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 그 고통의 재생산 구조를 넘어서는 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9-30 00:25
조회
3231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5년도 하반기 강좌

'황우석'과 살림의 신학 제1강

2005년 9월 29일(목) 오후 7:30 / 안병무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지난 7월에 발표했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상당 부분 그 내용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 그 고통의 재생산 구조를 넘어서는 길



1. 배아줄기세포 연구,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망각되는 문제들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이에 대한 논란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제기되는 물음이 있다.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물음이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질문 방식은 너무나 단순하다. 문제의 사안 자체가 결코 한두 마디로 잘라 평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은 단순한 대답을 강요함으로써 복잡한 문제의 사안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물음의 배경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믿음이다.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는지 않는지에 대한 관심사에서 '찬성'과 '반대'를 문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그 가치들은 일종의 정언명령과 같은 것이어서 그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다. 문제는 '배아'를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있냐 없냐 하는 것이다. 배아를 인간 생명체로 볼 것 같으면 그것은 인위적인 조작이나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반대의 논거다. 배아를 인간 생명체가 아니라 미분화된 세포덩어리(체세포핵이식 구성체)로 볼 것 같으면 그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이 경우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의 질병치료라는 목적에 제한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허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문제의 구도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의이다. 생명, 정확하게 말해 인간생명이 과연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느냐 하는 것을 따라 배아를 생명체로 보느냐 세포덩어리로 보느냐가 판가름되고, 동시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허용 여부가 판가름된다.

물론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관심, 그리고 그를 둘러싼 윤리적 쟁점은 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윤리적 쟁점은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와 함께,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 등으로 집약된다. 아마도 시민사회와 기독교계가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윤리적 쟁점은 그렇게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윤리적 쟁점은 이 밖에도 또 다른 문제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 문제가 주요 관심사로 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계는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와 함께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신의 창조질서를 거스름과 동시에 인간생명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 제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의제기는, 앞서 지적한 대로 신의 창조질서를 지킴으로써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 전제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야말로 배아가 인간생명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면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허용 여부를 곧 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개 윤리적 논쟁은 그 전제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자 할 때에는 그 전제 자체가 명쾌한 해답을 저절로 주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많은 논란의 여지를 지니고 있고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크게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우선 생명의 신성함이란 모든 형태의 생명에 해당하는 것인지 인간생명에 해당하는 것인지 말 그 자체로는 분명치 않다. 모든 형태의 생명에 해당한다면 그 전제에서 인간생명의 배타적 우월성이 해명되지 않으며, 인간생명에 해당한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의 생명에 대해서는 어떠한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인간으로 한정해 말할 때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상충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명쾌하지 않다.

