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농사꾼이 보면 기가 차서 웃을 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9-07 14:10
조회
3076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스물다섯 번째 원고입니다.(050907)


농사꾼이 보면 기가 차서 웃을 일


이제 한숨 돌렸다 싶으면 그 다음 일이 줄줄이 대기하는 삶을 사는 터라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텃밭 농사도 돌볼 겨를이 없어 잡초만 무성해진다. 몸뚱어리만 농촌에 있을 뿐, 교회도 생활도 모두 도시 공간에 매여 있으니 도리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도 농사란 때를 놓쳐버리면 꽝이니 아예 포기할 요량이 아니라면 최소한 때를 맞추는 '예의'는 필요하다. 자그마한 텃밭에 뭘 심으면 얼마나 심겠는가! 그래도 때마다 몇 가지 작물만은 꼬박꼬박 심는다. 고추, 상추, 토마토... 등등.

무더위가 물러갈 즈음이면 심어야 할 것은 김장용 배추다. 닷새마다 열리는 아우내 장터에서 배추모종을 사왔다. 배추모종을 심자니 무성한 잡초부터 제거해야 하는 일이 심난하다. 하지만 그까짓 것! 손바닥만한 텃밭 가운데 코딱지만한 한 귀퉁이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별 대수겠는가? 그야말로 고양이 세수하듯 딱 필요한 구석만 잡초를 제거하고 밭을 일구어 또박또박 배추모종을 심었것다. 소요된 시간으로 치자면 이래저래 한시간 반 남짓 걸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햇볕이 쨍쨍한 탓인지 온 몸에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현기증에 눈알이 핑그르르 돌기까지 한다. 한낮인데도 하늘에 별이 번쩍번쩍 하는 느낌이다. 냉장고 안 시원한 물 한잔으로 한숨 돌리고, 곧바로 시원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니 살 것 같다.

농사짓는 우리 박집사 보면 기가 차서 웃을 일이다. 그래도 나로서는 큰 일 한 건 치른 셈이다. 이제 배추모종은 보나마나 거두어들일 때까지 거의 손도 못 댈 것이다. 진짜 자연농법에 내 맡길 테니까. 배추벌레에다 달팽이까지 가세해 이파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리고 왜소한 배추포기이지만, 그래도 늦가을이면 텃밭 한 귀퉁이를 꽉 채운다. 비록 볼품은 없어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어 나로서는 그 배추를 최상품으로 친다. 작년에는 그 배추를 가지고 교회 김장까지 했다. 농사 짓는 집에서 같으면 대부분 파치로 버릴 것들을 트럭으로 실어 나르라고 해 우리 박집사 기가 차서 웃었다. 올해도 또 그렇게 기가 차게 만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심자마자 곧바로 한바탕 비가 내려 이놈들 뿌리를 제대로 내린 것 같다. 여전히 볼품없는 놈들이 될지 제법 탐스러운 놈들이 될지 두고 보시라!  

있는 땅 놀릴 수 없어 심심풀이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야겠지만, 그래도 나에게 텃밭농사는 나름대로 그럴 듯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때를 맞춰 농작물을 기르는 재미를 맛보는 것이요, 또 하나는 맨날 혹사당하는 머리를 굴리는 대신 잠시라도 몸을 움직여 머리를 쉬게 해주려는 것이다. 알량하게 농사짓는답시고 때를 분별하며 오묘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말하면 과대망상일까? 그 거창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 해도 상관없다. 늘 뒤엉킨 것 같은 뇌리, 복잡한 심사를 잠시 흐르는 땀방울로 씻어내는 기회 삼는 것만으로도 자그마한 텃밭 농사를 만끽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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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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