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신학의 위기와 한신의 신학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51
조회
3801
한신대학교 <세계와 선교> 185호(2003.12.1)


신학의 위기와 한신의 신학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한신대 강사)


신학의 위기


얼마 전 원고청탁을 하나 받은 적이 있다. 감리교의 학생들과 초년 목회자들의 연구 동아리로부터 청탁받은 것이었는데, 그 주제는 '신학으로 살아남기'였다. '살아남기'라니? 신학의 위기를 얼마나 절박하게 느꼈기에 그렇게 표현을 했을까, 새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이목을 집중하기 위한 선정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정말 절박한 위기감이 배어 있는 표현이라 생각되었고, 그 절박한 위기감에 나 역시 깊이 공감하였다.

'죽느냐, 사느냐?' 그렇게 절박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학의 위기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을 함축하는 것 같다. 하나는 신학 자체의 위기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다.

신학 자체의 위기란, 신학의 효용성에 관한 의문과 더불어 신학의 고유성 내지는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의문을 포함한다. 단순히 말하면, 과연 오늘 여전히 신학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져 왔던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 신학의 의의는 여전히 의심거리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의 존재 의의는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의 역할에 한정되지 않는다. 신학이 단순히 신의 존재증명을 임무로 하는 학문도 아니며 또한 하느님이 현존하는 배타적인 거룩한 장소로서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인식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물론 신학은 운명적으로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고 또한 교회와 관련된 과제를 모색할 수밖에 없겠지만, 신학의 고유성과 효용성이 거기에 한정되는 않는다는 뜻이다.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근대적 인식도 있거니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등장은 신학의 고유성과 효용성에 관해 더욱 새로운 인식을 낳았다. 신학은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이라는 인식이다. 실천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 인식을 동반한다. 실천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 조건이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조건을 말한다. 배타적 장소로서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주어진 조건이다. 실천이란 그 주체가 그 세계 안에 있으면서 그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실천 주체의 인식은 어떻게든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실천에 대한 성찰을 그 과제로 삼고 있는 오늘의 신학적 인식이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더욱이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의 주체, 곧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실천 주체는 교회적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부여된 여러 관계 안에서의 주체로서 신앙의 의미를 묻고 살아가려 한다. 결국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그 모든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어느 것이 신학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나, 신학 자체의 위기를 절박하게 말해야 하는 까닭은 오늘의 신학이 실천의 주체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성찰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신학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 언제 무관심한 적이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어떤 신학, 그 어느 시대의 신학도 사실 세계에 관한 인식을 배제한 적은 없다. 그 모든 신학은 나름대로 세계 인식을 담고 있다. 그 점에서 문제의 상황은 신학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선언적 주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데 있다. 어떤 주장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대신할 수 있고 대안 모색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고민해야 할 일이 없다. '좋은 말씀'이라고 해서 정말로 현실에서 말 그대로 '좋은 말씀'이 되지 않는 상황, 그것이 문제다. 결국 문제는 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포괄적이기에 간단히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신학의 위기를 논할 때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준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신학의 위기를 논하는 우리들의 '저의'가 분명히 있다. 그 저의는 도대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신학들이 꽉 닫힌 듯한 세계에 어떤 돌파구를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일까? 궁극적인 구원의 전망을 말하는 신학에서 우리는 어째서 희망의 메시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신학의 위기가 함축하는 두 번째 측면, 곧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 문제를 생각해보자.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 주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위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동시에 신학하는 주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유념하고 있는 신학의 주체는 특별히 신학적 사유를 전문적인 자기 과제로 삼는 신학생, 목회자, 신학자 등을 말한다.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란 과연 이들에게 신학이 '생업수단'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회의와 관련되어 있다. 학생으로서 교과과정을 따라 배우는 것이기에 익히고, 목회자로서 오직 설교 그 자체를 위해 참조하고, 신학자로서 그저 익힌 지식이기에 전달할 뿐인 신학이 과연 '신학'일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다.

신학이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학하는 이는 마땅히 신학적 사유를 따라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위 '신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은 자기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용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더욱이 교회 현장에서는 그나마 어떠한 신학마저도 발을 붙이기 어렵다. 신학생들 또는 초년 목회자에게 "교회 현장에 가거든 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버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다. 그 말이 현장에 적합한 새로운 신학적 사유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의미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권유되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의 진의는 아예 신학을 버리라는 뜻에 가깝다. 신학적 사유를 배제해버리고 목회자가 습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행정 기능, 인간관계 기능 등일 뿐이다. 신학적 지식과 사유는 그나마 설교를 위해서만 그 존재의의를 인정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우마저도 사실상 신학적 사유는 제한된다. "절대 신학적 설교하지 말아라!", 이것이 또한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는 말이다. 이 역시 '설교'와 '강의'의 차이를 구별하라는 권유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역시 그 말의 진의는 청중들의 삶을 건드려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교회를 위한 신학'의 진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의 존립에 위협이 되는 어떤 신학도 그 존재의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소위 '신학'에 종사하는 이들은 신학적 사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목회자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진지한 신학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진정한 신학자를 몰아낸다. 그래서, 오늘 이른바 성공한 목회자란 탁월한 행정가 내지는 경영자일 뿐 신학자와는 상관이 없다. 교회만이 유일한 신학의 장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학을 필요로 하는 가장 유력한 장이 교회이다. 거기에서부터 신학이 유배당하고 신학하는 이들이 배척받는 현상은 신학이 위기에 처한 오늘의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심한 고통과 인내를 동반한다. 그러나 신학하는 이는 그 고통과 인내를 통해 희망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발견할 때 역설적으로 기쁨을 맛본다. 오늘 현실은 그 기쁨을 원천적으로 앗아간다. 그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할까?