그렇다면 배아가 과연 인간생명체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어떨까? 생명공학, 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등은 저마다 나름대로 가치기준을 적용해 인간생명의 기점을 제시한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해서는 원시선 형성(수정후 14일)이 중요한 하나의 기점으로 논란되고 있지만, 생명현상 자체가 과연 그렇게 하나의 기점으로 생명과 비생명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까? 현대 과학은 생명 자체가 하나의 연속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정한 기점을 생명과 비생명의 분기점으로 삼는 것은 사실 미리 예정된 결론을 거꾸로 전제하고 임의적인 선택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지, 어느 특정한 순간을 생명과 비생명의 분기점으로 삼을 수는 없다. 생명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생명의 시작과 끝을 더욱 명쾌하게 해명해 줄 수 있을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전통적인 죽음이해와 달리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추세가 장기이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처럼 생명의 시작에 관한 논란 역시 다른 어떤 목적과 관련되어 있을 뿐 생명현상 자체로는 잘라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문제들도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다. 문제의 상황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자명한 전제를 따라 취사선택을 분명히 하면 간단히 문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은 그야말로 '논쟁'의 종결을 가져올 뿐,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은 해결하지 못한다. 더 이상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고 현실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입장은 그 입장대로 각기 제 갈 길을 갈 뿐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편에서는 매우 강력하게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있지만,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 신학, 특히 개신교의 입장은 이에 대한 단일한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윤리적 판단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연구에 참여한 이들은 난치병의 극복이라는 그 나름의 생명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 비록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그 연구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유익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입장은 우월한 윤리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찬성과 반대의 논리 사이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간과해버림으로써 생명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개진했다고 자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를 반대하는 신학과 찬성하는 과학 사이에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빈틈은 신학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방치된 영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그 빈틈은 신학적 생명윤리가 지향하는 목적과는 상반되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방비 상태로 생명공학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 경우 신학은 무책임의 혐의, 심지어는 위선의 혐의마저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그 성과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기대를 안고 있다. 분명한 수요자들의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저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효과적인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제지하기는 어렵다. 물론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통한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연구를 예견되는 위험성을 이유로 쉽사리 제어하기 어렵다. 과학자 개인의 동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역사상 이미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가 폐기된 적이 있었을까? 어떤 유용성이 존재하는 한 이미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는 쉽사리 폐기되지 않는다. 그저 살상무기에 지나지 않은 핵폭탄도 사실상 규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생명을 살리는 목적을 지닌 배아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를 막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냉정하게 말해 과학기술의 성과는 현실의 이해관계를 따라 좌우된다. 우리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위험성을 주목한다면, 그 자체가 생명을 대상화하고 있는지 여부도 따져야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의 이해관계 맥락에서 그 연구 성과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신학적ㆍ윤리적 논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 논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지 않지만, 사실 한편에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듯이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자본의 개입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마저도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전능성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이 그 탐스러운 열매를 가만둘 리 없다. 이것은 사실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벗어나는 차원이다. 과학자들이 가진 순수한 선의와 달리 생명공학적 성과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의해 좌우될 공산이 크다. 특별히 근대 자본주의하에서 과학기술의 성과는 예외 없이 그와 같은 궤적을 밟아왔다. 다시 말해 자본의 전능성은 기필코 그 연구를 진전시킬 것이며 그 연구 성과를 전유하려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의 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란,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 난자제공 여성 문제에 더하여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 가능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우리는 신중하게 모색해야 한다. 단순히 또 하나의 쟁점을 덧붙이는 차원이 아니라 어쩌면 그와 같은 문제의 맥락에서 여러 가지 윤리적 쟁점들을 검토할 때 그 논의들의 한계 또한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2. 생명공학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여러 시각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사안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찬성' '반대'로만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입장들이 우리 사회 안에 공존하고 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논란과 관련하여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생명공학에 관한 태도들을 분류해보는 것은 우리의 판단을 위해 유익할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생명공학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가치문제에 대한 주장들의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이상돈, 『생명공학과 법 - 생명의 공학화와 생명문화의 절차적 재생산』, 아카넷, 2003. 참조). 윤리주의, 과학주의, 규범주의,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물론 이 유형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엇갈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입장의 유형들은 일종의 이념형이라 할 수 있다.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을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는 입장인 반면,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이 둘 사이에 규범주의와 공리주의가 위치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에 다가서는 입장인 반면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입장이다.


1) 윤리주의

윤리주의는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입장으로서 인간의 몸을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윤리화하는 관점을 말한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통일된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체로 일치하는 신학적 관점,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입장도 대체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신이 부여한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든 자연적 질서를 따름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든 이 입장은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 자체를 금기시한다. 이 입장에서는 특별한 경우의 체외수정(시험관아기)이나 장기이식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생명공학적 시도를 부정한다. 이러한 입장을 따르면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거나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명공학의 남용으로 생명 가치의 위계화 내지는 생명 자체의 경시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신적 질서 내지는 자연적 질서의 와해로 대재난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거론되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은 그와 같은 위기의식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달리는 과학기술의 성과 앞에서 의도하지 않게 사실상 윤리적 공백지대를 허용할 가능성이 많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 점은 예컨대 교회가 낙태를 허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신자들은 낙태를 행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우월한 윤리적 권위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실제 생활영역에서 그 윤리적 권위가 무력화되는 양상을 빚어낼 소지가 있다. 이 경우 생명윤리를 내세우는 입장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빚어질 수 있는 위기를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펼치는 호기로 활용할 뿐 사람들이 갈등하는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응답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2) 과학주의

