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불행한 책읽기와 사치행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9-30 11:10
조회
3145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스물다섯번째 원고입니다(050930)


불행한 책읽기와 사치행각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책과 음반이 한꺼번에 쌓여 있는 곳이다. 그곳을 나설 때 필요한 책과 음반을 몽땅 챙겨 한꺼번에 싸들고 나서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언제나 달랑달랑한 주머니 사정은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 몇 권 싸들고 나서면 그것으로 뿌듯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강요받을 경우 거의 가차없이 음반을 집어든다. 늘 책과 씨름하며 감당해야만 하는 과제들을 안고 있는 처지에서 필요한 책들을 외면하고 음반을 챙겨 나설 때면 '이래도 되나?' 싶은 심정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사치'라 부른다. 나의 유일한 사치행각이다.

언젠가 내 차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동행한 어떤 분에게 말했다. 그렇게 사치 부리며 산다고. 나에게 책 읽는 일이야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이니 책을 사는 것은 생필품을 구하는 차원이고, 거의 유일하게 엉뚱한 돈을 쓰는 일은 음반 사는 경우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생필품도 다 구하지 못하는 처지에서 대책없이 배부르게 해 주지 못하는 음반을 사고 있으니 사치라 할 수밖에. 그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 "목사에게 음반 사는 일은 사치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신다. 음악을 듣는 일은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니, 스스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맑게 해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목사에게 음반을 구하는 일은 사치가 아니란다. 그분은 수도자였다. 과연 수도자다운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사치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담감을 한순간에 떨쳐내게 해줬으니 말이다.

나의 책읽기는 이중적으로 불행하다. 언제나 과제에 쫓기며 그 과제와 직결된 책들을 찾아 읽어치워야 한다. 책 읽는 여유를 맛보기보다는 책 읽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나마 필요로 하는 책들을 다 챙기지도 못한다. 내 수첩에는 구해야 할 책 목록이 빼곡이 적혀 있지만 한 해 동안 그 절반도 구하지 못한다. 늘 책을 붙잡고 있어야 하지만, 이래저래 늘 허덕여야 하니 책읽기가 행복할 리 없다. 그러니 가금씩 책 구하는 일을 지레 포기하는 사태가 생기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일은 다르다. 듣는 순간 맑고 시원한 생수를 마시는 느낌이다. 전투가 아닌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음악이란 듣고 또 들어야 제 맛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음반 하나를 구하면 몇날 며칠을 차안에서 집안에서 반복해 듣는다. 그러니 구하고 싶은 음반이 많아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궁핍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있는 것 듣고 또 들으면 되니까.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때때로 과감하게 사치행각을 벌인다. 빡빡한 논리 속에 갇힌 감성은 그 덕분에 숨통을 틀 것이다.

나는 어제도 사치행각을 벌였다. 새로 나온 집시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제 또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 하지만 음악이 있어 그 전투가 그렇게 잔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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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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