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교회 죄책고백, 어떻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2-16 22:52
조회
4019
* <복음과 상황> 논단 원고입니다(060216).


한국교회 죄책고백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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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사 청산 또는 극복의 과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제기되고 있다. 역사를 평가하는 일이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하게 잘잘못을 가리기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단절해야 할 역사와 계승해야 할 역사를 분별하는 일은 뒤범벅된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

교계 한편에서도 100여 년의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서 과오로 반성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에서는 지난 해 10월부터 '죄책고백을 통한 과거사 극복 심포지엄'을 매월 정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다섯 번째 주제 "유신체제, 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를 발표하면서 결론 삼아 한국교회 죄책고백을 어찌해야 할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책고백을 통해 과거사를 극복한다는 것은 결국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과 교회의 존재방식을 탐색하는 작업이기에, 그 의미를 새삼 묻는 것은 단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의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박정희시대를 평가하면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욕구를 '걸인의 철학'이라는 수사로 비유하였다. 먹고사는 욕구를 해결하면 또 다른 종류의 욕구가 끊임없이 분출하는 원리를 그렇게 말한다. 아울러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걸인의 철학에 물든 사람이 거기에서 탈피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컨대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욕구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아보자'는 욕구로 진화할 뿐 정말 '잘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웰컴투동막골>에서 촌장이 말한 "뭘 잘 멕여야지!"라는 대사는 오늘 한국 정치인들의 즉각적인 환호를 받고 있다. 국민소득 2,000 달러를 외쳤던 박정희와 20,000 달러를 외치는 노무현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걸인의 철학'에 매여 있는 것 같다.

박정희체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협력자로 함께 해온 한국교회의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한국의 교회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이 '제일'과 '중앙'이다. 그 이름들은 한국교회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욕구를 표현한다. 그야말로 규모상 세계 제일의 교회도 있고, 세계 10대교회 안에 5개 이상이 한국에 있으니 누구나 바라는 그 목표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만 보이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런데!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저마다 '중앙'을 자처하고 '제일'을 자처하는 가운데 교회의 본연의 임무에 대한 성찰 또한 함께 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존립 자체를 목적으로 함과 동시에 규모의 성장에 매몰되어 있는 교회는 속성상 그와 같은 성찰을 할 수 없다.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민주적 정당성 없는 정권과 유착하고, 그 정권이 확립한 체제 안에서 성장주의를 내면화해 왔을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극도의 배타적 자세를 당연시하는 교회는 자기의 생존과 확장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못한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허기로 허덕일 뿐이다.


그로부터 헤어 나오는 길은 무엇일까? 죄책고백을 통한 과거사 극복을 시도하는 것은 그 길을 찾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수사가 우리의 혜안을 열어준다. 한신대에서 종교학을 가르친 바 있는 이상린은 '수치심의 철학'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말한다. 이상린은 그 수치심을, 비인간적인 소외된 강제적 인간관계에 '아직도' 적응하며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 현실의 구조를 변혁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는 내면 의식이라 말한다. 흔히 타율적 윤리관에서 체면의 손상에서 오는 수동적 의식으로 간주되는 수치심을, 사회적 현실과 인간 자신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으로서 능동적 자기 의식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죄책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죄책고백은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수치심과 같은 것이 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죄책고백이란 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죄를 참회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죄책고백을 말하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죄를 반성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잘못을 말하고 있으니, 의당 교회의 한 성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죄를 반성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교회 현실을 보자면 그렇지 않다. 한국교회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불의한 정권과 유착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해 저항한 교회가 있다. 그런데 지금 죄책고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불의를 저지른 교회가 아니라 저항을 했던 교회들이다. 다른 시대는 그 양상이 다를지라도 특별히 박정희체제하에서 교회의 구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죄책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강요'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흔한 "내 탓이오"일까? 그렇게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덮어두고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하면 정말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항변할 사람들이 더 많다. 과오를 인정한 경우에도 참회보다는 변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 그렇다면 죄책고백은 사실 말장난일 뿐이다. 현실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그 흔한 싸구려 회개운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수치심과 죄책고백을 관련시켜보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능동적인 자기 의식으로 수치심은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용인할 수 없는 현실에 스스로 매여 산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그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변혁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죄책고백은 잘못된 교회의 전통과 단호히 절연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어야 하고 실제로 잘못된 교회의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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