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ㆍ일 그리스도인의 역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10-09 16:27
조회
3470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ㆍ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정책협의회

2005년 10월 22일(토) / 일본 교토 헤이안교회

崔亨默(대전노회 에큐메니칼협력위원 /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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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ㆍ일 그리스도인의 역할



1. 한ㆍ일관계에서 동북아시아의 지평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와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는 교류협력관계를 맺고 양국 교회간의 이해를 증진하여 왔고, 그 가운데서 공동의 역사 인식을 추구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기 다른 지체로서 서로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양국의 교회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 공동의 실천을 모색하기 위하여 양국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였다.

고대로부터 한국과 일본 양국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고, 특별히 근현대사에서는 단순히 긴밀한 관계로만 말할 수 없는 불행한 역사를 경험하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강점이라는 그 불행한 역사는 과거의 경험으로 그치지 않고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한반도 및 한일 양국간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한일간 공동의 역사인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간 어쩌면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서 한일간 공동의 역사인식을 위해 노력해왔다. 미흡하지만 그간의 진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는 더 깊은 공동의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더 깊은 공동의 역사인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일간의 문제는 단순히 양국 차원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지정학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오늘 우리가 한일관계 문제만을 접근하지 않고 동북아시아 평화 정착이라는 과제를 설정한 것은 그와 같은 인식에 따른 것이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는 동북아시아 내지는 동아시아 평화 정착이라는 과제가 매우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지난 9월에 극적으로 타결된 6자 회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지역 내 국가들간의 중요 관심사일 뿐 아니라 점차 그 연대의 수준을 강화해가고 있는 각국 시민사회의 중요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문제인식은 기존의 냉전체제의 와해와 동시에 전개된 자본의 지구화의 과정에서 일국적 시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에서 제기되었다. 아마도 정부 당국자들과 시민사회의 이해가 다르겠지만, 일국의 범위를 벗어난 동아시아 내지는 동북아시아라는 범주를 설정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에 대항하는 지역적 거점으로서의 의의를 주목하게 된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런데 종종 엄밀한 구분 없이 사용되기도 하는 '동아시아'라는 범주와 '동북아시아'라는 범주는 사실 동일한 지역단위로 설정하기에는 양자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재일 한국인 학자 강상중(姜尙中)과 함께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구상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와다 하루끼(和田春樹)는 그 범주를 엄밀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아세안(ASEAN)과 동일시되는 동남아시아와, 한(남북한)ㆍ중ㆍ일을 중심으로 몽골ㆍ러시아ㆍ미국과 함께 타이완ㆍ오끼나와ㆍ사할린ㆍ쿠릴ㆍ하와이 등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를 구분하고, 양 지역을 통합하는 범주로서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구분은 단순히 지역 범위의 규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양 지역의 역사적 현실적 차이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와다 하루끼는 일본에서 동북아시아를 경시하는 반면 동아시아를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그 차이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는 지역협력체의 틀을 짜기 쉬운 상대로 간주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구미 제국주의와 싸웠던 까닭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전쟁 역사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았고, 또한 전후에 일본은 유일하게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배상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의 외국투자 가운데 일본의 투자가 가장 많다. 그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의 관계는 원만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반면에 동북아시아는 일본에 매우 까다로운 지역이다. 중국과 남북한은 장기간에 걸쳐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받았으나 배상 또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역사 평가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 러시아, 중국은 영토문제로 분쟁중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쉬운 상대들과 협력체제를 구축한 후 거기에 까다로운 상대들을 끌어들이고픈 마음에서 동북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지역협력체를 구축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동북아시아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 중국과 남북한 사이의 갈등, 나아가 미국과 북한과의 갈등, 중국과 미국과의 긴장의 요소 또한 존재하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이 복잡한 문제들을 건너뛰고서는 이 지역의 평화를 수립하는 것은 요원할 뿐이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동북아시아 평화를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복잡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능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이다.



