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오늘의 세계 일부로서의 이슬람, 그 역사와 현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4-12 21:44
조회
3322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6년도 상반기 강좌

이슬람과 기독교, 충돌과 공존의 역사

제2강 / 2006년 4월 11일(화) 오후 7:30  


오늘의 세계 일부로서의 이슬람, 그 역사와 현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1. 다양한 이슬람, 다양한 무슬림


지난 강좌에서 우리는 단일한 이미지의 이슬람을 그려내는 서구적 편견의 실체를 벗겨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제 그 편견을 벗어내고 새삼 바라보는 이슬람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무슬림이 분포하는 중심지역을 말하자면 과거 세계의 주요 문명이 꽃을 피운 '아프로유라시아 오이쿠메네'의 핵심지역을 모두 포괄한다. 오늘날의 판도로 말하자면 서부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남서부와 러시아의 남부, 심지어는 유럽의 중심부와 아메리카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어떤 지역이든 무슬림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흔히 이슬람은 중동의 종교 또는 아랍의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전체 무슬림 가운데서 아랍인 비율은 고작 18%에 불과하며 국가별 단위로 보자면 인도네시아가 최대의 무슬림 국가에 해당한다. 전세계적으로 13억이 넘는 무슬림의 절대다수가 중동의 사막 지역보다는 쌀 농사를 짓는 지역,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 거주한다.

1400년이 넘는 이슬람의 역사,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무슬림의 분포는 얼마나 다양한 이슬람과 무슬림이 존재할 것인지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불과 500년의 역사를 지닌 개신교의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슬람의 다양성을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슬람은 매우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순니파와 시아파가 구별되어 있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교리의 이해 차이를 따라 더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진다. 흔히 이슬람 수피즘을 단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수피즘 역시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다양하다. 교리 이해나 종교 체험의 방식에서 다양한 갈래로 나눠질 뿐 아니라 지역과 나라마다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서유럽의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하며 발생한 다양한 현대 이슬람 사회운동까지를 더하면 그 양상은 더더욱 복잡하다. 그 실상을 간과하고 단일한 이미지, 그것도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으로 무장한 무슬림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2. 이슬람의 기원과 역사


