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황우석 사태, 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12-20 01:58
조회
3736
*<뉴스앤조이>기고문(20051220)


황우석 사태, 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세계를 놀라게 만들고 온 국민을 열광하게 만든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진위 논란은 이제 우리를 극도의 혼란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현재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 연구 자체를 지지하느냐 않느냐에 상관없이 설마 했던 문제들까지 사실로 확인되고 있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연구성과 자체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고도의 집중력과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할 터인데, 지금의 상황은 마치 스포츠 경기라도 관람하듯이 시시각각으로 또 뭐가 달라졌을까 촉각을 내세워야 하는 지경이다. 그 지난한 과학적 연구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게임이 될 줄이야!


애초 황우석 교수가 2005년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이 2004년 논문에 비해 주목을 끈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난자로부터의 줄기세포 형성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였다는 것이고(2004년 0.4%에서 6%로), 또 다른 하나는 핵을 제거한 난자에 환자의 체세포핵을 이식함으로써 소위 맞춤형 줄기세포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진위 공방의 주장을 근거로 판단하자면 그 성과가 의심스러워진다. 황우석 교수의 해명에 최대한 공감하는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인정했다시피 적어도 논문 완성 시점에서 실제 결과보다 부풀려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난자에 체세포핵을 이식하여 배아줄기세포를 수립한 것으로 발표한 2004년도 논문마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논문마저 부풀려졌다면 세계 최초로 핵을 제거한 난자에 체세포를 이식하여 배아줄기세포를 형성했다는 연구결과는 원천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황우석 교수 연구팀의 원천 기술의 존재마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진행중인 검증을 통해 그 진위가 확인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현재 밝혀진 것만으로도 연구결과가 과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극도의 세밀한 착오라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연구과정에서 어찌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아예 근접하지도 못한 연구결과를 놓고 아예 처음부터 조작해버렸다면 정말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하지만 적어도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줄기세포 형성만큼은 성공했다는 전제에서 보면 2004년에서 2005년의 '비약'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돈 냄새'가 나지 않은 연구성과를 일약 '돈 냄새' 나는 연구성과로 '비약'시킨 것이다.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줄기세포 수립 그 자체로도 놀라운 것이지만, 단지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는 그 연구의 목적인 난치병 치료를 위한 기술의 상용화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대폭적으로 줄기세포 수립 효율을 높이고 게다가 맞춤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용화의 단계에 더욱 가까워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성과만으로 곧바로 상용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줄기세포를 필요한 신체부위의 세포로 분화시키는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 및 유전적 질병의 경우 맞춤형 줄기세포로는 오히려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문제 그리고 그 밖의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의 연구는 2004년의 연구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상용화의 가능성에 크게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과학적 연구 자체가 단시일 안에 그렇게 비약을 했더라면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 과학적 연구성과가 비약을 하여 '돈 냄새'를 풍긴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돈 냄새'가 과학적 연구성과의 비약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이 지점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연구가 지니는 문제점이 응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의료의 산업화 내지는 시장화의 맥락에서 그 연구가 진행된 데서 빚어진 문제라는 것이다. 야심만만한 한 과학자의 우발적 동기에서 비롯된 사태가 아니라 소위 의료산업의 선진화가 국가발전 전략의 하나로 채택되어 국가의 총력이 기울어진 상황 가운데서 벌어진 사태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보기술(IT)과 바이오기술(BT)은 한국의 장래를 결정지을 주요한 전략분야로 간주되고 있고 정부는 공공연하게 이를 표방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올 2월 국정연설에서 "의료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해외로부터 의료산업에 돈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까지 천명했다. 국가는 총력을 기울이고, 국민은 부강한 나라의 미래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배아줄기세포연구는 그 국가적 관심과 국민적 기대 한 가운데서 빛과 같은 존재였다.

문제는 바로 그 메커니즘 안에서 발생하였다. 정부와 국민은 온통 그 연구성과에 매달렸고 과학자는 서둘러 성과를 내고싶은 과욕에 사로잡혔다. 그 관심과 기대에 힘입어 넉넉한 연구조건을 확보한다면 지금은 다소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조만간 실제 연구성과로 진전시켜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국익논리만이 오직 유일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과학적 연구의 윤리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렸고, 어떤 식으로든 그 연구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는 것은 뭇매 맞을 짓이 되어버렸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사실 연구결과가 발표되던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윤리적 이의제기를 해 왔다. 그러나 그 이의제기로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배아가 잠재적 인간 생명체에 해당하므로 배아를 실험대상으로 삼는 것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배아복제로 사실상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을 열어 인간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매우 소중한 문제제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이의제기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메커니즘과 그로 인해 지금 당장 사회적 관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단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추상적 담론 수준에서 상징적 효과만 지녔을 뿐 연구의 향방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늘 사태의 반전은 매우 구체적인 윤리적 이의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달여 전 방송사 보도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윤리적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구 종사자의 난자가 제공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연구에 사용된 난자 가운데 일부가 사실상 매매되었다는 것이다. 연구 종사자의 난자가 제공되는 것이 윤리적 문제가 되는 것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인 연구 윤리 규준상 자발적 동의가 어려울 수도 있는 연구 종사자의 경우 피험자가 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난자 일부가 매매되었다는 것은 사실 더 심각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난자 제공시 절차상 자발적 동의를 따랐다 하더라도 경제적 빈곤이 실질적 동기라면 그것은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사회에 미칠 파장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문제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와 의료체계 안에서 가난한 여성의 몸의 착취를 유발하는 사태이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적절하고 정당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이의제기가 취재윤리 문제와 국익논리에 따른 공세로 묻혀질 뻔했다. 그런데 진정한 사태의 반전이 진지한 소장 과학자들의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고, 급기야는 이해를 달리하게 된 연구당사자들의 공방으로 표면화되어 그 진실의 실체가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대혼란의 상황과 같다.


그러나 이 혼란의 상황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 연구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를 비로소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연구의 문제를 진단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선용되거나 악용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이다. 의료의 산업화 내지는 시장화 전략은 의료 그 자체를 자본의 논리에 맡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의 고통을 극복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지만, 그 연구가 산업화 내지는 시장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한 난치병의 고통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고통을 야기할 것이다.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경제적 빈곤으로 그 치료 혜택을 누릴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누군가의 치료를 위해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숭고한 자발적 동기가 아니라 경제적 빈곤 때문에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등등의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국익논리를 따르는 성급한 기대와 환호 속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 상황을 헤아릴 지혜가 설 자리가 없다. 추상적인 생명윤리 논의로도 이러한 문제들을 헤아리기 어렵다.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진 혼란의 사태를 제대로 읽고, 진정으로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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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