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와 미국 보수 기독교와의 유사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33
조회
4111
* <공동선> 2005. 1-2월호 원고(20041207)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와 미국 보수 기독교와의 유사성

- '시청앞'에서 '기독교사회책임'에 이르기까지      


최형묵(목사, 천안살림교회)


1. 기민해진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행보  


한동안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정치 사회적 현실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마치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앙의 내적 차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현실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비판의 진의는 아니었다. 현실에 대해 교회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실적 불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의 의식을 잠재운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도 진실은 아니었다. 한국의 보수 교회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역대의 부패한 정권과 타협 내지는 협력을 해왔다. 침묵을 지킴으로써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책에 은밀히 동조하는가 하면 때로는 국가 조찬기도회 등과 같은 형태로 공공연하게 협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드러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입장은 정교분리의 원칙이었다. 공공연한 조찬기도회마저도 애써 정치적 성격을 부정하고 종교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 사이에는 구체적인 정치 사회적 사안에 대한 입장 대결보다는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참여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와 같은 논란은 불필요해진 듯하다. 이제는 오히려 보수 기독교의 노골적인 정치적 행보가, 과거 정치적 집단으로 오해받았던 진보 기독교의 행보를 무색하게 하리만큼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 행진이 광화문을 뒤덮을 때, 그것을 보고 놀란 한편의 기독교인들은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며 서울 시청 앞으로 나섰다. 교회 안에만 갇혀 있는 줄로 알았던 보수 기독교인들의 가두 진출은 이제 도도한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을 정도다. 대형교회의 목사들과 그 신도들이 길거리에 나섰던 초기만 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극우 단체들의 가두 시위와는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아마도 그 때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집회가 정치적이 아니라 종교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외치는 대열에서는 서로를 전혀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굳이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보수 기독교의 가두 정치적 집회가 하나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되어가고 있는 와중이었던 지난 총선 시기에는 더욱 분명하게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의지를 천명한 정당이 출현하기까지 했다. 한국 기독당의 정치적 실험은, 밖에서 예견했던 대로, 그러나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1.1%의 참담한 득표율로 일단 좌초를 했다. 그러나 기독교 정당의 시도는 그 한 번의 실패로 그 의지를 접을 것 같지는 않으며, 보수 기독교 세력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는 기독교사회책임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민간단체(NGO)가 등장하였다. 스스로 '보수'를 부인하고 '중도'를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단체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아도 앞서 말한 두 경우와는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는 그렇게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가두집회 및 기독교 정당과는 일정정도 구별하고 싶어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 같지 않다. 보다 더 '세련된 보수'라고 이름하면 좋지 않을까? 시청앞 집회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천명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몰이성적인 광신적 집회로 보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정당의 정치권 진출 역시 여러 가지 현실적 여건상 만만치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사회책임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 사회적 현실 개입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한국 보수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이 표방하는 한국의 '선진화'라는 구호는 사실상 보수 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련의 한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행보 저변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하나의 신앙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깔려 있다.


2.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신앙의 실체


흔히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를 말할 때 그 신앙을 근본주의로 지칭한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서 및 교리에 대한 문자주의적 집착이라는 면에서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그와 같이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라는 말로는 사실상 정치 사회적 실체로 존재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는 보수 기독교 세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근본주의적 신앙관과 정치 사회적 견해가 항상 등식관계로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실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행보를 근본주의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보다는 사회 정치적 현실 지형에서 차지하는 입장에 주목하여 그 공통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류 한국 기독교를 보수세력으로 묶어 두는 주요인이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보다는 정치 사회적 견해에서의 보수성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 설명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정치적 태도라는 것은 정치 지형에 따라 유동적이기 때문에 특정 세력과 그 정치적 태도를 어떤 시대를 통틀어 도식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정치적 태도를 결정짓는 비교적 일관된 어떤 입장의 틀이 있다면 그것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 유용하다.

그 점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어떤 의식에 주목한다. 그것에 대해 이름을 붙인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신앙'이라고 할까? 바로 이 구호 앞에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의 사고를 중단하는 것 같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의식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와 같은 의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당대의 한국인 자체와 의식을 공유한 까닭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군대의 파병에 대해서는 그와 동일한 비율을 이루지 않고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여론 조사의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당수가 바로 '국익'의 논리를 당연시하는 결과이다. 매번 선거에서 계층적 이해관계와 괴리된 결과가 재연되는 것도 같은 사연이다. 그와 같은 의식을 공유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일상적으로 되풀이한다.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난 다음 그보다 상위의 목표로 설정되는 최고의 기도는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다. 그것을 뛰어넘는 인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시청앞 집회, 체육관 기도회, 기독교 정당, 한기총, 그리고 최근의 기독교사회책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공통된 의식의 범주는 모두 '나라와 민족'이다. 말 그대로 '나라와 민족'이라 하든, '구국'이라 하든, '한국'이라 하든 그 표현의 차이는 의미 없다. 사실은 이른바 한국 진보 기독교도 그 인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한국 기독교는 거의 예외 없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결국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의미 없는 것일까? 보수와 진보, 또는 좌우 구분 자체가 상대적인 만큼, 그 안에서도 편차는 존재한다. 나는 그 기준을 나라와 민족이라는 인식 범주 내지는 가치 기준에 대한 비중의 차등성이 중요한 하나의 판별기준이라 본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에 대한 태도에서 그 의미 있는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은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국가의 안보를 걱정한다. 그래서 체제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은 그 법이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국가나 체제보다는 인권을 중시한다. 이 사안 하나에 대한 태도로 보수와 진보를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태도에서 체제에 대한 관심과 인권에 대한 관심으로 대별되는 차이점이 분명히 의미있게 드러난다. 비록 한국 진보적 기독교 역시 나라와 민족이라는 인식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가난한 민중에 대한 관심,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 등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다. 그 점에서 진보적 기독교는 자기중심적 가치에서 이탈하여 이타적인 가치, 보다 보편적인 가치로 향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기에 '진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보수 기독교는 도무지 그 가치에서 이탈할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보수'로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고 표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대의를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확대된 나로서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에 지나지 않는다. '확대된 자기의식'으로서 '우리'를 중심으로서 하는 사고는, '나'보다 힘있는 '우리'에 대한 의존을 속성으로 한다. 더욱이 그것이 권력을 매개로 해서만 존속가능한 국가로 귀착되는 경우에는 더더욱 분명하다. 그것은 일말의 공동체성과는 상관없는 집단주의의 표현이요, 가장 강력한 힘에 대한 귀속 의지의 표현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신앙의 실체는 힘에 대한 숭배이다. 국권을 빼앗기고 민족을 경계로 하여 부당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일제강점기에 그와 같은 의식은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부정당한 자기 존재를 찾기 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오늘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것이 자명하게 외쳐지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빌미로 한 자기 욕망의 확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속성이 변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 욕망 충족의 영역을 확장해갈 뿐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친미성향, 아니 미국에 대한 의존 현상은 그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3. 미국 기독교는 역시 우리의 귀감(?)


