이념 논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매우 구체적인 문제이다. 그 점에서 그 문제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및 교회적 공감대의 확산은 절실히 필요하다. 그 공감대를 기반으로 협정체결 과정 자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또 한편 교회는 국제적 연대를 시도할 수 있다. 예컨대 지난 해 캐나다연합교회는 ‘제국’ 현상을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고 세계 각국의 협력교회들에 자신의 국가에서 경험하는 ‘제국’에 관한 설문을 보내는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에도 그 설문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와 같은 시도는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교회의 역할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매우 중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이미 미국과 FTA를 체결한 캐나다의 경험과 사례를 물음으로써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협력교회들이 속해 있는 나라의 경험과 사례에서 지혜를 얻고 연대하는 시도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한미 FTA에 관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끼칠 폐해를 염려하는 다소 진보적인 견해에서부터 한국 내에서의 강력한 국민적 저항으로 한미동맹에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는 보수적 견해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유념하여 한국 교회가 미국 교회와 공동의 입장을 천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타진해봄직하다. 이 모든 시도들은 지금 당면한 과제에 대처해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아직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근본적으로 이의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 곧 맘몬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은 우리가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근본적인 과제이다. 교회가 그 근본적인 과제를 포기하지 않을 때 또 다른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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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묵 목사는 “교회는 한국 사회가 아직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근본적으로 이의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 이정훈

에큐메니안 기사: "교계 한미FTA 대응 긴급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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