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참 '교회됨'의 신학적 이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53
조회
3953
KNCC 창립 80주년 기념 월례강좌 "한국교회 - 그 성숙함을 위한 진단과 제언" 발제 1

2004년 1월 27일(화) 18:00-19:30 / 기독교회관 2층 강당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공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도 한국교회의 위기를 공론화 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이 제기되어 따라 발제가 요청되었습니다. 그간 '변방'에서 이렇게 저렇게 했던 이야기를 모두 집약해 맥락에 맞춰 재구성하고 보완했습니다.)    


참 '교회됨'의 신학적 이해


1. 참 '교회됨'을 물어야 하는 이유  


"오늘의 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논하기에 앞서, 바르고 참된 '교회됨'이란 무엇인지 신학적 이해"(발제 요청 공문)를 도모하는 것이 본 발제의 취지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참 '교회됨'을 다시 묻는 것은, 그 신학적 정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새삼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학은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교회에 대한 정의를 해 왔다. 아마도 교회에 대한 정의 자체를 문제시할 것 같으면, 이천 년 동안 시도되어 온 교회에 대한 정의를 하나하나 환기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참 '교회됨'을 다시 묻는 사연은, 오늘의 교회에 대한 진단과 직결되어 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교회상과 오늘의 교회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고 엉뚱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현실 진단 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의 교회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기를 넘어서려는 맥락에서 교회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실체를 진솔하게 진단하는 것이 오늘의 상황에서 적합한 참 '교회됨'이 무엇인지 접근하는 길이 될 것이다.


2. 한국교회의 위기현상


오늘 우리가 교회의 위기로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은 어떤 것들일까?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의 현상들을 들여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언론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사태들과는 분명히 다른 경향이 있다. 예컨대 복지시설이나 기도원 등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리, 또는 소위 신흥종교집단이나 유사종교집단에서의 병폐 현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면들이 있다. 제도화된 '공식 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태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껏 한국 교회의 개가로만 인정되어 왔던 양적 성장 그 자체가 문제의 전면에 오르는가 하면, 그와 직결하여 목회자의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세습은 가장 관심이 집중된 문제다. 타종교와 전통문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 문제의 돌출 양상으로 단군상 훼손 및 불사(佛寺) 훼손 등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인 공통 관심사를 둘러싸고 표명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주5일근무제를 교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 역시 기독교의 보수성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이러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는 깊어가고, 그 기류에 편승해 기독교 비판 서적이 종교서적으로는 예외적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 또 다른 문제들이 파생하기도 한다. 2년 전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발간한 동아일보사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구독거부운동으로 맞서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 전에는 도올이 논어를 강의하는 중에 '역사의 예수' 연구방법을 공자에게 원용한 것이 기독교인들의 심사를 건드리기도 했고, 니코스 카잔스키의 소설로 유명한 <그리스도 마지막 유혹>의 상영을 둘러싸고도 기독교계의 논란은 만만치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하여 거부 입장을 표명한 이러한 사태들에서 기독교는 학문적 성찰이나 문화적 포용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들은 대개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태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계의 문제는 소위 '보수적' 기독교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최장기간의 파업사태를 초래했던 기독교방송(CBS) 사태는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병증의 또 하나의 사례였다. 과거 민주화와 인권 운동의 중추 역할을 담당해왔던 사장의 거취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야심과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사태는 성직을 빌미로 사실상 교회 문제에 전권을 행사해 온 성직자들의 배타적 특권의식과 그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었다. 동시에, 비단 보수적인 기독교계에만 권위주의적인 성직자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감당해 온 기독교계 내에도 그것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소위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금권선거의 문제다. 교단의 총회장과 중요 교직을 뽑는 데 금권이 동원되고 있는 사례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을 정도다. 개탄하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게 여겨지는 현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여전히 많은 교회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한편에서는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표면에 비친 교회는 어둡기 짝이 없다. 암만 밝은 얼굴을 그려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아 '어두운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3. 한국교회 위기구조의 역사적 기원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이례적으로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사실 오늘날 지적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온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발적인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뿌리깊게 자리잡은 구조적 현상인 것이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정확하게도 한국의 근대화 전략과 동맹관계를 맺은 데 그 한 요인이 있다.

