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부재함으로 더 큰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 죽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31
조회
3606
* <활천> 2005년 1월호 원고



부재함으로 더 큰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 죽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생전에 만난 적이 없건만...


참 묘한 인연이다. 생전에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채희동 목사,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정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땅을 떠나던 날 밤 여기저기서 그의 부음이 전해져 왔다. 처음 전화를 받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영전을 찾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작 망설였다. 그렇지 않은가. 지인의 부모나 가족이 돌아가신 경우에는 생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어도 문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흔한 일이지만, 생전에 본인을 만난 적도 없거니와 그 가족은 더더욱 알 턱이 없으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또 전화가 왔다. 그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비로소 나는 그의 영전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그와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알고 나에게 소식을 전해줬던 것이다. 내가 그와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나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나의 착각일까? 그의 빈소를 찾았을 때 정작 주인공과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첫 대면이었지만, 짐작했던 대로 이미 구면인 여러 친구들이 와 있었다. 넉살 좋은 한 친구는 말하기를, 다른 친구들이야 식상해 있지만 처음 그렇게 만난 나를 채 목사가 가장 반겼을 것이란다. 그의 맑은 영혼의 기운이 나에게 전수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이래저래 착각에 착각이 겹쳐 하늘과 땅의 경계를 뛰어넘은 만남을 경험한 셈이다. 그의 빈소 곁에서 하룻밤을 몽땅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러나 그 만남이 착각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깊이 들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부리나케 그의 부음을 나에게 전해줬던 것일까? 며칠 지나서야 알았지만 내가 부음을 받은 것은 그의 임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나에게 소식을 전해준 이들은 평소에 쉽게 만나기 어려운 먼 거리에 있는 이들이었다. 마음으로야 언제나 가까이 있는 이들이지만, 강원도 산골, 그리고 남도 땅끝 가까이 있어 물리적으로 머나먼 곳에 있는 이들이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도 문제가 되지 않을 판이니 그까짓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어쨌든 이 친구들의 연락을 받았다지만, 자칫 멋쩍을 수도 있는 자리에 이내 선뜻 마음을 먹고 내가 나설 수 있었던 사연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영전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 시대 한 생각


나에게 부음을 전한 친구들의 착각 아닌 착각은 고인이 된 친구와 내가 걷는 길,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걷는 길이 한 길이라고 자명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뭐라고 할까? 일종의 '동시대적 인식' 탓이었다.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갖고 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갈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시대를 살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생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양을 우리는 늘 접하고 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떤 회사의 광고 문구였다. 얼마 전 일부 대학의 고교등급제가 사실로 확인되고 난 다음 그 속설은 바뀌었다고 한다. "2등은 시끄럽다"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사라지고 "개천에는 지렁이만 있다"는 속설도 회자된다. 그러니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좋은 대학을 가고싶어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탓할 수만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은 누구나 일등이 되고 싶고 누구나 주류에 끼고 싶은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경쟁과 효율이 이 세상을 작동하는 최고의 원리인 냥 생각한다.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거슬러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오늘 그렇게 "아니오"를 외친 '동시대적 인식', 그 점에서 우리는 한 길을 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분명하게 그 길을 걸었던 한 친구의 죽음을 맞이해 그 길을 함께 걷던 친구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나를 그의 영전으로 불렀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이런 소회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를 그 반열로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채희동 목사,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 나에게는 그와 함께 나눈 추억의 편린들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곁눈질로 그의 글들을 몇 편 읽어 그와 생각을 함께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종종 아는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한 인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인상은 '맑은 영혼' 혹은 '고결한 영혼'이라는 그 한마디가 가장 압축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의 맑은 영혼은 세상의 혼탁함을 용납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죽음에 이르기 전 펴낸 책제목은 『걸레질하는 예수님』이었다. 그는 세상을 맑게 하는 영성으로 가난한 마음을 말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가난한 마음은 그분의 삶 속에 그대로 드러나서 세상을 청빈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 기독교의 영성은 부자의 영성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영성, 가난으로부터 나옵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고향 온양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그는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대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설교문의 한 대목이다. "저는 한국교회의 대안은 농촌 교회와 같은 작은 교회가 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 자본에 밀려 죽어 가는 농촌 사회에서 텃밭을 일구며, 자기 식량은 자기가 얻으며 사는 소농들이 그 대안이듯이, 작은  사랑의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대안이라고 봅니다. 서로 주님의 말씀으로 모여 다시 주님의 사랑을 들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공동체, 아픔도 슬픔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이러한 공동체는 아주 작아야 가능합니다. 이 작은 사랑의 공동체만이 이웃을 섬기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죽음


맑은 세상에 대한 꿈, 맑은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꿈은, 불현듯 이 땅을 떠난 그에게서는 이제 더 이상 펼쳐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 친구는 하나님의 '빗나간 손길'을 원망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발버둥치고 자신의 영달만을 좇는 사람들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판에 그들은 내버려두고, 어째서 그 맑은 영혼으로 자신을 비우며 낮은 곳에서 조용히 살았던 그를 데려가셨느냐는 원망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빗나간 손길'이라고 외쳐댔다.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을 만큼 친구를 잃은 아픈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친구들의 마음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한 사람이 진정 얼마나 잘 살았는지는 그 사람이 죽는 순간을 보면 안다고 한다.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욕망 때문에 육신의 생명 끝자락을 붙잡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임종의 순간에도 얼굴이 편치 않다. 반면에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죽음 자체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아 임종의 순간에 가장 편안한 얼굴을 한다. 나 역시 임종을 하신 분을 두고 그 가족들에게 이 말로 위로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에 가까울까? 사실 그것은 매우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그것은 일정 기간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소위 '자연사'에 해당하는 경우에나 제한적으로 진실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그와는 달리 전혀 죽음을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홀연 듯이, 그야말로 비명횡사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 상식을 진실처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시신마저 크게 손상당한 그의 죽음은 잘못된 삶에 대한 저주의 징표라도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내 한 몸의 삶과 죽음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삶도 내 육신의 삶이요, 죽음도 내 육신의 죽음일 뿐이다. 그러니 잘 살고(well-being) 잘 죽는 것(well-dying)을 모두 그 한계 안에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그렇게 개별적일 수만은 없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 다들 기뻐하고 한 생명이 다했을 때 슬퍼하는 우리의 상식은 삶과 죽음이 얽히고 설킨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들 모두 태어나고 우리들 모두 죽어간다. 그러므로 개별적 육신의 삶과 죽음을 두고서가 아니라 뒤엉킨 사람들 틈바구니 안에서의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더욱 진실에 가깝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기묘한 역설을 발견한다.  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또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살라고 격려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때로는 삶 자체를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다. 종종 던지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말, 그것은 그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시대 탓에 너무나도 도드라진 그 삶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을 두고 다들 슬퍼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잘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잘 죽었다"는 말, 정말 잘 죽었다(well-dying)는 말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의미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사람들이 그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할 때 오히려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안타까움의 정도가 클수록 그의 죽음의 의미, 아니 삶의 의미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부재함으로 존재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캄캄한 절망뿐인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는 구원의 도로 알지 않은가! 정말 하나님을 원망해야 할 만큼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이라면 그의 삶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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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