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교회,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56
조회
4268
<월간목회> 권두시론 2004. 5.

* 월간목회의 청탁을 받고, 작년말부터 금년초까지 이래저래 한 이야기들을 집약하고 집약했습니다. 5월호가 나왔기에 여기에 올립니다.


한국교회,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 위기현상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도대체 어떤 현상들을 두고 하는 말일까?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 현상은 과거의 소위 신흥종교집단 등에서의 병폐 현상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공식 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태들이 문제의 쟁점이 되고 있다. 개가로만 인정되어 왔던 양적 성장 그 자체가 문제의 전면에 오르는가 하면, 교회세습 등 목회자의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타종교와 전통문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인 공통 관심사를 둘러싸고 표명되는 교회의 태도도 문제다. 예컨대 주5일근무제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교리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특정 출판물이나 영화 등이 신앙을 위협한다 하여 실력으로 제지하려는 태도는, 교회가 학문적 성찰이나 문화적 포용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보이게 한다. 한편 최장기간의 파업사태를 초래했던 기독교방송 사태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 기관 운영과정에서 발생한 파행 현상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병증의 또 다른 사례들로서, 성직을 빌미로 사실상 교회 문제에 전권을 행사해 온 성직자들의 배타적 특권의식과 그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소위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한국교회의 낯부끄러운 사태로서 금권선거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이래저래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그간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해 왔지만, 사회적 공신력은 오히려 떨어졌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논하는 것은 그와 같은 교회의 공신력 실추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교회 위기의 역사적 기원과 그 심층구조


영향력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공신력의 실추를 겪게 된 요인이 어디에 있을까? 사실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온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발적인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뿌리깊은 구조적 현상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정확하게도 한국의 근대화 전략과 동맹관계를 맺은 데 있다.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는 일종의 '힘의 종교'로 수용되었다. 조선의 봉건사회 말기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들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사실상 동일시하였다. 기독교 수용을 서구적 근대화와 동일시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한 인식에 근거한 기독교는 경제성장 정책이 본격화되던 시절 경제성장 정책의 효과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렸다. 여기에서 경제적 근대화는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되었다. 한국교회의 공세적인 성장 전략은 공세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더욱이 근대화의 모범국가인 미국이 잘 사는 이유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고 못사는 나라들은 비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성장과 교회의 양적 성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면관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지니는 양극의 모순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리지만, 그 욕망 충족의 한계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 당한다. 한국교회가 근대화의 병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용인할 뿐 아니라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가 근대화의 성공과 더불어 영향력 확대에 성공했지만, 근대화의 병폐가 노출되는 순간 공신력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그 사회의 병폐와 교회의 병폐가 얼마나 닮았는지는 아주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경제적 정의를 등한시하고 규모만을 추구해온 경제 성장 그 자체와 너무 닮았다. 사실 양적 규모로 '성공'을 거둔 소위 대형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가 영세한 교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성공한' 교회를 모든 교회들이 선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분립하는 것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닮았고, 교회 세습마저도 재벌의 행태를 닮았다. 교회 안에서마저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사태, 공적인 종교 기관을 대표하는 지위를 연장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행태도 재력과 권력을 탐하는 일반 사회의 풍토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사회적 공통 관심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폐쇄적 태도에서 우리는 욕망과 배제의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마치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기준이 절대적 기준인양 내세운다. 앞서 언급한 주5일근무제라든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보편적 가치 기준에서 충분히 검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다. 진지한 학문적 연구 결과 또는 예술적 작품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유익한지 유해한지는 공공 영역에서 검증하면 될 것을 아예 실력으로 판매나 상영 금지를 강요하는 태도는 신념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아적 태도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태도이다.

그래서 교회 안과 밖은 소통이 두절되고 말았고, 교회 안에서마저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갈등을 겪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늘 교회가 시민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내분이 교회 밖으로 퍼져나가는 현상도 빈발한다.


위기의 돌파구


그 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병은 덮어둔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병을 고치려거든 자랑하라고 했다. 병이 무슨 자랑거리일까마는 치료를 위해서는 그 병증을 환히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진솔하게, 아니 뼈아프게 인정해야만 한다.

사실 신학은 오래 전부터 현실의 교회와 본연의 교회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왔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야말로 진실하다고 인식한 것은 교회 자체를 하나의 위기구조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은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이 교회를 늘 새롭게 하는 동력으로서 몫을 해왔다. 그 현실의 교회와 본연의 교회의 괴리를 망각하고, 현실의 교회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인 것으로 착각했던 중세기의 교회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도 일종의 자폐증상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없는 위기를 조장하려는 뜻이 아니다. 위기를 위기로서 제대로 인식하자는 뜻이다.

현실의 교회와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는 본연의 교회 자리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여야 할 것이다. 그 자리를 다시 되돌아봄으로써, 그로부터 멀어진 오늘 교회의 현실을 되돌려 제 자리에 서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서 안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비상한 위기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의 정초자인 사도 바울은 이미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하는 모든 선민의식을 질타하였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의 선민의식을 자기 의(自己 義)로 규정하였고, 그 자기 의로 가득 찬 로마제국의 현실을 죄의 노예가 된 상태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빌립 3:8)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은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워버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그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다.

오늘의 교회가 과연 그 믿음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현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그 어떤 것들에 매여 거기에서 정체성을 찾고 자기만족적 상황에 빠져 있지 않은지 깊이 통찰해야 한다. 교회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현실적 조건들을 신앙의 성취로 착각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지 않은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충만! 충만!"을 외칠 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교회에 무엇이 들어차는지 알아야 한다. 사실상 욕망의 충족이 아닐까?

자기를 전적으로 비워버린 그리스도를 닮는 것만이 오늘 한국교회의 위중한 병증을 치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월간목회 2004. 5. 목차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