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서구적 편견을 넘어 이슬람 다시 보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4-05 22:21
조회
3203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6년도 상반기 강좌

이슬람과 기독교, 충돌과 공존의 역사

제1강 / 2006년 4월 4일(화) 오후 7:30  


서구적 편견을 넘어 이슬람 다시 보기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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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일한 이슬람의 이미지, 과연 정당한가?


덴마크의 한 신문에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풍자하는 만평이 실린 후 이슬람권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 사태를 두고 서구 언론은 '언론자유' 대 '신성모독'이라는 대립구도로 설명을 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서구사회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반면 종교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이슬람 사회는 그 풍자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발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대립구도의 설정이 과연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풍자한 것 자체가 이슬람 또는 무슬림에 대한 서구적 편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언론자유 대 신성모독이라는 대립구도 역시 서구적 편견을 재연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와 같은 대립구도는 계몽된 자율적 서구 사회와 계몽되지 않은 타율적 이슬람 사회, 다양성을 지닌 서구 사회와 획일성이 지배하는 이슬람 사회라는 서구적 편견의 재판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편견은 너무나도 초보적인 상식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다. 그 초보적 상식이란 무슬림도 인간이라는 사실, 이슬람 역시 역사적 종교라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그 사회적 관계 안에서 웃고 울며 살아간다. 그 복잡한 사회 관계 안에서 여러 동기를 따라 움직이며 살아간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종교적 신앙의 동기가 삶에서 중요한 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가 그것을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간은 여러 동기를 따라 희비애락을 맛본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다른 세계와 차단된 채 단일한 색조의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성을 지니겠는가? 종교적 신앙의 동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종교적 신앙 자체가 단일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 함께 하는 가운데,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며 그만큼 다양한 색조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교파와 신앙의 색조가 얼마나 다양한가? 그런데도 오로지 이슬람만이 천년 이상을 단일한 색조를 지닌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과연 가당하겠는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해 단일한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서구적 편견은 그 사실을 망각한 데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2. 이슬람에 관한 통속적 편견들, 얼마나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이슬람과 무슬림 사회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유포시켜 왔다.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가 문제시되었을 때도,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도, 그리고 최근의 만평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덕분에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슬람과 무슬림 사회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이 대개 알고 있는 이슬람 및 무슬림에 대한 상식 아닌 상식을 예로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이슬람은 아랍인들의 종교이고 중동에만 있다. 이슬람은 전쟁과 테러를 조장하는 종교이다. 9·11 테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무슬림 남자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베일을 쓰게 한다. 이슬람 사회는 남자 중심적이다. 이슬람은 학문과 과학의 발전에 저해되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이고 처음부터 원수였다.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도둑의 손을 자르고 간통한 사람을 돌로 쳐죽인다. ... 등등.

과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 교과서에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꾸란)"이라는 구호가 버젓이 적혀 있었고 이슬람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이슬람은 매우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종교이고, 따라서 이슬람을 따르는 무슬림들은 한결같이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 '성전'(지하드)를 벌이는 호전적인 사람들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통속적인 편견들은 그와 같은 결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이상과 같은 통속적 관념은 사실과 전혀 다르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식 아닌 상식들이 무비판적으로 유포되는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은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한 입지를 내세우거나 그 어떤 실리를 챙기려는 불온한 세력의 존재 때문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를 들었던 십자군의 실상을 무슬림 사회에 역투사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서구적 편견은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3. 서구적 편견의 주요 전제들과 실체


이슬람과 무슬림 사회에 대한 서구적 편견은 저널리즘이나 통속적 상식의 차원에서만 유포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편견은 과학과 학문의 이름으로 또한 널리 유포되고 있다. 서유럽 기독교 사회를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이슬람 사회 및 그 밖의 사회를 부차화시키는 세계관이 어떻게 공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몇 가지 주요 전제들을 검토해본다.