기독교 교회사가의 지적대로 처음 한국 기독교는 일종의 '힘의 종교'로 수용되었다. 조선의 봉건사회 말기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수용한 한국인들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사실상 동일시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발전한 서구 국가의 힘의 원천은 기독교 신앙에 있는 것으로 비쳤다. 그러한 인식은 기독교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개신교의 본격적인 선교와 더불어 학교와 병원 등 근대 서구 제도 또한 활발하게 이입되었다. 그 영향하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말단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그 힘을 실감하기도 한다. 일찍이 천주교 박해시대 『황사영백서』에 나타난 것처럼 서양 군대의 힘으로 조선의 개항과 선교의 자유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그러한 일상의 경험을 통해 강화되었다. 지도급 인사들 역시 기독교 수용을 서구적 근대화와 동일시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로 인식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양대인 의식'(洋大人 意識)이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곧 서양의 힘있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종의 변형된 사대의식이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운동의 다양한 노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신앙의 양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중심의 선교사 의존하에 있었고 그 안에서 신앙의 형태 또한 고착화되었다. 때때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선교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평양 전쟁 이전 미국과 일본의 묵계적 동맹(카스라 태프트 조약)하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를 시도하였다. 여기에 교리에 대한 맹종을 가르친 미국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고유 문화를 배척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책임을 방기하고 신앙의 개인화와 내면화를 고착화시키는 데 절대적 기여를 하였다. 힘에 대한 의존과 더불어 배타적 성향의 한국 기독교의 특성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실질적으로 힘을 지닌 세력이 된다. 어느 면으로 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 세력은 미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친미 반공주의 국가 체제의 핵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한국은 전형적인 종교다원 상황이었고 1948년 정부가 '정교분리 원칙'을 헌법에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제1공화국은 정책운영 면에서 사실상 '기독교 국가'로 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독교(개신교) 인사의 광범위한 공직 사회의 진출이 이루어진다. 또한 당시 기독교(개신교)는 전후 미국의 원조 물자를 보급하고 혜택을 누리는 민간부문의 거의 유일한 독점 창구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사회 각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한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후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에서 지속된다.

경제성장 정책이 본격화되었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 기독교는 최대의 교세확장을 이루게 된다. 박 정권이 일면 친불교적 성향을 지닌 것은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에 그다지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는 경제성장 정책의 효과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렸다. 급격한 경제성장 정책으로 붕괴된 전통사회의 공동체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힘을 숭상하고 동시에 서구 근대 문명을 기독교와 동일시하였던 기독교에게서 경제적 근대화의 성취는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되었다. 양적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경제규모를 키운 방식은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구현되었다. 한국 교회의 공세적인 성장 전략은 공세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더욱이 근대화의 모범국가인 미국이 잘 사는 이유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고 못사는 나라들은 비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성장과 교회의 양적 성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면관계로 인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종교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대표하는 세력이 된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분포를 보더라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예컨대 2000년 기준으로 우리 나라의 종교인구 비율 현황은 불교 26.3%, 개신교 18.6%, 천주교 7%인데, 국회의원 273명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은 무려 64.8%(개신교 39.5%, 천주교 25.3%)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단순 비례를 넘어 과잉 대표하는 현상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 사이에서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적 공신력의 측면에서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 까닭은 한국 사회 근대화의 병폐를 기독교 역시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3. 한국교회 위기의 심층구조


