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쉿! 비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47
조회
3340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열여섯번째입니다(050401).


쉿! 비밀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침 편지지가 이것밖에 없네요. 왜 이렇게 큰 걸까요. 쓸 말도 없을텐데...ㅎ. 초등학교를 안 다녀도 되니까 진짜진짜 좋은데 중학교는 정말로 가기 싫어요. 공부라는 것을 해야하기 때문이려나. 방학 동안 안 써서 그런지 안 그래도 더러운 글씨가 더 드러워져버렸어요. 못 알아보셔도 몰라요. 흐흐. 정말이지 졸업식 연습할 때 너무 지루해요. 대충 하면 어때서 그러시는 건지. 교감선생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시고... 특히 어른들 말씀하실 때가 제일 싫어요. 결국은 다 똑같은 내용 가지고 얘기하면서 뭐 그리 말씀이 길고 긴 건지. 그리고 송사랑 답사도 순 뻥들뿐이고. 받을 것만 받고 후딱 끝내면 좋겠어요. 내용이 참 엉뚱한 것들만 있네요. 선생님 6학년 일년동안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도 어쩌다가 우리 학교를 오게 되셔서 참...ㅎ. 졸업해도 언제 한번 놀러갈게요. 애들 몇 명이랑 같이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되면 집으로도 놀러 갈게요. 그럼 졸업식날이랑 나중에 봬요."

이거 공개하면 큰일나는 편지인데 아빠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심 끝에 공개를 한다. 지난 2월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우리 둘째 녀석이 선생님께 보낸 편지다. 엄마가 선생님 선물을 보내면서 편지 한 통 쓰라고 했더니 아 글쎄 이렇게...! 살짝 열어본 엄마가 걱정스러운 투로 그냥 보내도 되겠느냐고 하길래, 나는 어찌 검열을 하느냐며 그냥 보내도록 했다. 기성세대의 순치 의도에 아랑곳없이 그렇게 진솔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가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자식을 키우는 데 염려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강력한 규율의 통제 속에서 학교 생활을 하는 녀석들에게 어쩌면 교회생활은 또 하나의 속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우리집 두 녀석은, 남들 늘어지게 늦잠 자는 일요일마저 엄마아빠를 따라 이른 시간부터 교회에 나서야 하는 일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언젠가 큰 녀석은 엄마아빠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기도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흉악한(?) 항변을 한 적도 있었다. 목사 아빠로서 당황할 노릇 아닌가!

엄마와 아빠는 당돌한 딸을 설득하는데 꽤나 진땀을 빼야 했다. '엄마 아빠가 믿는 하나님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대개 그런 취지로 설파를 했고, 다행스럽게도 딸들은 뭔가 다른 엄마 아빠의 신앙을 이해하려는 듯한 태도다. 여전히 일요일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따라나서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들의 그런 고충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규율과 속박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자기 표현의 소중함을 스스로들 체득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다. 둘째의 맹랑한 편지는 그래서 오히려 가상해 보인다. 앗! 그러나 그 편지가 공개되었다는 것이 아직 알려지면 안 된다. 당분간 우리집에서 이번호 <주간기독교>는 금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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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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