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무함마드를 따라서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보기』 옮긴이 후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39
조회
4317
* Carl W. Ernst, Following Muhammad - Rethinking Islam in the Comtemporary World,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3. 번역 후기입니다. 현재 편집작업중으로 도서출판 심산문화사에서 조만간 출간될 예정입니다.



『무함마드를 따라서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보기』


옮긴이 후기


9.11 테러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에 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 진상을 알 수 없지만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간주된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 그들을 비호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미국의 보복 공격, 그리고 이어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사태는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신문과 방송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소식들 덕에 이슬람과 무슬림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친숙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련의 계기 속에서 소개된 이슬람 세계와 무슬림들의 모습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대중매체에 비췬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 아니면 비합리적 열광주의자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 역시 일반적인 종교들과는 달리 매우 불합리하고 전투적인 신앙을 요체로 하고 있는 것인 냥 오도되고 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그래도 이슬람을 바로 알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 이슬람 문명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지고 국내외 학자들의 이슬람 소개서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중동붐'이 한창이던 시절 일찍이 이슬람에 대한 소개가 충분히 이루어졌을 법도 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현실을 감안하면 뒤늦게나마 당대의 중요한 하나의 문명에 대한 바른 이해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칼 W. 언스트의 『무함마드를 따라 - 오늘의 세계에서 이슬람 다시 보기』는 그와 같은 이슬람 바로 알기의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하나의 저작이다. 저자는 오늘날 비이슬람권 세계에 알려진 이슬람상이 서구인들의 선택적 건망증에서 비롯된 일종의 짜깁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인들이 그려낸 이슬람 이미지 내지는 동양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유럽의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이슬람의 이미지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며 의문을 제기한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그려진 이슬람과 무슬림은 언제나 변함없는 고정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의 다른 종교들이나 그 신도들과는 달리 어떻게 무슬림들과 그들이 믿는 이슬람만이 세계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어 고정된 채 지속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 당연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이슬람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방식을 채택한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이슬람 역시 역사적 맥락 속에 있다는 관점이다.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어 시공간을 떠나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명백히 갈등하는 인간 사회 안의 종교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이슬람을 신봉하는 무슬림들 역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존재이다. 그들은 특정한 종교의 신봉자이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갈등하는 인간인 것이다. 결국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 역사적 존재로서 무슬림은 그 존재방식의 다양성을 함축한다. 고정된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역사적 접근법을 따라, 유럽의 남동부와 아프리카의 서부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유럽과 미국의 중심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존재하는 다양한 무슬림들의 존재, 그에 따른 다양한 이슬람의 면모를 밝힌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인들이 그리고 있는 바와 같이 단일한 이슬람, 단일한 무슬림의 이미지는 결코 실제와 동일시 될 수 없는 허상임이 밝혀진다.

역사적 접근방식과 함께 저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기술적(descriptive) 접근방식이다. 규정적(prescriptive) 접근방식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기술적 접근방식은 특정한 종교 내지는 특정한 분파 내부에 있지 않은 국외자에게 가장 적합한 하나의 접근방식이다. 종교 내부의 당사자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규정적 접근이 당연시될 수 있으나, 그것은 그 특정 종교 내지는 분파들의 특정한 입장만을 대변함으로 역사적 실체로서 종교를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 따라서 다양한 역사적 현상적 형태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치 판단에 앞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전하려는 기술적 접근이 요구된다. 그것은 각종 편견으로 이슬람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다양한 이슬람의 전모를 밝혀주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밋밋하게 이슬람에 관한 사전적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문제의식은 이슬람에 관한 서구적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칫 이 책의 시도 자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본의 아니게 결국 그 서구적 편견에 반립하는 이슬람 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슬람의 전모를 드러낸 것으로 오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그런 과오에 빠지지는 않은 것 같다.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적 접근방식과 동반하고 있는 그 일관된 문제의식은 이 책 전반에 걸쳐 긴장도를 끝까지 유지시켜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아마도 독자들은 스스로 의아해했던 바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전개방식은,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따분한 교과서적 접근방식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 세계의 일부로서 이슬람에 접근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저자가 당대 세계의 일부로서 이슬람에 접근하고 있는 의도는 주에 달려 있는 방대한 웹사이트들이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그 긴장감 넘치는 접근방식과 함께 실로 방대한 내용을 간결하게 집약하여 이슬람에 관한 전모를 두루 섭렵할 수 있도록 해준 것도 흥미를 더해준다. 기본적으로 예언자 무함마드를 중심에 두고 접근하고 있지만, 오늘날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이슬람 국가 개념과 여성들의 베일착용 문제 등을 포함한 당대의 여러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수피즘의 영성 세계와 대중문화 차원의 여러 예술적 표현양식에 대한 소개는 비단 특정한 종교에 대한 관심을 떠나서라도 매우 흥미롭다.