오랜 역사와 폭넓은 분포만큼 이슬람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른바 '이슬람 문명'이라 부르는 데에는 그럴 만한 공통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밑바탕을 이루는 공통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슬람의 기원과 그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슬람 역사에서 '무지(몽매)'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반도에는 유목민(베두인)과 오아시스 정착민으로 구성된 이중적 사회구조가 있었다. 유목민 사회는 느슨한 정치구조와 집단주의로 유지되고 있었고 사회적 부에 대한 일종의 공유관념을 갖고 있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정착민 사회는 사회 경제적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서쪽의 비잔틴제국 사이의 오랜 대결로 페르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지중해로 통하는 동서통상로가 차단되어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 지역이 주요 교역통로로 떠올랐다. 그 요지에 위치한 메카와 메디나는 교역의 중심지로 사회 경제적 변혁을 겪기 시작했고, 그 사회가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유목민 사회와 긴밀히 결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역로와 무역권 주도를 위한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누차 유혈 충돌을 겪어야만 했다. 그 상황에서 기존의 씨족사회 중심의 사회조직은 부적합하게 되었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요구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의식의 변화 또한 요구되었다. 아라비아지역의 유목민이나 정착민은 모두 부족마다 고유한 신과 함께 여러 자연물이나 정령 등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세기말부터 유대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여 5세기말에 이르러 제법 번성하였고,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도 아라비아 북부에 많은 아랍부족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때 대상(隊商)을 따라 여행을 많이 한 아랍인들 가운데서는 '하니프'('진실한 자')라 불리는 구도인들도 끼여 있었고 이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구습을 타파하는 등 종교개혁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등장한 것은 그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서였다. 메카의 유력한 가문인 꾸라이쉬 부족 출신인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고 친척들에게 양육되었다. 성장한 후 낙타몰이꾼으로 대상에 참여하여 시리아 지방을 자주 왕래하면서부터 기독교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가운데 꿈을 키워갔으며, 25세 때 15세 연상인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자 메카 부근의 히라동굴에서 명상과 사색에 잠긴 끝에 15년의 세월이 흘러 40세에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받고 포교활동에 나선다. 그 때의 계시가 이슬람의 기원인 셈인데,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그 '창시자'로 일컫지는 않는다. 이미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계시를 해 왔던 것이  무함마드에게 비로소 완전하게 계시된 것으로 믿는다. 어쨌든 무함마드로서는 최초의 계시를 받은 이후 23년간의 생애를 지속하는 동안 계속 계시를 받는 가운데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메카에서의 초기 포교활동은 부족들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620년 신자 70여명과 함께 메디나로 활동무대를 옮긴다(聖遷, 히즈라). 부족들간의 갈등을 겪고 있던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중재자로 떠받들어져 일종의 신정국가 체제인 '움마'를 만들어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된다. 하느님을 최고 주권자로 하고 자신을 그 대리인으로 하여 혈연이나 지연이 아닌 신앙 곧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움마)를 만들고 헌장을 발표하였다. 그 헌장에는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서약하였고 메디나는 이슬람의 거점이 되었다. 메카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몇 차례의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메카를 제압하고 630년 무혈입성하였다. 다음 해 메카의 여러 부족들은 이슬람을 수용할 것을 서약했고, 그 다음해인 632년 62세의 무함마드는 메카 순례에 나서 아라파트 산에서 고별연설을 하면서 이슬람의 승리를 공식 선포하고, 바로 그 해에 영면을 하였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시대 사실상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중동과 이집트 지역을 그 판도로 확장하였고, 이후 우마위야조에 이르러서는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판도를 확장하였다. 불과 100여년 사이에 이와 같이 확장된 이슬람은 8~9세기 이후 이슬람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복합적인 이슬람문명을 일구어 정착기에 들어선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의 침입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아랍 중심의 이슬람제국은 붕괴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이슬람국가들의 출현과 함께 그 판도 또한 더욱 확장된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을 이은 오스만제국은 서구와 직접 대결을 했던 세력이기에 서구에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밖에도 페르시아지역(사파비제국)과 인도지역(무굴제국)에 중심국가들이 자리 잡은 가운데 이슬람 문명은 더욱 확산되고 뿌리를 깊게 내려갔다. 18세기 서구 제국주의 침략 이전까지 이슬람문명은 천년 이상을 '아프로유라시아 오이쿠메네'의 중심을 형성했고 사실상 세계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이슬람문명의 확산과 정착은 세계사에서 다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처럼 단기간에 세계의 핵심지역 전역을 포괄하는 판도로 확산될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이슬람 전파 초기에 비잔틴제국과 산사조 페르시아의 오랜 대결은 이슬람의 확산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랜 대결로 제국들은 쇠퇴했고 그 제국들의 치하에 있던 신민들은 염증을 느꼈다. 그런 조건이 초기 이슬람의 확산에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유목민과 대상의 기동성 또한 그 전파에 적극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슬람 그 자체가 애초부터 민족이나 국가,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한 종교로서 세계성과 보편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형제애'를 강조하는 이슬람은 다른 문명들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다. 이슬람문명은 마치 하나의 용광로처럼, 고대 오리엔트문명, 그리스-로마문명,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을 용해하여 응고시킨 것과 같다. 그 이슬람문명은 인접한 중국의 문명 또한 수용하였고 동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기 이슬람제국은 피정복지에 이전보다도 훨씬 낮은 인두세를 적용하였다. 이슬람의 확산은 서구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으로 강요한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그 확산은 형제애와 관용의 정신의 확산이었으며 그 수용의 결과였다.