1) 서구 중심의 지리적 세계관

각 나라나 문명권은 저마다 자기 중심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고립된 문명권의 의미가 퇴색한 오늘날 각기 문명권을 대변하는 세계관은 사실상 저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무대에 가장 뒤늦게 부상한 유럽의 세계관은 현재의 역학관계상 그 우월한 지위 때문에 여전히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늘날 지리적 차원에서의 서유럽 중심의 세계관은 거의 아무런 이의제기를 받지 않은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5대양 6대주로 세계지도를 그리며 우리는 당연히 유럽을 하나의 대륙으로 간주한다. 그와 면적상 거의 비슷한 규모의 인도나 동남아시아 같은 곳은 별도의 독립적인 대륙으로 간주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럽만이 독립적인 대륙으로 간주된다. 단순히 지형적 차원의 분류가 아니라 그 분류에 문화적 언어적 요인이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유럽이 인도나 동남아지역보다 그 자체로 더 복잡하면서 동시에 구별된 변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럽에 버금가는 복잡성과 동시에 여타지역과의 관계에서 변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유럽만이 배타적으로 하나의 대륙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적으로 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따른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그와 같은 지리적 차원에서의 유럽 중심 세계관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메르카토르도법을 따른 세계지도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당연한 상식으로 인지된다. 지구의 표면을 원주면에 투영하여 만든 그린 메르카토르 도법을 따른 지도는 항해의 방향을 잡아주는 정각을 나타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극지방으로 갈수록 위선 간격이 넓어져 극지방에 가까운 지역들의 면적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그 지도에서 북반구의 위쪽에 자리한 유럽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그렇게 과장된 지도에서 유럽의 주요 도시들과 지방은 세세하게 표기되지만 여타지역의 지명은 그야말로 주요지역 외에는 거의 표시되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지도상의 착시 현상을 통해 유럽, 그리고 그와 대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단일한 비유럽지역이라는 인식이 자리잡는다. 정확히 말해 유럽은 그 밖의 모든 세계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사실상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요 가장 우월한 문명권이라는 이미지가 파급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서양과 동양이라는 개념 역시 동일한 인식기반에 있다. 오늘날 서양은 미국까지도 포함하는 의미가 되겠지만, 서양은 사실상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백인사회를 말하며 동양은 그 밖의 다양한 여타지역을 모두 포괄한다. 유럽과 미국의 백인사회 밖의 여타지역을 동양이라는 하나의 사회 또는 문명권으로 포괄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도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이른바 동양이라 불리는 지역 안의 다양성도 간과될 수 없다. 그와 같은 문제를 애써 무시한 채 동양과 서양의 대립구도를 당연시하는 것은 결국 서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다. 또한 서유럽에 대응하는 논리로 흔히 '물질적 서양'과 '정신적 동양'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인식도 세계사의 실상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2) 서구 중심의 역사적 세계관

서구 중심의 세계관은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 유럽인들에게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과서에도 나타나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은 대개 문명의 서진론을 따르고 있다. 역사는 '동방' 곧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하였다. 그 문명의 횃불은 이어 그리스와 로마로 건네졌고 끝으로 북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져 중세와 근대의 문화를 꽃피웠다. 중세 한 때 이슬람 세계가 과학과 학문의 횃불을 보존하기는 했지만, 서구가 그것을 넘겨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서구로 넘겨졌고 곧바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제 그 문명의 불꽃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것이 서유럽인들 또는 미국인들이 그리는 세계사의 흐름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계사 인식은 마치 보편적인 것인 냥 당연시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매우 초보적인 상식만 갖고 보더라도 그와 같은 세계사 인식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서구 문명보다 훨씬 앞서 발전한 문명을 일군 중국을 포함한 극동과 인도 등의 문명은 어찌 평가해야 하는가?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는 그와 같은 문명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겠지만 '주류'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이 없는 것으로 평가될 뿐이다. 중세 이슬람 세계가 이룬 찬란한 문명도 그저 서구 문명의 발전을 예비해주는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흔히 서구 역사가들에서 아무런 반성없이 사용되는 '전제적 동양'이라든지 '정체된 동양'이라는 인식은 그와 같이 가당치 않은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은 사상사를 이해하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학 교과서나 그 어떤 개론서를 보면 언제나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에 기독교의 교부들의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이 이어진다. 이와 같은 서술체계 안에서 고대철학 부분에 인도의 철학과 중국의 철학이 잠시 소개되고, 중세철학 부분에서 중국 철학과 이슬람 철학이 마치 부록처럼 잠시 언급된다. 그리고 근세와 현대 철학에 이르게 되면 아예 서구 철학 이외에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서구 이외의 세계 사람들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있단 말인가?

서유럽 중심의 문명서진론은 서유럽 문명의 동방 확산에 대해서도 모순된다. 알렉산더는 인도변경까지 진출했고 로마도 동진을 했다. 알렉산더의 동방진출로 그리스 미술 양식이 극동의 신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식이다. 또한 서유럽 문명의 동방 확산으로 그리스 철학이 중세 이슬람 신학과 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흔히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이슬람 문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문명은 상호교류를 하는 것이지 일방통행하는 것이 아니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은 그 평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3) 텍스트주의 또는 본질주의