윤리주의와 정반대로 과학주의는 생명공학에 가장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입장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발전과 자유의 성장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생명공학을 평가하는 태도로서 생명공학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한 생명공학을 제재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이성의 자연지배라는 이념을 믿고 있는 이러한 과학주의 입장은 생명공학의 모든 시도를 과학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및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이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뢰는 이미 역사적으로 그 위험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나치의 우생학이나 핵무기의 발명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구화된 이성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까닭에 오늘날 천진난만하게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적어도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배아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의 내적 논리, 그리고 그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과 환호 속에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과학주의가 사실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3) 규범주의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수정된 형태로 대개 국가의 법제화 차원에서 드러나는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의 원칙을 준수한다. 예컨대 종교적 윤리주의가 말하는 창조주에 의해 부여된 생명의 존엄성 주장은 세속화된 국가의 규범에서는 자연법적 차원의 생명 연속성 논증으로 변한다(생명의 신성성에서 생명의 자연성으로). 존엄을 누려야 할 주체로서 인간과 태아 그리고 배아 사이에는 생명의 연속성이 있고 따라서 태아나 배아 역시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윤리주의의 기본 전제를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실제 구속력 있는 어떤 규범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규범주의는 윤리주의와 구별된다. 그래서 '원칙-예외' 구조를 취하여 원칙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지만 특정한 경우에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서 생명공학의 시도를 허용한다. 배아연구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중대한 질병의 치료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폐기될 운명에 놓인 잉여 냉동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한다든지, 시험관아기도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야 하지만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하는 식의 입장이다. 이것은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허점을 보완하는 입장으로서 현실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윤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생명의 연속성 문제는 여전히 자명하지 않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차원에서는 수정이후 생명의 기점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생명의 연속성 논리를 철저화하면 체세포라고 해서 연속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또한 허용과 제한의 기준을 엄격하게 규정한다고 하지만 그 경계 기준도 분명하지 않기에 모종의 허점이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금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 이종간의 착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난자에 동물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금지된 반면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앞으로 더 빈발할 수 있다. 이것은 규범주의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상황을 보여준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구속력을 갖는 규범을 제시하려는 규범주의의 태도는 진지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상태다.


4)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를 말한다. 공리주의는 과학주의처럼 생명과학기술의 자유 그 자체를 목적화하지 않고 생명공학을 통한 인류복지의 증진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을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과학주의적 이상을 유전공학산업을 통한 부의 창출이라는 세계경제적 또는 국민경제적 목적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수정된 과학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주로 생명공학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이나 그것을 산업화하려는 집단, 그리고 유전공학산업의 정책적 육성을 표방하는 정부 관료들이 대변하고 있다. 최근 우리가 언론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담론, 그리고 압도적인 국민적 열기는 바로 이와 같은 공리주의적 가치판단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주고 있다. 공리적 유용성과 국민경제성에 민족주의적 열풍까지 가세된 오늘 우리 사회의 '황색돌풍' 내지는 '황우석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입장에 내재된 문제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공리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이 경험적이거나 실증적인 것이 아니고 이론적이고 가치론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여전히 가설적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경우 그 목적대로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그 난관이 극복되기 이전에는 안전하게 난치병 치료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종교가 허망한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듯이 과학 역시 섣부른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생명공학 그 자체 안에서 난관이 해소된 경우라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바로 난치병을 앓고 그 병의 치료를 간절히 기대하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에게 치료혜택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물론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인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인 또 다른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의료체계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난관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복지의 증진이라는 분명한 목적, 그리고 난치병 치료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적 성과가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혜택이 돌아갈 기회가 제한된다. 실제로 그 치료 혜택을 받은 경우는 일종의 전시효과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까 공리주의적 입장이 표방하고 있는 인류복지의 증진 내지는 난치병 치료라는 숭고한 목적과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목적은 갈등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사실상 배치되고 있다. 이미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다시피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두 가지 목적이 배치될 때 현실에서 어떤 목적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지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경제적 효용성 논리가 우위를 점한다.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윤리적 지평은 사라지고 만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과학주의를 신자유주의와 전략적으로 제휴시키는 입장이라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3. 고통의 재생산 구조로서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를 넘어서는 길


우리의 판단을 위하여 일종의 우회로를 거쳤다. 지금 우리가 접근하고자 하는 문제의 성격이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냉정하고 신중한 접근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도,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여러 견해들도 그 자체로는 결코 악의를 지니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어떤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현실에 주목한다. 특별히 민중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구체적인 현실에서 제기되는 고통의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본다.


1) 고통의 다차원성

고통의 상황에 주목할 때, 우리는 먼저 여러 생명들이 체감하는 고통의 다차원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범주상으로 구별해본다면 개체 생명의 고통, 전체 생명의 고통, 그리고 이와 같은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사회적 생명의 고통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범주상의 구분일 뿐 실제 고통이 일어나는 현상은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고통을 개체의 단위에서 체감한다. 고통의 여러 차원은 사실상 개체 생명의 고통으로 집중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식하는 경우 여타 차원에서의 고통은 실감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오로지 개체의 고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과연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 예민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더 둔감해지는 것일까? 더욱 복잡해진 관계 속에서 타자의 고통에 대해 더욱 민감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바로는 그 복잡하게 얽힌 관계 자체를 망각하는 만드는 기제들 또한 발달하여 오늘 현실의 인간들은 타자의 고통을 관조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은 더욱 둔감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현실의 대부분 사람들은 타자나 그 어떤 대상의 고통을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관련성이 가까울수록 더욱 민감하게 느끼며 반대로 멀수록 둔감하게 느끼거나 아예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고통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개별적 고통 이외에는 아예 문제삼을 것이 없는 듯이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체 생명의 고통과 구별되는 전체 생명의 고통 또한 실재한다. 빈번한 자연적 재난은 전체 생명이 고통을 겪고 있는 반증일 수도 있다. 물론 많은 경우 그 자연적 재난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재난일 뿐 사실은 전체 생명이 자신을 지속시켜나가는 방식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연 내지는 전체 생명 자체가 병들어 고통받고 있는 증상을 우리는 적지 않게 발견한다. 흔히 말하는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특정한 종의 멸절이나 자연적 순환계 자체의 훼손은 그와 같은 전체 생명의 고통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고통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하는 것은 일정 부분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의미 또한 내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상당 부분 이미 경험적 판단의 범위 안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실제로 생물학적 생명의 고통은 많은 경우 사회적 생명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 사회적 생명의 고통이란 인간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고통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서 순전히 개별적 요인을 갖는 고통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말한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고통의 원인, 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더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밝힐 수 있다.