물론 어떤 종교가 표방하는 이상을 정치적 함의를 헤아리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진한 태도이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의 확산 과정이 그 종교의 관용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헤아리는 것 또한 편견을 뛰어넘어 실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진지한 태도에 해당한다.      



3. 신앙과 삶으로서 이슬람


다양하지만 공통성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슬람, 이제 그 공통적인 신앙의 요체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슬람은 단순한 하나의 신앙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어떤 신앙치고 삶과 무관할 턱이 있을까마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슬람은 다른 종교생활에 비해 확실히 인상적이다. 이슬람은 간결한 신앙의 요체와 함께 생활 속에서 신앙을 구체화하는 면모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철저하다.


1) 신앙의 요체

이슬람 신앙은 흔히 6신5행(六信五行)으로 간결하게 집약되는데, 6신은 기본 교리로서 여섯 가지 믿음을 말하고 5행은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떠받치는 기둥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를 말한다. 이 모든 요체들은 '신은 오직 하느님[알라]뿐이고, 무함마드는 하느님[알라]이 보낸 사람이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여섯 가지 믿음은 하느님[알라], 천사, 경전[꾸란], 예언자[무함마드], 최후심판, 정명(定命)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이 가운데 다섯 가지는 꾸란에 명문화되어 있으나(꾸란 4:136) 맨 마지막 정명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경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이유로 순니파는 정명을 여섯 가지 믿음에 포함하고 있다. 시아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정명을 여섯 가지 주요 믿음에 포함시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1) 하느님: 이슬람의 유일신관은 기본적으로 유대교 및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꾸란 29:46). 초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할 수 있을 뿐 그 실체에 대해 사변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었으나, 8세기초 그리스철학 등이 수용되어 이슬람신학이 형성되면서부터는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형상을 지니지 않는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사실상 삼신론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하느님의 독존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느님에 관한 믿음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천사: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천사에 관한 믿음은 흥미로운데, 천사들은 각각 고유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은 수좌(首座) 천사로서 예수나 무함마드 같은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미카엘은 유대인 보호자로서 물을 관장하고, 이쓰라일은 생사를 관장하는 천사로 우주를 관찰하고 의식을 공급하고, 이쓰라필은 비바람을 관장하고 종말의 도래를 선포한다. 천사들 가운데는 하느님을 명령을 거역하고 인간을 범죄의 길로 유혹하는 이블리쓰도 있다.

(3) 경전[꾸란]: 이슬람은 완결된 최후의 경전으로서 꾸란을 믿는다. 이전에 계시된 여러 경전들도 하느님의 계시이므로 존중해야 하지만(꾸란 3:84; 17:88), 그 가운데서 <모세5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꾸란>을 중요한 경전의 4부작으로 꼽고, 그 가운데서도 <꾸란>을 천상의 원형 그대로 완결된 최후의 경전이라 믿는다. 서술식 구조라기보다는 간결한 운문체로 기록된 꾸란은 그 내용에서 기독교의 성서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이전의 내용들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곧바로 단편적인 기록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통치기간 644~652)에 의해 표준적인 판본이 확립되었다. '독송'을 뜻하는 꾸란은 7개의 독송학파에 따라 이본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이본의 차이는 의미상의 차이보다는 대개 철자 및 발음의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사본이 존재하는 히브리성서 내지는 기독교의 성서와 달리 사실상 결정적 차이를 지니는 사본들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기에 꾸란은 해석의 여지없이 문자적으로 수용되는 것으로 종종 오해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신교의 문자주의를 투영시킨 견해일 뿐이다. 꾸란에 대한 다양한 주석의 전통이 있고, 또한 여러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한편 이슬람에서는 꾸란 외에도 무함마드의 어록에 해당하는 <하디스>가 경전에 버금가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 하디스에는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한다.