참 이상한 일 아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성조기가 나부끼는 현상 말이다. 흔히 애국주의적 집회라면 자기 나라의 깃발을 흔들며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만천하에 과시해야 할 텐데, 한국 기독교인들의 애국 집회에서는 성조기가 항상 함께 나부낀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신앙의 실체가 힘에 대한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알고 나면 그렇게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 나라와 민족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고 부강하게 해줄 후견인으로서 미국을 찬양하고 그 국기를 흔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국가경쟁력의 강화를 위해서라면 영어 공용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언론 및 그 논객의 주장과도 동일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미국을 선망하는 것은 미국이 비단 선교 모국이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 기독교를 전해준 나라는 미국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미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한국 기독교에서 유독 미국 선교사의 선교 기점만이 중요시되고 미국만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그것은 해방 이후 미군정기를 거쳐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과 관계가 깊고, 특별히 최근에는 그 미국이 세계 유일의 최강자라는 사실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매우 단순한 논리에 따른 것이다.

최근 등장한 기독교사회책임은 그와 같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세련된 보수'는 길거리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것과 같은 유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뭐라 불릴까 가뜩이나 신경을 쓰며 눈치를 보고 있지만, 이미 그 속마음을 읽은 동지들은 서슴없이 '뉴라이트'(new right)라 이름 붙이며 반기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그렇게 부르며 환영하였다. 낡은 보수가 아니라 새로운 보수인 만큼 행태상 새로운 면모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선진화'라는 그 핵심적 목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신앙이 정당화해 온 국가주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실상 현실적 힘의 논리를 가장 중요한 무기로 삼을 것이라는 예단을 확증시켜주기에 부족함 없다. 그 행보는 무엇보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세력의 행보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 그 출범시기가 기독교 보수세력의 성원으로 부시가 재집권에 성공한 시점 직후인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바로 한국의 기독교 보수세력이 미국의 기독교 보수세력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는 하나의 방증근거이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기독교 보수세력의 등장은 미국에서의 기독교 보수세력의 득세 과정을 매우 압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는 초기에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나름의 대중적 운동방식으로 보수적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 정치 참여를 꺼려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엘리트 집단을 공략해나가 최근에는 유력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보수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 과정은 20세기 현대사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반면 한국의 보수 기독교 보수 세력은 근래 몇 년 사이에 그 과정을 단숨에 밟아가고 있다. 마치 압축적인 경제의 고도 성장을 재현하듯이 보수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의 추이도 그런 양상을 밟아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분명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은 물론 한국의 다종교 상황이 미국과는 판이하기에 동일한 과정을 밟으리라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종교인구 비율로는 그다지 높지 않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한국의 기독교 보수 세력이 미국의 기독교 보수 세력의 정치적 행보를 그대로 빼어 닮을 가능성 또한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그 등장과정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는 방식의 유사성 또한 예감케 한다. 아마도 '도덕적 다수'를 표방하는 미국의 기독교 보수세력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사회책임의 현재 인적 구성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기독교 보수 세력 또한 다분히 그와 동일한 방식을 추구할 것이다. 출범단계인 현재로서는 국가의 위기라는 거시적 인식만이 강조되고 그에 따라 단순화된 한국의 선진화라는 목표 정도를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지만, 앞으로 추이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 사회적 의제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표방할 것이다. 예건대 근래 한기총을 중심으로 표명되었던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의사 표현은 이들에게서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든가 주5일근무제, 동성애 등에 대한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거부감이 원색적으로 표출된 바 있고 지금 국가보안법 존폐 문제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인데, 이러한 사안들에 대해 매우 합리성을 띤 것으로 보이는 의견들이 제안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기독교 보수 세력 역시 '도덕적 다수'를 자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와 같은 의사를 반영하는 정권의 창출을 기대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제 한국의 기독교 보수세력은 은밀한 정치 행위에서 벗어나 공공연한 정치 행위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성패 여부는 그들만의 의지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란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대와의 상호관계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보수세력의 정치적 행보를 바라는 보는 시선은 객관적 관찰자의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도덕적 다수'를 자임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주목하며, 그것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이 때 우리의 입장에서 분명한 것은 힘에 대한 숭배는 결코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며 체제나 국가의 수호 역시 기독교 신앙과 관련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힘의 우위를 신봉하는 체제가 빚어낸 빈곤과 전쟁, 그리고 인권의 유린과 소외의 상황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으로 접근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이며 보편적인 과제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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