1) 욕망과 배제의 구조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지니는 양극의 모순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리지만, 그 욕망 충족의 한계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 당한다. 창업 신화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신화를 이룰 수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1등을 향해 경쟁을 하지만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1등뿐 나머지 사람은 모두 패배자가 되고 만다. 광고의 문구처럼, '누구도 2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 냉혹한 현실이 바로 근대 자본제가 사람들에게 강요한 삶의 양식이다. 한국 교회가 근대화의 병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용인할 뿐 아니라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교회가 근대화의 성공과 더불어 영향력 확대에 성공했지만, 근대화의 병폐가 노출되는 순간 공신력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그 사회의 병폐와 교회의 병폐가 얼마나 닮았는지는 아주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간에서 지적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의 문제는 경제적 정의를 등한시하고 규모만을 키워온 경제 그 자체와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사실 양적 규모로 '성공'을 거둔 소위 대형교회는 1,000명 이상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2%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교회의 거의 60%는 50명 미만의 영세한 교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성공한' 교회를 모든 교회들이 선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분립하는 것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닮았고, 교회 세습마저도 재벌의 행태를 닮았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70%에 가까운 비율이 교회법상 절차의 하자가 없다면 교회세습에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절차상의 합법성 여부에 교회세습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의 독점적 소유와 배타적 특권이 문제이고, 교회도 마치 하나의 사유재산처럼 여기는 의식이 문제다. 후임 목회자를 찾기도 어려운 가난한 교회의 세습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가난을 세습할 뿐이다. 맘몬을 섬기는 세상을 넘어서야 한다는 교회가 맘몬의 포로에 매여 있는 현실이 문제다. 교회 안에서마저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사태, 공적인 종교 기관을 대표하는 지위를 연장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행태도 재력과 권력을 탐하는 일반 사회의 풍토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저 높이 계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세상의 법도는 그 어떤 것이라도 무가치하다고 여겨서일까?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심각한 윤리의식 부재를 발견한다.  나는 그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곧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들'라고 표현한다. '신앙 따로' '삶 따로'인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저 높은 곳만을 향하는 일방적 맹신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정상을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는 뒤를 돌아다보거나 옆을 둘러보는 일은 한가한 유희일 뿐이다. 앞을 선망하면 뒤에 쳐지는 것은 거들떠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냉혹한 법칙이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그대로 배어 있다. 그저 높이 계신 하느님만을 선망하는 신앙은 높은 업적을 이룬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선망을 낳고 그 선망은 이룬 것 없이 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불신앙의 탓으로 질책하게 만든다. 세상에 들어와 세상 만물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는 하느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몸으로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서의 근본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진리의 독점을 정당화하는 내면의식

주5일근무제를 교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여기는 태도,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역시 교리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그 입장 역시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주5일근무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눌 수 있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의 확대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계에서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으니 사람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그 말씀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신봉한다면 어째서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 해지기 전까지 지키지 않는지 의아스러워진다. 기독교가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문자적 진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근본 뜻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엿새 노동 하루 휴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노동과정 마지막 완성으로서 휴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계가 주5일근무제를 반대한 것은 일요일 예배에 대한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문제라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대책을 찾아야 할 일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곧바로 자본의 편을 드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은연중 그런 효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분명하게 노동의 경시 풍조를 낳을 것을 우려해서 반대한다고 표명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소위 주류 한국 교회의 입장이 어떠한 사회세력에 가까운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에서는 특권적 배타의식에 사로잡힌 한국 기독교의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은, 그 문제가 소위 '이단 종파'로 간주되는 여호와의 증인들 때문에 제기되었다는 점이 한몫 거든 것 같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병역기피현상이 만연하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특정한 집단에 특혜를 베풀게 됨으로써 국민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대체적인 이유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살인 무기를 들 수 없다는 그들의 평화주의 교리를 반박하는 데서 더 분명하다. 기독교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역설하며 기독교인들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실 많은 문제가 내장되어 있다. 국가주의와 개인의 권리 문제, 병역 의무의 차등, 평화주의와 전쟁불가피론 등 실로 복잡한 문제들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여호와 증인의 경우 병역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살상무기를 들지 않는 '집총거부'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동시에 그 어떤 이유로든 잊혀지고 배제된 이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여호와의 증인 뿐 아니라 불교도 오태양 군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신념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신념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고 그들의 주장의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까? 더욱이 무조건 거부도 아니고 대체근무 방안까지 모색되고 있는 마당에 양심적 병역거부 행위 자체가 곧바로 국민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인가?

결국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기독교인들은 명시적으로 그렇게 선언하지 않은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그래서 열정이 과도한 이들은 노상에서 전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대기도 한다. 공식적 교회들에서 보이는 태도는 그와 같은 열광주의적 행태와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자기의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타자의 부당성을 외치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다.