(4) 예언자[무함마드]: 이슬람은 경전에 대한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나 예언자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다. 여러 민족이 배출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각 시기마다 보낸 사람들로 간주하며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꾸란 16:36).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여섯 명의 예언자 곧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떠받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예언자의 봉인'으로서 무함마드를 가장 우대한다. 이슬람은 그 어떤 예언자에 대해서도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에게는 물론 무함마드에게도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최고의 위대한 예언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일 뿐 그가 하느님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분파에 따라 무함마드의 탄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간주하여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지위에 올려놓지 않는 이슬람의 한 특징을 보여 준다.

(5) 최후심판: 이슬람의 내세관은 기독교 신앙과 마찬가지로 부활과 최후심판에 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원죄론과 같은 교리는 없으며, 현세에서의 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선행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6) 정명: 이슬람의 정명관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신앙관 가운데 하나다. "인샬라!"를 입에 붙이고 사는 무슬림의 태도는 마치 숙명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알지 못하는 신의 뜻을 인정하는 것일 뿐 꼭 비관적 체념의 의미는 아니다.


2)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  

신앙의 요체에 관한 믿음은 그 종교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고 저마다 달리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되는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무슬림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모든 무슬림이 따르는 다섯 가지의 종교적 의무는 신앙고백, 예배기도, 라마단월의 금식, 자선, 메카로의 순례를 말한다. 모든 무슬림은 이 다섯 가지 의무를 수행하지만 분파마다 구체적인 수행양식에서는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1) 신앙고백: "하느님[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자이다."를 입으로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 외에 신이 없다는 것은 배타성의 근거로서보다는 어떠한 우상숭배도 금한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그 어떤 인간도 신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함마드를 하느님의 사자로 고백하는 것은 그를 통해 계시된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2) 예배기도: 하루 다섯 번 행하는 예배기도(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는 주로 자기정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어느 날 무함마드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질문을 던졌다. "만약 어떤 사람의 집 앞에 개울이 있어 매일 다섯 번씩 목욕을 한다면, 그의 몸에 때가 끼어 있을까?" 이 물음에 제자들은 답했다. "때가 끼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말했다. "매일 다섯 번씩 하는 예배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통해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 예배는 시혜를 바라는 기복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자기정화의 성격을 갖는다. 이 예배기도의 행동양식은 분파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본 태도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듯이, 아니면 하느님이 내려다보는 듯이' 하는 것이다.

(3) 금식: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월 한 달 동안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는 것을 일체 금지한다. 이슬람 역사상 그 기원은 꾸란의 계시가 내려진 날을 기억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꾸란 2:53), 종교사적으로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금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유대교나 기독교에서의 금식이 대개 고난과 슬픔을 나타내는 것인 반면 이슬람에서의 금식은 개인적 성찰의 기회인 동시에 사회적 연대의 축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1958년 이라크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감옥에 수감된 한 지도자는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금식은 개인적으로 알라에 대한 순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모든 무슬림들의 연대의식과 동등의식을 권장하는 집단훈련이다."

(4) 자선: 자선 또는 종교부금 등으로도 불리는 '자카트'는 모든 물질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신앙에서 비롯된다. 이슬람 역사 초기에 자카트는 자발적 기부에 의존했고, 주로 빈민을 구제하는 데 사용되어 사회적 대립과 모순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세우면서부터는 종교적 의무로 규정되어 모든 무슬림이 지키도록 하고 있다. 납부율은 대상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연간 수입의 2.5%, 곡물인 경우에는 5~10%, 매장자산의 경우는 20%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자발적인 자카트는 계속되고 있고, 현대에 와서는 자발적 자카트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5) 성지순례: 성지순례는 원래 먼 옛날부터 셈족들의 중요한 관행이었는데,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우상들을 완전히 타파한 것(630년)을 기념하여 그 사건을 기리도록 한 데서 유래한다. 메카의 '카으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순례는 모든 무슬림이 같은 옷을 입고 희생제물을 함께 나눔으로써 이슬람의 일체성과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종교에서나 성지순례는 권장되는 사항이지만 이슬람에서 의무로 규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의무사항이라고 하여 그것이 불가역적인 것은 아니다. '필요는 금지보다 우선한다'는 이슬람의 포용적 원칙에 따라 경제적 형편으로 성지순례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해된다.                  