역동적인 서양과 정체된 동양 또는 변함없이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이라는 식의 인식 밑바탕에 문명에 대한 본질주의 또는 텍스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각 문명 또는 종교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어서 그것이 항구적인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종교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대변해주는 것이 경전이다. 텍스트주의라고 일컫는 까닭은 그 경전이 그 종교의 모든 것, 그리고 신도들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간의 비교를 할 때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근거해 판단을 한다. 그것은 어느 만큼 비교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 비교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종교 생활은 경전이나 교리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그 밖의 많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사회의 특성이나 개인의 취향까지도 작용한다. 그 점을 사상해버리고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과 구체적인 종교인들의 생활을 등식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전혀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욱이 텍스트들은 언제나 재해석을 통해 수용된다. 동일한 문구라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성서비평학을 통해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문명과 종교를 이해하는 데서는 그 비평학을 적용하지만, 다른 종교와 문명을 이해하는 데서는 그 비평학을 유보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경우 서구 사회의 이슬람을 향한 시선이 그와 같은 오류에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전투적인 무슬림들을 말할 때 그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옹호해주는 근거로서 꾸란의 구절들을 제시한다. 꾸란이 전투적이고 배타적이기에 이슬람과 무슬림은 전투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곧바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실 성서 가운데서 특히 구약에는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유대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와 같은 내용들 때문에 스스로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내가 사랑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말인가?


4) 기독교적 시선에서의 이슬람 혐오증

이슬람 세계의 팽창을 직접 대면하면서 가졌던 두려움 탓일까? 아니면 아예 낯선 타인보다 배다른 형제가 때로 더 밉게 느껴지는 이치와 같은 경우일까? 서구 기독교 세계의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세계의 그 어떤 종교나 문명에 대해서보다 심하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기독교 세계의 혐오감은 가장 결정적으로 상당 부분 십자군 전쟁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실 이슬람 세계의 입장에서는 북서쪽 이방인들의 갑작스러운 침입이 당황스러운 사태일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거나 적으로 맞서 피를 흘려야 했던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그 상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서구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혐오하게 된 배경은 십자군 전쟁만은 아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전의 사라센 제국의 팽창에 위협을 느껴야 했고,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겪어야 했다. 사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대격변이 일어나기까지 서구 기독교 세계는 세계사의 변방으로서 동방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되었고, 서구 기독교 세계가 역학관계상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오늘날 더욱 강화되어버린 양상이다.

직접적으로 대면하며 충돌했던 경험이 서구 기독교 세계의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이 강화시킨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게다가 이슬람이 기독교의 배다른 형제라는 사실은 더더욱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일신 신앙과 성서의 예언자 전통을 공유하고 있지만 새로운 예언자이자 최상의 예언자로 떠받들어지는 무함마드의 존재 자체가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북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교리나 전통상 이슬람과 기독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심하게 엇갈리며 불균형을 이룬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꾸란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성서의 백성'으로 간주하며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뿐만 아니라 아담에서 예수에 이르기까지 예언자의 계보를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의 계시의 완전한 성취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삼위일체 교리가 사실상 다신론이라고 보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대교나 기독교의 유산을 전제하지 않고 이슬람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 자체를 배타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이 자신의 진정성의 근거로 내세우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뒤바꾸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은 무슬림들에게 꾸란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계시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였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무함마드가 틀림없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시사해주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무함마드가 결혼을 하고 정치를 하고 때로는 전투에도 참여한 것은 무슬림들에게는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모범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무함마드가 독신생활과 함께 평화주의를 지킨 예수처럼 고결한 지위에 있을 수 없는 결격 사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곡해에 더하여 악의적인 비방까지 더해가며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 세계 자체를 악마화하였다.



4. 서구적 편견을 넘어서


그 실상을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편견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그 편견의 지속이 어떤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문명에 대한 편견이 계속 고수되고 심지어는 문명 충돌론이 제기되는 것은 그 이해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어떤 정치적 의도를 따른 것일 뿐이다. 세계 역사에서 일정하게 구별되는 문명권이 자신과 구별되는 또 다른 문명권과 총체적으로 대결한다는 것은 일종의 허상이다. 대결하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일 뿐 문명 자체가 대결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은 상호교류하는 가운데 공존해 왔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풍부한 유산을 공유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갈등하여 충돌하는 국면에서조차 문명은 교류하고 공존해 왔다. 정치군사적 승리나 지배가 문명 자체에 대한 지배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으며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어떤 경우든 문명사적 차원에서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대결과 충돌이 일어나는 듯이 주장하고 실제로 충돌을 조장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어떤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악의 축'을 고안해낸 것은 그 명백한 사례이다. 결국 고의로 조장된 문명의 충돌, 그것도 선악을 대변하는 세력의 결사적 충돌로 비추도록 만드는 것은 그 사태를 조장한 세력의 지배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슬람 세계 및 자신 밖의 다른 세계에 대한 서구적 편견은 사실상 서구의 세계지배 욕망의 표현 외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 불온한 의도를 들추어내고,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강좌에서는 그 편견을 거두어내고 이슬람의 실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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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큐메니안> 보도 기사
서구기독교가 그려온 이슬람 편견 넘는다 - 조작된 이슬람 이미지는 서구의 지배욕망에서 비롯


* <뉴스앤조이 게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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