기독교 신학을 하는 역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번역한 일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수반한다. 먼길을 떠날 때면 항상 그 교차되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결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떠나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의 기억은 사라지고 그 여행의 보람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찬다. 마치 그런 느낌이다.

통념상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전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인식 기반에서 서구 문명은 흔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곧 성서의 예언 전통과 그리스의 철학 전통이라는 두 가지 기둥을 골간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들은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원천만은 아니다. 그 두 가지 기둥은 이슬람 문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꾸란에 나와 있듯이 무슬림들은 유대교인 및 기독교인과 함께 자신들을 '성서의 백성들'이라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성서 꾸란은 히브리 성서와 기독교의 성서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신학과 윤리 사상은 그리스 철학을 커다란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서구 세계에 라틴어로 소개된 그리스 철학의 고전이 사실은 아랍어 번역본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균적인 서구인들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중세 기독교 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가 읽은 그리스 철학의 고전들은,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옮겨진 것을 다시 유대인들이 라틴어로 옮긴 것들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문명간의 관계의 본질이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사무엘 헌팅톤은 문명의 충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 내지는 미국 중심의 위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을 바로 보자면 문명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발전하고 공존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간의 관계 역시 그와 같은 교류와 공존을 중요한 기축으로 하여 왔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해주고 있다. 그것이 서로 별개이고 이질적이어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 또는 한편의 우월한 문명이 열등하고 쇠락한 문명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은 지극히 일방적인 억견일 뿐이다.

기독교 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신앙의 요체를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절대자에 대한 관심은 사실은 낯선 곳, 낯선 이들을 향한 관심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병행시키는 성서의 요체는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 서슴없이 이 '이방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악의 축'과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이 흉흉하게 떠도는 오늘 세계 현실에서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태도를 이 책은 시사해주고 있다.


2005년 2월 옮긴이 최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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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를 따라서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보기』


칼 W. 언스트 지음

최형묵 옮김


목차


한국어판 서문

원판 서문


제1장 서구의 시각에서 본 이슬람

당대 세계 일부로서 이슬람

중세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반이슬람적 태도들

이슬람에 접근하면서 편견을 극복하는 길


제2장 종교적 차원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접근

이슬람과 근대적 종교 개념

이슬람, 그리고 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

국가와 수적 규모로 정의된 이슬람

이슬람의 종교적 언어


제3장 이슬람의 거룩한 근거들

예언자들의 봉인: 예언자 무함마드

하느님의 말씀: 꾸란


제4장 세계 안에서의 윤리와 삶

이슬람의 종교적 윤리

윤리의 한 근거로서 그리스 철학

식민지 시대 이슬람의 윤리

칼리프 통치의 종언과 이슬람 국가 개념

이슬람의 모범과 실제 근대 국가

자유주의적 이슬람

양성과 베일착용 문제

이슬람과 과학


제5장 실제로서의 영성

초기 수피즘과 신비 체험의 수련

시아파의 영성

후기 수피즘

이슬람 예술은 무엇인가?


제6장 후기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생각하기

동양과 서양을 넘어서

이슬람의 새로운 이미지들

이슬람과 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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