3) 삶으로서의 이슬람 윤리

이슬람은 이상과 같은 종교적 신앙생활과 함께 구체적 삶에서 그 윤리를 구현하고 있다. 윤리의 영역이란 삶의 전반을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영역이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두드러진 문제들만 간략히 살펴본다.

(1) 정치: 흔히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를 이해할 때 '신정체제' 또는 '정교합일'의 원리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적어도 전근대 이슬람 국가들을 말할 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종교의 교조가 자신의 이상을 당대에 전사회적으로 구현한 경우는 드문데, 예외적으로 이슬람의 경우에는 무함마드 자신이 종교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고 국가를 경영하였다. 그런 만큼 그 모범은 이슬람의 정치 전통에 매우 깊게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이슬람의 종교적 이상은 곧바로 정치적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부족 중심의 사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구조의 원리로서 등장한 이슬람 자체가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그 정신은 정치이념으로도 구체화되었다. 예컨대 이슬람 초기부터 견지되어온 협의제의 원리[슈라], 정의의 원리[아들], 자유의 원리[홀리야], 평등의 원리[무싸와] 등은 근대 이전의 세계 이미 이슬람 사회에서는 중요한 정치원리로 간주되어 왔다. 물론 그 모든 정치원리들이 수미일관 투명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슬람의 세계주의적 정치원리로 통용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 원리들은 매우 선구적인 것들이었다.

이슬람 사회들은 그 이념을 이슬람 법 곧 샤리아로 일컬어지는 체계에 수용하여 정치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그 법체계는 그야말로 순수 이슬람 원리만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 법을 최고의 권위 근거로 삼았지만, 그 밖의 지방이나 민족들의 관습법이나 행정법들을 배제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순수 이슬람의 회복과 그 정치적 적용을 주장하는 것은 근현대 이슬람 사회운동의 한 양상일 뿐, 전근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양한 이슬람 사회 및 국가들 형태들이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터키는 이슬람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공화정을 하고 있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청교도적 분파인 와하브파와의 동맹 가운데 부족적 왕정을 취하고 있고, 이란은 입헌 민주제에 신정의 요소가 결합된 경우이고, 미국에 의해 붕괴되기 이전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은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신정체제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이 가운데 어떤 정치 형태가 전형적인 이슬람식 정치체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전사회적 자양분으로서 이슬람 신앙 내지 그 문명을 기본 바탕으로 다양한 국가와 정치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이슬람 사회의 양상이라 할 것이다.

2) 경제: 이슬람 사회의 경제적 차원의 문제 역시 정치적 차원의 문제와 유사하다. 이슬람의 경제관은 모든 물질은 하느님에게 속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부의 불평등은 항상 문제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독특한 경제윤리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경제제도와 관행들이 이슬람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원리는 선언적 차원의 윤리적 준칙만은 아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 원리들이 오래 전부터 제도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들이 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이나 파키스탄의 에이디재단 같은 경우는 빈곤층에게 최소신용대출이나 보건 등의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관행은 "가진 자의 재산 중에는 못 가진 자의 몫도 있다"(꾸란 51:19)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서구의 현대적 복지제도 이전부터 존재해온 이슬람식 사회 안전망에 해당한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는 부의 집중을 막고 평등한 분배를 이루기 위해 고유한 상속제를 준수하고 있는데, 여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족성원에게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도록 하는 규정들을 따르고 있다. 어쨌든 부의 편중이 극심하게 이뤄지는 오늘 사회 현실에서 전통적인 이슬람의 평등주의적 경제관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슬람 사회가 당면한 과제이다.    