진지한 학문적 연구 결과 또는 예술적 작품을 두고 신앙을 해치고 신성모독을 범한다는 이유로 단죄하려 드는 태도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력을 행사해 출간과 판매 금지를 강제한다든지 상영 금지를 강요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논증하고 토론하면 족할 것을 아예 실력으로 저지 차단하려는 행위는 신념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아적 태도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종교현상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전통문화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의 경험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은 진리 그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진리는 절대적일지언정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은 모두 상대적이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 하지도, 교회라는 집단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선포했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을 뿐이다. 기독교나 교회는 그 뜻을 과연 따르기 위해 헌신하는가 하는 점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4. 위기의식으로서의 신앙


오늘 교회의 위기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제도화된 교회가 등장한 이래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수는 교회를 원하지 않았지만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만들었다. 이 사실은 처음부터 교회가 예수의 본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함과 동시에 역사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

사람들의 선택의 불가피성은 이미 성서 자체 안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교회의 제도화 현상이 성서 자체에도 나타나고 있고 동시에 교회의 위기에 대처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교회의 제도화에 대해 견제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예 근원적으로 제도화를 거부하고 형제애('사랑')를 중심으로 하는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요한복음과 서신들), 불가피하게 제도화로 인한 직분의 구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경직화된 위계질서로 전락할 것을 경계했다(그 외 서신들). 모든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며, 각 지체는 서로 어울려 한 몸을 이룬다는 서신서들의 관점은 위계적 서열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은사의 동등성, 모든 직분의 동등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였다. 교회 제도화의 경직성이 빚어낸 폐해를 그렇게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대적 가치관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교회는 권력 체제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권력 체제화된 중세 카톨릭 교회의 위기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개신교 교회 역시 오늘 또 다시 위기 가운데 처했다.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교회들을 보면, 과연 교회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을까 하는 점에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일그러진 신의 얼굴'만을 확인할 뿐이다. 고전적인 교회론은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를 나누고 교회의 본질을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찾았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와 '사회적 실체로서의 교회'로 나누어 볼 수 있을 터인데, 사회적 실체로서의 교회는 흠을 지니는 반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무구하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본연의 교회와 현실의 교회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신학은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인식은 교회 자체를 하나의 위기구조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질적인 교회와 현실적인 교회의 모순된 병존 구조로 교회를 이해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교회를 그와 같은 위기구조로 파악하는 인식 곧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이 살아 있을 때에 교회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그 위기의식이 사라질 때 교회는 세속의 권력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버리고 만다. 교회의 역사는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현실의 교회 또는 그 교회가 지배하는 기독교 왕국을 곧바로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해버린 중세기의 세계관이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어쩌면 교회의 역사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태도와 종말론적으로 매 순간을 위기로 느끼며 대안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시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지속된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당대의 지배적인 사회질서 및 가치관과 동일시되고 경직화된 현실의 교회적 신앙은 항상 위기의식을 통해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맞이했다. 그 점에서 위기의식 그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본령일 것이다.


5. 새로운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존재방식, 교회


우리는 그 절박한 위기의식을 초대 교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가 현실의 질서를 닮아가며 제도화되어 가는 가운데 나타났던 위기의식을 성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선명한 하나의 범례를 바울의 신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 '교회됨'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와 현실 교회의 괴리, 다시 말해 위기구조로서 교회를 이해하기에는 바울 신학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적합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바울은 역사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의 정초자이며 동시에 사실상 기독교 신학의 정초자이다. 그는 당대 로마제국의 질서 안에서 그리스도인됨의 요체를 분명하게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질서 및 세계관과 구별되는 참 '교회됨'의 근거를 제시한 셈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고 '믿음'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 비판의 초점은 자기 의(自己 義)였다. 율법이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오용되고 만 현실이다. 율법에 대한 맹신은 곧 자기 의에 대한 맹신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는 핵심은 거기에 있다. 바울이 율법을 문제삼는 것은 유대인들만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모든 배타적 선민의식을 문제시한다. 바울은 율법의 준수를 선민의 표징이자 동시에 구원의 방도로 아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까지도 함께 비판한다(고전 1:18이하; 로마 1:16-17; 3:9이하 등 참조).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합리적 지식을 절대 가치로 알고 그 기준에 따라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르는 점에서,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에게 공통되는 것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는 배타적 의식이다. 그와 같은 자기 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배타적 의식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에게만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배타적 의식을 문제시한 바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한다(로마 6장, 그리고 루이제 쇼트로프, "죄와 해방: 로마서를 중심으로", 김재성 엮음, 『바울 새로 보기』, 한국신학연구소 참조). 바울이 인식한 세계, 그것은 곧 로마제국이었다. 바울이 노린 것은 로마제국 자체가 자기 의에 가득 찬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선민', 지혜를 추구하는 '문명인',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시민'은 바울에게서 한 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경험 세계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오만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은 모두 이미 인식한 세계를 완결된 세계로 봄으로써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폐쇄적 세계이다. 그 닫힌 세계를 바울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하는 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가장 적절한 본보기가 되었을 뿐이다.