2. 동북아시아 상황의 복잡성과 한일관계의 비대칭성


오늘날 복잡한 동북아시아 상황은 이 지역 내 패권국가들의 세력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강대국 중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의 그 주도세력의 변화, 그리고 여기에 냉전시대의 구 소련과 오늘날 러시아의 역할 등이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서 한반도는 언제나 가장 큰 희생자로서 곤란한 처지에 놓였고, 지금까지도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의 각축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그 세력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로서 복잡한 동북아시아 상황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 복잡한 동북아시아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하는 것이 여기 모인 우리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한일 양국관계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성공회대학의 권혁태(權赫泰)는 평화헌법 개정을 포함한 현재 일본의 우경화와 한국의 민주화 사이에 비대칭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90년대이래 일본이 우경화의 흐름을 타고 전면적인 헌법개정론으로 치닫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내외조건들의 변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 변화조건들이란 미국의 지속적인 헌법개정 요구, 주변정세의 변화, 그리고 일본 내부에서 사회당 등 호헌세력의 몰락 등이다. 미국의 부담을 상당부분 일본에 넘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미국의 헌법개정 요구는 사실 1950년대이래 일관된 것이었고, 그 요구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일본 국회에서 1/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여 비무장 평화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중무장 국가주의로의 전환을 막아 왔던 호헌세력의 몰락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방파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일 양국간의 관계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특별한 주목을 끄는 변화요인은 주변정세의 변화이다. 중국의 대국화와 북핵문제, 그리고 2002년에 불거진 '납치사건'은 일본사회에 군사적 주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민주화와 이에 따른 남북관계의 호전이 일본의 군사주의화를 촉진하는 데 일정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그 동안 미국에 의해 자본주의를 지키는 일종의 '전투기지' 역할을 강제당해 위험부담을 안는 대신에 자금ㆍ기술ㆍ시장을 공여받는 '냉전형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와 민주화의 영향으로 그 동안의 역할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한국 내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기존에 한국 등이 감당했던 위험부담이 일본으로 회귀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본의 군사주의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구도를 형성시켰다. 한국의 반공군사독재정권이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탱하고, 한국의 민주화가 일본의 평화주의를 위협함과 동시에 일본의 우경화를 촉진시키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가져 온 것이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한반도의 존재가 고대로부터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형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현재 한국과 일본의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권혁태의 주장은 그 관계를 당대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를 시사한다. 이 주장은 언뜻 듣기에 일본이 평화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냉전체제와 독재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의 우경화가 당연시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진단은 바로 그와 같은 현실의 비대칭적 관계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데 그 근본 취지가 있다. 소위 상극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고 상생의 대칭성을 확보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일본의 평화주의가 공존하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3. 동북아시아 평화 실현과 시민사회의 역할


최근 6자 회담의 타결은 동북아시아 평화 정착을 위한 장도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자 회담은 사실 국가간의 안전보장과 평화적 공존체제의 수립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를 거꾸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국가간의 협력은 국익의 합치 여부 내지는 이해관계의 절충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국익이 최우선 가치로 통용되는 냉혹한 국가간 관계 안에서, 어떤 국가들간의 대칭적 관계를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이해관계의 타협 지점에서만 드물게 대칭성이 유지될 뿐, 그 관계는 어떤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들 간의 다자간 협력체제나 집단안보체제의 형성은 지역내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세력관계의 균형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동거 내지는 공존으로서 국가간 협력체제를 뛰어넘어 보다 안정적인 공존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 대안의 돌파구는 역시 각국 시민사회의 성숙과 연대일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진전과 그 민주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는 국제적인 시민사회의 연대이다. 최근 후소사판 역사 교과서 채택 저지운동은 시민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국제간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채택률 10%을 목표로 총력을 기울였지만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강력한 저지운동으로 그 채택률이 0.4% 수준에 머물렀다. 현행 제도상 4년마다 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공방이 재연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일단 2005년의 성과는 양국 시민사회에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된 셈이다. 이와 함께 한ㆍ중ㆍ일 3국의 학자들이 공동집필한 『미래를 여는 역사』의 출간 역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수립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민간 차원에서의 이와 같은 노력이 동북아시아에서 안정적인 평화 정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국제적 시민연대는 오늘 동북아시아 각국을 공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 일본은 급격하게 국가주의가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한국에서는 과거의 권위적인 국가주의가 약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주의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의 경우 근ㆍ현대사에서 강대국들의 각축의 소용돌이 가운데 처해 있어 온 까닭에 민족주의는 한동안 사실상 거의 의혹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민족주의는 해방의 이념으로서 역할하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진보적인 민중운동 내지는 시민사회운동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그런 사정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성찰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국가주의와 쉽사리 결합함으로써 억압과 배제의 이념이 될 수도 있다는 반성은 아주 최근에야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의 경우 민족주의는 단일 혈통을 강조하는(그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사실상 국가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평화흥기[和平굴起]', '평화발전[和平發展]'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대국주의로의 회귀 위험성을 안고 있다. 중국의 대국주의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의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벳과 내몽골의 동요를 전혀 용인하지 않고 있으며, 만주지역의 잠재적 동요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고 있어 한국과도 불화를 겪고 있다. 최근에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지만, 주변 양대국에서의 이와 같은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의 강화 추세는 피해자로서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여전히 민족주의에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익의 논리와 쉽사리 동일시되는 민족주의는 평화의 수립을 위한 보편적 가치로서는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진전과 국제적인 연대로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일본은 재일 한국인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일찍이 해외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경험해 왔다. 자본의 지구화 과정이 급속도로 진전된 오늘 한국에서도 해외 이주노동자 문제가 중대한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사회 안에서 낯선 '타인'들과 공존하고 있다. 국경 저 너머에만 타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사정은 한 사회의 내부적 통합 원리마저도 국적이나 민족의 경계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재외 국민에 대한 참정권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사실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장차 자국내 외국인의 참정권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이 비단 일국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 현상들이라는 점은 또 다른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쉬운 예로 환경문제를 들 수 있다. 과거에 자연재해는 그저 자연적 현상으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전지구적 확산으로 자연재해는 더 이상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구체적으로 말해 한국인들은 봄이면 황사현상으로 고생한다. 대기는 더욱 오염되고 있으며 산성비의 문제도 심각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사현상은 지구온난화로 대륙의 사막이 확장됨에 따라 더욱 광범위해짐과 동시에 빈번해지고 있다. 한국의 대기오염은 중국의 산업시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사실은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의 남용이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이에 대한 대처 역시 국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계속해서 강조했다시피 국익을 앞세우는 논리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국익보다는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시민사회의 성숙과 그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이 여기에서 다시 확인된다.