3) 양성평등: 서구 사회가 이슬람 사회의 '후진성'을 말할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여성 차별 문제이다. 모든 전근대 사회는 물론 오늘날의 사회들 또한 여전히 남성중심적 사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의 정치적 혁명과 최근의 페미니스트 운동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여권 신장을 이룬 서구 사회는, 이슬람 사회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차별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기본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전근대 이슬람 사회에서의 여성의 권리는 서구 사회 여성의 권리보다 훨씬 폭넓게 보장되었다. 이슬람 초기부터 여성들의 역할은 결코 소홀히 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부인들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예언의 전승자로서, 그리고 정치적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시아파 순교자 후세인의 누이 자이납은 칼리프의 권위에 정면으로 저항한 지도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경전 자체에서 성차별적인 용어들이 문제시된 것은 아마도 꾸란의 경우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오늘날 성서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해석이 성차별적인 용어를 문제시하고 있지만, 이슬람의 경우 초기 공동체 안에서 성차별적인 용어들이 문제시되어 그 차별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꾸란 안에 반영되기도 하였다(꾸란 33:35). 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회에서는 근대 이전에도 여성들에게 재산상속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흔히 여성차별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베일착용 역시 이슬람 사회의 고유한 성차별적 장치만은 아니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편견과 공격 때문에 베일착용 여부가 매우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지만, 본래 그것은 고대근동의 귀족 여성들의 복장양식이 일반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차별을 극복하고 양성평등을 이루는 것은 모든 사회의 공통적 과제이지 이슬람 사회만의 과제는 아니다.

(4) 지하드: 아마도 이슬람 사회에 대한 편견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하드'일 것이다. 흔히 '성전'(聖戰)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서구 기독교적 번역에 해당한다. '지하드'는 진리를 향한 투쟁 또는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투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와 관련된 용어로 '이즈티하드'는 법률적 추론 및 해석의 시도를 의미한다. 물론 지하드가 이교도들과의 전투에도 적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이고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슬람 사회의 정치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하드를 선포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본래의 그 의미는 그렇게 제한된 것이 아니다.



4. 문명으로서의 이슬람: 학문과 예술


세계 역사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기여도 측면에서 말하자면, 사실 종교적 신앙으로서 이슬람보다도 문명으로서 이슬람이 훨씬 우월할 것이다. 8세기 이후 정착기에 들어선 이슬람 문명은 중세 700~800년간 사실상 세계사 무대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슬람 문명의 판도 안에 있던 모든 문명의 유산을 계승한 결과이며, 동시에 인접 문명과의 폭넓은 교류 덕분이었다.

학문적 차원에서 말하면 신학, 철학, 의학,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지리학, 역사학 등 모든 분야에서 중세 이슬람 학문은 세계 문명의 보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의 숫자이지만 그것을 발전시키고 전파한 이들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들의 수용력 있는 문명의 성격을 말해준다. 화학 용어들과 수많은 과학적 용어들 자체가 아랍어에 기원을 둔 것도 같은 사정에서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을 서구세계에 전파한 것도 이슬람 문명이었고, 서구의 근세 르네상스와 제반 과학적 사회적 변동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을 제공한 것도 이슬람 문명이었다. 특별히 기독교의 입장에서 새삼 주목할 것은 서구의 중세 기독교 철학 및 신학 발전을 자양분을 제공한 것도 이슬람 문명이라는 사실이다. 이슬람 문명은 서구 사회에서 잊혀졌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전하기도 하였고, 그리스 철학 원전들도 전함으로써 중세 스콜라 철학의 원천을 제공해 주었다.