2) 고통 극복과 재생산의 이율배반

앞서 말한 생명공학에 관한 우리 사회의 여러 입장들은 이와 같은 고통의 차원과 관련하여 말하면 각기 나름대로 특정한 고통의 차원을 유념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리주의나 규범주의는 스스로 보호능력이 없는 개체생명(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이 잠재적 생명으로 간주할 뿐인 '배아' 또는 '체세포핵이식 구성체')의 '살해' 행위를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현상 자체에 대한 인위적 개입으로 전체 생명의 고통이 심각하게 야기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논증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검증의 차원에서는 뭐라 단언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대개 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명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명의 기점 자체를 확정할 수 있다는 가설을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어쨌든 그 경고 자체는 충분히 새겨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 주장을 따라 생명공학의 시도 가운데 어떤 것을 허용해야 하고 어떤 것을 제한해야 하는지는 더 깊은 탐구와 성찰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상 순수한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입장은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과학주의는 과학적 연구의 성과로 인간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고통 또한 일정 부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모순된 이중적 효과를 불러왔다는 것은 널리 인지되고 있는 사실이다.

공리주의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고통의 상황을 유념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는 잠재적인 생명체의 권리보다는 "지금 살아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더 절실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며, 안규리 박사는 "외국인 노동자 진료처럼 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의사의 마음"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과학자들의 이 동기 자체를 의심할 까닭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연구에 참여하는 개별 과학자들의 개인적 동기를 벗어난 차원에 있다. 그 공리적 유용성을 빌미로 자본이 개입해 들어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과학자들은 공리적 유용성과 경제성을 한 묶음으로 보아 그 문제를 지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공리적 유용성 곧 수요가 있기에, 그리고 나아가 너무나 수지맞는 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기에 국가와 자본은 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공학의 연구 과정과 그 성과의 배분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경제논리에 좌우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 보듯 뻔히 예측되는 또 다른 고통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분배구조의 불평등성으로 인한 고통이다. 이 고통은 질병 그 자체로 인한 고통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의료기술상으로 치료불가라면 아예 체념하겠지만, 분명히 치료가능한데도 그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오늘 이미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고통의 현상이다.


3)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인한 고통의 재생산

그래서 우리는 공리적 유용성을 볼모로 경제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수없이 많은 쟁점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시급히 다뤄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효용성의 논리가 빚어내는 고통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 이래 과학기술이 국가권력과 자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과학기술, 생명공학은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몸뚱어리 자체를 상품화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장기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시장은 사회경제적 계급관계에 따라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결정되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장기를 내어주는 형국이다. 바로 며칠 전 언론보도에도 나왔지만(<한겨레> 2005.9.24), 현재 일본인의 인공수정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 여성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여성을 위해서 난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조선족 여성들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고통 치유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의술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는 당황스러운 사태를 만들고 있다. 인간의 모든 신체부위가 그렇게 거래되고 그 거래는 사회경제적 계급의 위계관계 안에서 작동된다. 이 때 장기 공급자는 이미 안고 있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더하여 신체적 고통까지 안게 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이 경우 생명공학의 성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의술은 인간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흡혈귀가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 생명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생명의 고통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실용화 단계에 이르면 거대한 난자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나오고 있다. 배아줄기세포의 연구의 성과로 난치병 치료가 실용화되는 단계에 이르면 가난한 여성들의 몸의 착취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당황스러운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원천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일관된 관심은 과학기술 또는 생명공학 성과 그 자체나 그에 종사하고 있는 개별 과학자들의 동기의 범위를 벗어난 차원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우려이다. 개별 생명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길이 또 다른 생명의 재앙으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우려이다. 그 메커니즘을 문제시하지 않고 연구 그 자체만 놓고 '찬성' '반대'를 논하는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 뻔히 예측되는 고통의 문제를 비껴 가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의료체계의 변화와 불균등한 경제적 분배구조의 개선 방안에 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어떤 식으로든 무책임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 무책임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온갖 지혜를 모아야 하고 실제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4) 고통의 재생산 구조를 제어할 수 있는 길

