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맥아더의 망령에서 벗어나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10-04 00:12
조회
3893
* <뉴스앤조이> 기고문(051003)

(맥아더의 망령이 나까지 괴롭힐 줄이야...! 청탁 압박에 못이겨 썼지만 이래저래 신나는 주제가 아니군요.)



맥아더의 망령에서 벗어나자



서 있어도 그만 사라져도 그만인 동상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 명언과 함께 기억되는 맥아더 장군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의 모습 또한 일품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명장으로 이 땅을 공산화의 위험으로부터 구출해낸 영웅으로서 그의 면모는 사람들에게 흠모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성장한 세대들에게 맥아더 장군은 대개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영웅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던 그 현장에 서 있는 동상이 존폐의 논란에 휩싸였다. 냉전 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그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한국을 구출한 은인의 기념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저 논란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각기 주장을 펼치는 세력들간의 실력 대결양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그깟 동상이 무슨 대수인가? 그 동상이야 서 있어도 그만, 사라져도 그만이다. 양측이 주장하는 바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어떨까? 그 동상을 철거하면 우리 사회 속에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냉전시대의 유물도 사라질까? 반대로 그 동상이 서 있으면 그 덕분에 국가의 안보가 보장될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폐 여부를 놓고 필사적으로 대결을 해야만 하는 사정은 무엇일까? 모든 상징물 내지는 기념물의 의미가 그렇듯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실재가 문제이다. 그 실재와 상징이 별개가 아니라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그 상징을 두고 다툰다.


맥아더 장군의 명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언제나 계속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는 한편으로는 금세기 최고의 군사전략가로 평가를 받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중대한 전략적 오류를 범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개인적인 인물됨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용기와 희생, 애국심과 정직으로 일관한 모범적인 군인으로 평가받는가 하면 자아도취적일 뿐 아니라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엘리트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한편 독선적인 처신으로 무리하게 일을 처리한 경우도 많았고, 2차대전 당시 민주당 정부의 문민우위의 무시하고 수차 갈등을 빚었다. 그로 인해 보수적인 공화당을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고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으나, 그와 같은 성향 탓에 오히려 보수우파의 부담이 되어 대통령 후보에서 좌절을 겪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중에 감당한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이다. 태평양전쟁중 극동군사령관으로 수행한 군사작전에 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전후 일본의 천황을 비롯한 전범을 면책한 일이라든지 한국의 승전국 지위 박탈 등과 같은 사안은 그의 역할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문제들은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도 재평가 받아야 할 문제들이다. 또한 한국전쟁중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에게 은인으로 받들어지게 되었지만, 과감한 그의 전쟁수행방식이 과연 타당한 것이었는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행정부의 견제로 그가 물러나기는 했지만 만일 그가 한국전쟁중 작전을 계속 수행했더라면 전쟁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끝나지 않은 냉전


맥아더의 인물됨, 그리고 특별히 역사적 인물로서 그가 개입된 사건들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 평가는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 현재의 시점에 그가 우리 사회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미국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대중적 공공담론의 영역에서 대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인물에 대한 문제가 오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사연이 무엇인지가 우리의 관심사다.

우리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역사와 현재의 그 유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그를 우리 나라를 구한 은인이라 보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자국의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땅에서 전쟁을 수행한 군인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 현실에서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냉전체제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2차대전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된 냉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동시에 한국의 분단 역시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면 맥아더의 역할은 중요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미국사회 안에서는 그의 처신과 역할이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냉전체제의 최일선에 해당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논란을 할 만한 여유마저도 없었다. 한국을 구해준 은인이자 동시에 단시일 안에 통일까지 이뤄줄 것으로 기대되는 영웅이 미국내 사소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라 견제받아 소환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반면에 분단 자체가 한반도 민중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이뤄진 강대국의 대결의 산물이며, 그 분단으로 빚어진 전쟁으로 한반도 민중 어느 편도 승리자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맥아더의 승리나 그의 과감한 작전 수행은 상대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군사작전으로 다수의 무고한 양민들마저 피를 흘려야 했고, 그 사태가 더더욱 확대일로에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재평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맥아더의 승리를 일방적으로 확대해서 보기보다는 냉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가 미국 행정부의 견제를 받아 소환되어 간 것은 전쟁확산의 억제를 위해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은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체제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맥아더 장군 동상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대립양상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냉전체제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반증하며,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중대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영웅을 추앙하는 삶, 그 도착증


그러나 문제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냉전체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 그리고 남한 내에서의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인물의 기념상을 두고 벌어진 대립양상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영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집착에서 헤어나는 과제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별히 맥아더 장군을 탁월한 전쟁영웅에서 더 나아가 우리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인식에서 그와 같은 영웅에 대한 집착 현상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눈에 보이는 우상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진 우상마저도 철저히 배격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그러한 인식이 과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나로서는 무척 의문스럽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듯하다.

여러 기회를 통해 강조한 것이지만, 사실 한국 기독교가 유감스럽게도 '힘'의 종교로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는 것을 곧 근대화를 이루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국의 길과 통하는 것으로, 또는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 신앙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의심의 여지없이 내면화한 신앙의 논리에서 한 영웅을 절대시하는 도착증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신앙논리 안에서 아무 문제없이 자리잡고 있는 은인 맥아더와 어떤 무속인의 신주로 자리잡고 있는 맥아더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맥아더 장군의 망령에서 벗어나 그를 역사의 한 인물로 돌리는 일과 함께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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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chm1893@chollian.net
전체 2
  • 2005-10-06 21:04
    맥아더의 망령이라기 보다는 원로 목사님의 생령이 아닐까요?

  • 2005-10-07 14:08
    ㅎㅎ 그럴 지도 모르지요. 그 생령이 뭣하러 망령을 부르는지?
    rn때로는 상징적 싸움이 중요할 때도 있겠지만, 현실의 사태를 호도하거나 더 중요한 문제를 망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지요.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