진보적 학풍의 대명사 한신(?)


지금까지 오늘 우리가 느끼는 일반적인 신학적 위기의 상황을 진단했지만, 한신의 신학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까? 닫힌 세계에 돌파구를 열어주는 신학적 사유가 진작되고 있는가? 신학하는 이들이 그러한 신학적 사유를 통해 진정으로 의미있는 삶을 열어가고 있는가?

'한신' 하면 떠올리는 말이 있다. '진보적 학풍'이라는 말이다. '기장' 하면 '앞서가는 교단'이라고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신'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학풍'을 대변하는 대명사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몫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놓고 강의하는 도중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맞습니다!"라는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고, 유감스럽게도 "아닌 것 같은데요!"하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진보적 학풍을 내세우게 된 자랑스러운 한신 전통의 맥을 짚어주며 강변했지만, 적어도 현재의 상황을 진단하는 대목에서는 자랑스럽게 공감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는 눈빛이었다.

지금 한신은 과거 스승들과 선배들의 후광 덕분에 그나마 진보적 학풍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과거에 한신은 진보적 한국 신학의 산실로, 또는 민중신학의 산실로 여겨졌다. 뭐라 이름하든 그 신학의 특징은 '역사참여'의 정신을 핵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한신의 신학은 그것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세간의 각광을 받지 못했을지언정 정말로 진지하게 신학적 작업을 해온 여러 선생님들이 뿌린 밑거름 위에 그 신학이 빛을 드러낸 형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장 교단의 태동 사연이 시사하듯이, 당대로서는 선구적인 비평학이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그 기초 위에서 한국의 역사에 개입하는 신학의 꽃을 피운 곳이 바로 한신이었다.

한신의 그와 같은 신학적 전통 또는 학풍은 신학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일반 사회의 지평에서나 일반적 학문의 풍토에서도 특기할 만한 자랑거리였다.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식민지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극복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한신이 하나의 학풍으로 진작시킨 역사참여의 신학은 자생적인 실천이론이자 학문적 성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어쩌면 가장 서구적이며 가장 식민지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이 다른 학문 분야보다 앞서 자생적인 방법론과 시각을 갖추게 된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지난 해(2002년) 『교수신문』은 '우리 이론을 검토한다'는 주제로 연중기획특집을 구성하였는데, 자생적이고 독창적이고 우리 이론으로서 '민중신학'을 세 번째 순위에 올린 적이 있다(『교수신문』200.4.15). '탈식민이론'과 '분단체제론'이 이보다 앞선 순위에 오른 것은 다분히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시의성이 반영된 결과라면, 관심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된 민중신학이 세 번째 순위에 오른 것은 이례적이었으며 그것은 사실상 일순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참여의 신학이 민중신학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민중신학의 형성에 한신이 배타적 독점권을 갖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역사참여 신학의 전통이 민중신학으로 결실되었고, 그것이 한신의 학풍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는 민중신학 그 자체에 대한 평가로서만이 아니라 한신의 학풍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를 시사하기도 한다. 그 평가는 과거 훌륭한 한신의 지성들이 곧바로 우리 한국 사회의 훌륭한 지성으로 평가받아 왔던 점과 일치한다. 한신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신학자, 기독교의 신학자로만 머물지 않았고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중추로서 몫을 감당했다. 그 유산 덕에 한신은 지금도 자랑스럽게 진보적 학풍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한신이 그 자랑스러운 전통을 여전히 내세울 수 있을지 자문해볼 일이다. 목회 현장에 있는 이로서 나는 요즘 '앞서가는 교단'을 자처하는 기장이 과연 앞서가는 교단인지 심각하게 회의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거의 절망하고 있다. 겨우 50년만에 늙어도 이렇게 늙어버릴 수가 있을까? 아니, 늙는다는 것을 욕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타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 교회 전반적으로 급속한 성장세가 주춤해 있는 마당에 뒤늦게 기장은 '성장 타령'을 하고 있다. 기장의 역사참여의 전통마저도 성장을 가로막은 주범인양 아무런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모르는 가운데 양적 규모로 교회를 평가하고 목회자의 자질을 판단하는 가치관이 만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규모에 따라 교회와 목회자들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정당화하고 제도화는 법안마저 총회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만들어내는 실정이다(예, 이번 제88회 총회에서 문제가 된 헌법개정안 제55조 5항 '전도목사 제한 규정'). 또한 그간 이어져온 교단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관심보다는 화려한 집짓기(예, 총회 회관 건립)에 관심이 쏠려 있다. 교회 성장을 촉진시키고, 교회내 질서를 확립하려는 관심이 기장에게는 새로운 것(?)일지 모르겠다. 밖이 아니라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반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찰적 소통을 지향하기보다는 폐쇄적인 자기울타리의 강화로 귀결되는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도 이제 힘 한번 써보자'는 심산일까? 기장이 언제 교세가 약해 이 역사에서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하지 못했단 말인가? 사실 일부 큰 교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할 뿐 한국교회 전체에서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니다. 교세와 상관없이 역사 현장의 부름 앞에 신실하게 응답하려고 노력한 데서 기장은 우리 사회의 양심으로서 몫을 다하였다.