바울은 그 폐쇄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근거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답이면서 동시에 답이 아니기도 하다. 닫힌 세계를 표상하는 율법을 대신해 열린 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답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그 무엇을 명확하게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그 점에서 답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른다면서 사실은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역시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에 쥐어지는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율법조문처럼 명문화할 수 어떤 모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다(로마 5:6-11 등 참조).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신관의 혁명, 종교의 혁명, 신앙의 혁명을 의미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였다. 또한 그 신의 대리인 또는 신의 아들 역시 모든 것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제왕들은 저마다 신의 대리인으로 또는 신의 아들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든 재력과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쥔, 그 위엄 있는 제왕들을 실제 신으로 섬겼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더욱이 제국 로마는 그러한 상식적 세계관의 총 본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그렇게 알고 있고 그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에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의 혁명이다. 신의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져서는 안 된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채워져서도 안 되고, 돈이나 재물로 채워져서도 안 되고, 권력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30여 년 동안 자기를 지탱시켜준 몸마저도 버린 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혁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 비워버림의 극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 예수에게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하느님을 본다. 바울의 그와 같은 인식은 매우 근본적이며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다.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는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대극점이다. 십자가는 로마제국 안에서의 '악의 축'이다. 수치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도발적인 것이다. 흔히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형은 제국의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범에게 적용된 사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정치범이라도 로마의 시민에게는 십자가형이 적용되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시민이 아닌 노예와 같은 범주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사형제도다. 제국의 시민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나 적용되는 사형제도인 것이다(닐 엘리엇, "십자가의 반제국적 메시지", 김재성 엮음, 앞의 책 참조). 놀랍지 않은가? 원자폭탄은 베를린이 아닌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악의 축'에 해당하는 국가에 행해지는 어떠한 보복도 정당화된다? 탈레반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정마저도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제국의 논리, 자기 의의 논리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제국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십'자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한 젊은이가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제국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진정한 확신을 본다. 사실상 자신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해 줄 뿐인 욕망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믿음과 상식을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바울의 확신이다. 바울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비워버린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를 역설한 진정한 속뜻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력하거나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릇은 비어 있기에 그릇으로 용도를 다한다. 집은 빈 공간이 있고 비어 있는 창문이 있기에 집으로 소용된다. 바퀴가 바퀴로 소용되는 것은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노자,『도덕경』11장 참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한 요한의 해석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바울 역시 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위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마저도 기어코 노자의 빈 수레바퀴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칼 바르트, 『로마서강해』7장 참조). 인간의 역사가 그저 순진하게 발전만 하리라고 보았던 유럽인들의 낙관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떠받든 독일교회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대항한 칼 바르트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칼 바르트의 논리를 배울 것이 아니라 그 위기의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뛰어넘으며, 동시에 역시 자신들의 힘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로마제국의 허위의식을 뛰어넘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 전인미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텅 비어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텅 빈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하고 전인미답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교회는 그 믿음으로 거듭난 새로운 주체들의 공동체적 존재방식이다.