지금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고통 재생산 구조로서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 가능성, 이 당면한 문제의 상황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세계적 차원에서는 거대자본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공적 자금이 투여되는 것 말고는 아직 기업 자금의 본격적인 투여는 없는 것 같다. 공적 자금 투여에 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 자금에 비해 공적 자금은 시민사회의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고, 따라서 연구 과정과 성과의 공공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일까? 현재 상황으로는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공적 자금은 자본의 위험부담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지닌다는 지적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투자 위험이 높고 아직 상품화가 불확실한 경우에 대개 공적 자금의 연구비가 투여되고 있을 뿐, 연구 성과가 고수익의 상품화로 이어질 경우 곧바로 본격적인 자본이 투여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 경우 우리가 앞에서 우려한 대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좌우될 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서 고유한 자기 완결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에 사회ㆍ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견해다.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를 우려하는 것도 사실은 그와 같은 견해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은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것과는 다른 사회ㆍ문화적 요소가 결합할 경우에는 특정 과학기술의 성격 자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생명공학에 대한 시민사회의 민주적 개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은 과학 전문가나 과학 생산자에게만 맡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 소비자 혹은 일반 시민의 '평범한 지식'을 중요하게 여겨 이들의 지식을 과학적 연구의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 어떤 분야이든 예외일 수 없겠지만, 일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이 큰 분야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특별히 심각한 사회적ㆍ윤리적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생명공학 분야는 더더욱 비상하게 시민사회의 민주적 개입과 통제를 필요로 한다.

물론 시민사회의 민주적 개입이 그야말로 합리적인 대화 수준에서의 합의와 통제로만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절차만으로 권력과 자본이 개입된 생명공학 연구를 적절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순진한 기대일 것이다. 심각한 갈등의 상황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경주되어야 한다.



4. 신학적 논의의 진전을 위하여  


이상 살펴본 내용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야기하고 있는 사회적ㆍ윤리적 문제를 충분히 다룬 것은 아니다. 지금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의, 특히 신학 및 기독교 윤리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의 측면만을 부각시켜 말한 것뿐이다. 상대적으로 예측이 용이한 문제의 측면만을 말한 셈이다. 물론 예측이 용이하다고 해서 그 해결 방법도 용이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불 보듯 뻔히 보이는 상황을 간과하고서 다른 문제들을 이야기하기 어렵기에 먼저 서둘러 말한 것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산적해 있다. ①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생명 자체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계속해서 다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이나 생명윤리를 제기하는 이들이나 공통적으로 생명에 단절적인 분기점이 매우 분명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으나 그러한 인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앞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생명현상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볼 때 윤리적 논란의 중대 사안이 되고 있는 생명의 시작 기점에 관한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어떤 윤리적 논거를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② 생명의 분기점이 명확하다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특별히 생명공학에 종사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유전자 환원주의의 문제도 성찰의 대상이다. 유전자에 의해 생명의 미래 자체가 예정되어 있다는 인식은 사실 인간복제의 위험성을 말하는 윤리적 논의에서도 은연중 공유되고 있다. 인간 유전체에 관한 연구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20세기 유전학의 예상을 오히려 뒤집었다. 생명체는 유전정보에 의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외부 환경과의 알 수 없는 상호작용에 의해 다양한 형질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현상에 관한 지식은 너무나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③ 인간 생명과 여타 생명간에 어떤 차별성이 있으며, 어떤 점에서 인간 생명이 배타적으로 존엄성을 갖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④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필수적인 과제이다. 신의 섭리라는 차원에서든 자연적 질서라는 차원에서든 개체 생명의 삶과 죽음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이다.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어떤 조건에서 고통이 되는 것일까? 받아들일 만한 고통이 있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예를 든 것에 지나지 않지만,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과제들에 대해 신의 창조의 의미와 더불어 다시 성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우리는 지금 뜻하지 않는 '신대륙'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을지 아니면 좌초할지 우리는 지금 불안하다. 그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온갖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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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은 선진국 생명윤리는 후진국"(박상은 원장과의 인터뷰), 『복음과 상황』163호(2005.7.1)

* 그 밖의 일간지 및 주간지 등의 여러 관련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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