한신의 신학은 그 신실한 노력에 대해서 신학적 성찰로 뒷받침했고 그 노력을 고무했다. 그러나 오늘 양자 관계는 역동성을 상실했다. 교회는 너무 보수화 되어버렸고, 신학은 무뎌졌다. 앞서 말한 신학의 위기 징후는 우리들 가운데서 그렇게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닫힌 세계를 여는 신학


한신의 신학이 지켜 온 역사참여의 정신,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구원을 지향하는 반면 개인구원을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원이냐 개인구원이냐는 진부한 신학적 논의 도식을 뛰어넘는 신학적 인식을 함축한다. 그것은 이 역사 현장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발걸음을 신실하게 따라가며 자신을 내놓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사회 문제는 중요시되는데 개인 문제는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실존 자체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역사 현장에서 영위되고 있는 만큼 개인의 문제와 사회적 관계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없다. 그 점에서 역사참여의 정신을 재고하고, 그 밖의 다른 신학적 태도를 찾아야 새로운 신학적 대안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역사참여 신학 대신에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든지, 역사참여 신학 대신에 개인의 영성을 진작시킬 신학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신학적 대안모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 역사참여의 정신을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정당한 해법이다.

그 해법의 첫 번째 실마리는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오늘 신학의 위기는 사실 자폐증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자폐증의 신학은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교회에 근거한다. 앞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느냐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세계를 돌아보는 데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지 아니면 이타적 시선으로 자기를 되돌아보는지가 문제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역사참여 신학의 또 다른 표현인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신학적 인식이었다. 자기만을 정당화하는 폐쇄회로에서 해방될 때 신학은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신학이 그렇게 스스로를 해방할 때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는 해방의 언어로 자리를 잡는다. 신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신학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해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몫을 감당해 왔다.

예컨대, 사실상 기독교 신학의 출발 계기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예에서 우리는 신학적 인식의 고유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고 '믿음'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 비판의 초점은 자기 의였다. 바울은 유대인의 선민의식만이 아니라 모든 배타적 선민의식을 문제시한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에게 공통되는 것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는 배타적 자기 의였다. 그 배타적 자기 의를 문제시한 바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한다. 바울이 인식한 세계, 그것은 곧 로마제국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선민', 지혜를 추구하는 '문명인',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시민'은 바울에게서 한 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경험 세계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오만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은 모두 이미 인식한 세계를 완결된 세계로 봄으로써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폐쇄적 세계이다.

바울은 그 폐쇄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선민의식을 뛰어넘으며, 동시에 역시 자신들의 힘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로마제국의 허위의식을 뛰어넘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길은 늘 새로운 가능성을 좇아가는 길이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하느님을 추구하고 그 하느님의 역사적 현존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당연히 그 어떤 것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무한히 새로운 가능성을 좇는 것이다.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언제나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추구한다.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 또는 제국의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했던 조건들을 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 신학을 하는 이들에게도 그와 같이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위한 결단이 요구된다.

오늘 새삼스럽게 신학의 진로를 모색하는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거듭남이 요구된다. 오늘 우리들이 오물처럼 여기고 내팽개쳐야 할 낡은 정체성의 조건들은 과연 무엇일까? 신학이 교회에서 유배당하는 현실은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어째서 소위 '성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신학적' 선포가 교회 안에서 배척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는 욕망에 흠집을 내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경우 오늘 교회 안에서 추구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치장된 물질적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소위 '성장하는' 교회에서 금기되는 코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불문율이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미국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실은 오늘 많은 한국 교회의 정체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오늘 한국 교회는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가운데 자본주의적 가치체계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질서와 가치체계에 균열을 내는 일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사실상 맘몬에 포로 되고 자기가 이룬 것에 자족해하는 업적주의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일상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역사참여의 신학에서 후퇴하여 교회의 성장을 위한 신학으로 선회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바로 그와 같은 유혹과 무관하지 않다.

한신의 신학은 오늘 우리 상황에서 지금까지 지켜 왔던 역사참여 정신을 새롭게 하는데서 재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나 민중신학의 명제를, 또는 장공의 신학을 훈고학적으로 해석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신학들이 의도했던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름 앞에 겸허히 나서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역사 현장에서의 몫을 감당하는 데 자신을 내놓는 정신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한신의 신학적 미래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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