6. 오늘 자본에 묶인 교회에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기


그리스도인의 길은 늘 새로운 가능성을 좇아가는 길이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이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추구하고 그 하느님의 역사적 현존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당연히 그 어떤 것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무한히 새로운 가능성을 좇는 것 아니겠는가? 그 어느 것도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면, 우리가 마치 진리를 독점한 듯이 행세할 수는 할 수는 없다. 그저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를 우리는 추구할 따름이다.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언제나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추구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빌립 3:8)라는 바울의 고백은 새로운 주체로의 갈망을 함축한다.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 또는 제국의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했던 조건들을 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한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공동체적 존재방식인 교회에도 그와 같이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위한 결단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오물로 여겨 내팽개쳐야 할 낡은 정체성의 조건들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교회에서는 새로운 존재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의 거듭남을 촉구하는 진지한 신학이 유배를 당하고 있다. 오늘 교회 현장에서는 정말 신학이 발을 붙이기 어렵다. 신학생들 또는 초년 목회자에게 "교회 현장에 가거든 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버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다. 그 말이 현장에 적합한 새로운 신학적 사유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의미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권유되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의 진의는 아예 신학을 버리라는 뜻에 가깝다. 신학적 사유를 배제해버리고 목회자가 습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행정 기능, 인간관계 기능 등일 뿐이다. 신학적 지식과 사유는 그나마 설교를 위해서만 그 존재의의를 인정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우마저도 사실상 신학적 사유는 제한된다. "절대 신학적 설교하지 말아라!", 이것이 또한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는 말 아닌가? 이 역시 '설교'와 '강의'의 차이를 구별하라는 권유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역시 그 말의 진의는 청중들의 삶을 건드려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

현실의 교회에서 신학이 유배당하는 현실은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어째서 소위 '성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신학적' 선포가 교회 안에서 배척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는 욕망에 흠집을 내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교회 안에서 추구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치장된 물질적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소위 '성장하는' 교회에서 금기되는 코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불문율이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미국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 가운데서 그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는 교회는 거의 틀림없이 작은 교회들이다. 그 사실은 오늘 주류 한국 교회의 정체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오늘 한국 교회는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가운데 자본주의적 가치체계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관해서는 최형묵, "욕망과 배제의 구조로서의 기독교적 가치", 『당대비평』14[2001. 봄] 참조). 그래서 그 질서와 가치체계에 균열을 내는 일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지난 겨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서울 시청앞 기도회 사건은 한국 교회의 그 불안감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천국'을 바라는 '성도'들이 무엇이 불안해 그렇게 모여 울고불고 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현재의 주어진 질서와 가치체계 안에서 모순 없이 안녕을 누리고픈 욕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오늘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질서와 가치체계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닫힌 질서와 체계에 균열을 내는 비판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자본과 권력에 포박된 교회 현실이 그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해야 할까?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 교회적 주체이기를 포기하는 전략, 아니면 교회를 재구성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교회적 주체이기를 포기하는 전략은 달리 말하면 '교회의 해체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 존립조건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여 기성교회의 해체를 의도함과 동시에 탈교회적 주체의 형성을 의도한다. 엄연히 교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탈교회적 주체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을지는 열려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 전략은 일체의 교회 중심주의를 부정하며, 탈교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 더불어 교회가 진정한 소통의 구조를 갖추기를 지향한다.

교회의 재구성 전략은 교회 해체 전략의 모호성을 극복해보려는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포박되어 있는 기존의 교회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해체의 전략과 재구성의 전략은 근본적인 입지점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엄연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그 구체적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마치 바울이 유대인을 공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유대인이 구원받기를 갈망했고 자신 또한 어떤 면에서 유대인의 한계 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고백했던 측면과 상통한다(로마 9:1-5 등 참조). 유대인의 유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했던 그 측면이다.

우리 현실에서 대안을 추구하는 많은 교회들의 유형을 대별해 각기 어느 교회가 해체의 전략에 입각해 있고 어느 교회가 재구성의 전략에 입각해 있는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굳이 말한다면 아마도 많은 대안의 교회들이 재구성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잠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초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대별해 본다면 여전히 미묘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체의 전략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강조하고 따라서 교회적 존재방식을 그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면, 재구성의 전략은 그리스도인의 그 다양한 존재방식 가운데서도 교회적 존재방식이 여전히 유력한 형태라는 점을 유념하여 그 변화를 시도한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의 교회 현실을 볼 때, 새로운 대안은 교회 위기구조의 봉합을 통해서보다는 위기구조의 심화를 통해 찾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없는 위기를 조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내재된 위기를 간과하고서야 무슨 대안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듣기에 몹시 불편하지만 이 말씀을 결론으로 삼고싶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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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