4. 세계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역할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생각하고 성숙한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커다란 자산이다. 그리스도인은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닌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데서 탄생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요청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요청을 따라 거듭난 새로운 주체이다. 유다인으로서, 그리스인으로서, 로마인으로서의 존재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가 훨씬 보편적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보편적인 주체로 거듭난 존재이다.

거듭난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세계시민'이라고 할까?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교회는 '세계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평화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정부 구상을 제안하고 있다. 이 때 세계정부는 단일한 패권을 강요하는 제국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각국의 이해관계를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보편적인 시민권을 신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세계적인 구성체를 말할 것이다. 너무 요원한 꿈일까? 성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희망이란 어차피 불가능성을 안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바라는 역설이 진정한 희망이요 믿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 국익이라는 사이비 보편성을 내세우며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냉혹한 국제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발걸음으로 이미 세계시민으로 역할을 해 왔고 세계정부를 구성해 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미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을 선취해 왔다. 물론 제국과 자신을 동일시해 온 교회의 불행한 역사를 냉정하게 평가해야겠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와는 달리 우리의 희망과 믿음의 근거로서 역할해 왔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그 꿈과 믿음을 구체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가 좁게는 한ㆍ일 관계 안에서, 더 넓게는 동북아시아의 역사적ㆍ현실적 지평 안에서 여러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은 그 꿈과 믿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양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비로소 공동의 첫걸음을 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부단히 공동의 인식과 실천을 모색해 왔다. 지금까지 그렇게 쌓아온 성과들을 근거로 더더욱 진전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이제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숙의를 해야 할 과제이다.*


<참고자료>

姜尙中,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북일관계", 『창작과 비평』, 121호(2003.가을)

* 『日朝交涉 - 課題と展望』(姜尙中 水野直樹 李鍾元 編, 岩波書店 2003)에 실린 「東北アジア共同の家に向けて」의 한국어판.

權赫泰, "일본의 헌법개정과 한일관계의 비대칭성", 『창작과 비평』, 129호(2005.가을)

김경남, "한일양국의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 한일협정의 개정을 통하여", 『교회와 세계』, 236호(2005.가을)

李南周, "동아시아협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창작과 비평』, 127호(2005.봄)

李南周 裵肯燦 朴明林 林源赫, "좌담: 탈중심의 동북아와 한국의 '균형자' 역할", 『창작과 비평』, 129호(2005.가을)

이준규,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영토ㆍ역사 분쟁: 무엇이 동북아 민족주의간 충돌을 자극하는가", 『진보평론』, 24호(2005.여름)

최갑수, "동북아 역사논쟁과 민족주의", 『진보평론』, 22호(2004.겨울)

가야마 히로토(香山洋人), "21세기 동아시아의 화해와 공생 - 전후=해방 60년, 일한국교로부터 40년",『교회와 세계』, 236호(2005.가을)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 "일본정신분석", 『창작과 비평』, 101호(1998.가을)

* 『文學界』 1997년 11월호에 실린 「日本精神分析再考」를 영역 진행중인 저서에 수록하기 위해 저자가 개고한 글 「日本とフ-ュ/日本とラカン」 '日本とラカン' 부분의 한국어판.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역사문제", 『창작과 비평』, 127호(2005.봄)

南方朔, "중국-타이완과 한국, 평화의 연동구조", 『창작과 비평』, 129호(2005.가을)

* 타이완의 시사지『新新聞』 2005년 946호에 실린 「阿扁求救: 山姆叔左右危難」의 한국어판.

Chalmers Johnson, "미국, 중국과 대결에 나서다", 『창작과 비평』, 128호(2005.여름)

* http://www.jpri.org/publiccations/workingpapers/wp105.html에 실린 "No Longer the 'Lone' Superpower: Coming to Terms with China"의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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