서구의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구적 관점에서는 자신들의 문명을 위한 임시 저장고 역할로서 이슬람 문명을 평가함으로써 그 역할을 폄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서구 문명에 주도권을 넘긴 후 이슬람 문명은 급격히 쇠퇴하여 쇠락의 길을 걸은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렇게 쇠락한 문명이 필연적으로 우월한 서구 문명에 복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18세기 서구 제국열강이 강압적으로 이슬람 사회들을 재편하기 전까지는 사실이 아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을 받기 이전 이슬람 사회는 여전히 자체의 역동성을 지니고 발전하고 있었으며 학문의 발전 또한 쇠락하거나 중단된 적이 없다. 그것이 잊혀진 것은 서구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었더라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일 따름이다.

학문과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슬람 사회의 예술 또한 발전하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문화 예술 유산의 파괴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킴과 동시에 이슬람 사회의 문화 예술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형성시켰다. 철저하게 형상을 금지하는 원칙이 문화 예술의 발전을 금압했을 것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사실과 다르다. 형상을 금지하는 종교적 원칙이 인간의 표현 능력과 그 욕구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건축물과 서책, 양탄자 등에 그려진 아라베스크 문양은 형상금지 원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예술적 정신세계를 그려낸 경우에 해당한다. 대체로 식물 문양을 기본으로 하는 아라베스크는 조화로운 우주와 세계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체적 형상을 담은 회화들이 아예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신성한 대상을 제외하고는 회화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양한 기법의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천일야화>는 중세 문학의 금자탑으로 이슬람 문명의 문학적 상상력의 저력을 말해주고, 현대에도 다양한 문학장르의 발전과 함께 전통과 현대의 갈등 속에서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건축과 음악 등에서 구축한 이슬람의 독특한 세계는 말할 것 없거니와, 오늘날에는 이슬람권의 영화 또한 큰 주목거리이다.



5. 보론: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


흔히 한국이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사신 뤼브릭이 원나라에 왔다가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소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4~5백년 앞서 아랍-무슬림들은 신라를 왕래하였고 자신들의 세계에 소개하였다. 이미 9세기에 신라를 소개한 아랍 문서들이 있고, 신라의 유적에도 무슬림의 왕래를 추정케 하는 단서들이 있다.

고려 시대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무슬림 상인들이 왕래를 하였고, 원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는 개경에 무슬림의 정착촌까지 생길 정도였다. 무슬림 출신들 가운데서는 고려 조정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른 이들이 있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고려 속요 <쌍화점>은 무슬림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고려인들과 매우 친숙한 존재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오늘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 또한 아랍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무슬림들과의 교류는 빈번하였고 조선의 왕궁에서는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축복을 기원하는 꾸란 독송회가 열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이슬람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기도 했는데, 조선 역법의 기초가 된 <칠정산내외편>은 이슬람력의 원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적용한 결과로서 문명교류의 중요한 하나의 예이다. 이후 무슬림의 한화(韓化)가 이루어짐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존재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수용된 문명은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그 후손들 역시 오늘날까지 계속 존속하고 있다.

이후 일제치하에서 일부 무슬림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미미했고,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이슬람 및 무슬림과의 교류는 한국 전쟁 당시 터키군의 참전으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중동과의 교류, 그리고 최근에는 이슬람권의 노동자들의 이주로 이슬람과 한국 사회는 더욱 긴밀하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



6. 오늘의 세계 일부로서 이슬람


이슬람 문명은 모든 분야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 세계의 중요한 일부로서 자리하고 있다. 고립되고 쇠락한 문명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문명으로서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슬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 아닌 그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 시도를 마치 낯선 여행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수반한다. 먼길을 떠날 때면 항상 그 교차되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결국 그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떠나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의 기억은 사라지고 그 여행의 보람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찬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어찌 말하면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 아닐까? 결국 하느님에 대한 관심은 낯선 곳, 낯선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 관심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 분명하다. 그 관심의 결과가 타자를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슬람이 살아 움직이는 문명으로서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무관할 수 없다. 그 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해가 가능해졌다면 이번 강좌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 <뉴스앤조이> 게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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