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평신도의 '목회', 그 가능성은? - 교회 운영, 목회자만의 몫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00
조회
4680
정의ㆍ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

제3기 평신도 아카데미 제3강

2004. 6. 15(화) 오후 7:30 / 향린교회


평신도의 '목회', 그 가능성은? - 교회 운영, 목회자만의 몫인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평신도의 '목회'?


평신도의 '목회'란 가능할까? 이 물음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답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순전히 사전적 의미로 따지면 '평신도의 목회'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목회'란 기본적으로 위계화된 교회 질서 안에서 의미를 지니는 말이기 때문이다. 목회란 목회자와 평신도가 분명하게 구분된 교회질서 안에서 목회자가 평신도를 양육하는 일을 말한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비유한 데서 나온 이 말은 그 실제적 의미에서도 목자/목회자가 양떼/평신도를 '양육'하는 것을 말한다. '평신도의 목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이 경우 '목회'는 특정한 지도자에게만 허용되는 매우 한정적이고 배타적인 일일뿐이다. 만일 이 경우에 '평신도의 목회'가 가능하려면 그것은 안수를 받은 목회자 대신 평신도가 그 배타적 지도력을 대신하는 경우여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는 한정된 지도자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지도자와 일반 회중의 관계가 기존의 교회 구조와 동일하다면 그것을 과연 '평신도의 목회'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진다.                

그러나 '목회'는 그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폭넓게 사용되기도 한다. 이 강의의 부제가 말하듯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일, 특별히 '교회 운영'이라는 의미로도 통용된다. 그런 뜻이라면 '평신도의 목회'는 가능하다. 양육의 구조 안에서 능동적 주체와 피동적 대상의 관계를 벗어나 교회 공동체의 동등한 주체로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 특히 교회운영 전반에 관한 평신도의 능동적 주체성 모색을 의미하는 '평신도의 목회'라면 가능하다. 그러니까 역할상의 차이는 인정하되 그 역할들이 위계관계 안에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들의 공평한 배분의 차원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2. 현실 교회구조의 상대성


오늘 교회 안에서 평신도 주체성이 문제되는 것은 현실의 교회가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라는 개념 자체가 시사하듯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 현실은 능동적 주체로서 목회자와 피동적 대상으로서 평신도의 관계를 당연시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과연 그와 같은 교회의 구조가 교회의 본질적 요건인가 하는 것이다. 현실의 교회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교회법적 규정을 근거로 그러한 구조가 마치 항구불변의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간주한다. 예컨대 카톨릭 교회는 사도직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성직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직자 중심의 위계적 교회구조를 정당화한다. 개신교의 경우는 매우 다양한 교회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평신도의 대표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교회구조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장로교를 들 수 있다. 장로교는 평신도의 대표성을 반영한 당회의 구조를 갖춘 점에서 확실히 카톨릭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구조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여전히 소수의 권한을 보장하는 과점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직자 중심의 독점체제에서 소수 대표들의 과점체제로의 변화는 진일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넓은 의미의 독점체제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그 안에서의 목회자 중심주의 문제가 여전히 제기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 교회의 구조를 상대화시켜 바라 봐야 한다. 항구적으로 영속할 수 있는 교회구조란 없다. 현실의 교회구조는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예컨대 카톨릭 교회는 봉건적 위계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개신교는 근대의 대의정치 구조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봉건적 위계구조는 더 말할 것 없거니와 근대의 대의정치의 문제도 오늘날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다.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로, 또는 간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관한 모색은 오늘날 대의정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 3.12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한 이후 탄핵정국에서 우리는 대표권 없는  대의정치의 허구를 뼈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는 대표권 없는 대의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참여정치를 이루는 과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평신도의 주체성 강화를 통한 수평적 교회구조를 만들고 누구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교회 공동체를 일구는 과제는 오늘의 시대적 요청이다.

그러나 한편 교회구조 개혁의 과제는 비단 시대적 요청만은 아니다. 교회 본연의 존재의의라는 측면에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란 본래 기존의 세계질서를 지탱하는 주체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새로운 세계의 주체 형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그것이 교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기존의 세계 질서를 좇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었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스스로 그 안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뿐 아니라 이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저해하는 어떤 질서가 허용될 여지는 없다. 예컨대 불평등한 위계구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함으로써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까닭에 그 목적은 순수하게 구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어떤 위기가 발생한다면 교회는 마땅히 스스로 그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교회의 갱신, 교회구조의 개혁은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3. 위기구조로서 교회, 그리고 대안의 전략


그런데 문제는 본연의 교회와 현실의 교회가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가 하면 엄연히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서 인간의 집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건강성은 바로 이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오랜 전부터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문제를 숙고하여 왔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본연의 교회로, '보이는 교회'를 현실의 교회로 보아 왔다. 이러한 신학적 태도는 교회 자체를 하나의 위기구조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실의 보이는 교회는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반면 본연의 교회는 순수한 교회의 원형에 해당하므로, 보이는 교회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기준에 따라 갱신되어야 하는 관계로 본 것이다. 그 긴장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교회 자체를 곧바로 본연의 교회와 동일시했을 때 교회는 강력한 권력 체제가  되어버렸다.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그 전형이었다. 반면에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회는 현실의 교회를 상대화시킴으로써 곧 현실의 교회와 본연의 교회를 분리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이 되었다. 모든 교회 개혁운동은 그와 같은 인식에서 가능하였다. 그러나 오늘 유감스럽게도 개신교 교회마저도 현실의 교회를 본연의 교회와 동일시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현실의 교회 그 자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등식화했던 중세의 카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 개신교 교회들도 현실의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등식화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상대적일 뿐인 교회의 구조가 절대화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오늘날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지 않는 교회구조는 바로 그와 같은 인식에서 정당화되고 절대화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교회 자체를 위기구조로 인식한 신학적 전통을 되살리고,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교회의 구조를 찾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찾은 그 대안이 어느 순간에 또 낡은 퇴물이 될지언정 당장 의미있는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대안 추구는 처음부터 그 대안이 항구적일 수 없다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래야 되풀이되는 오류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

교회를 하나의 위기구조로 인식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이미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 왔다. 처음 예수운동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역사 자체를 위기로 보았기에 예수운동의 주체들은 현재 역사 안에서 스스로의 존립방식에 대한 고민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예수운동은 곧 해방의 사건 그 자체였고 그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역사의 종국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종말은 지연되었고, 따라서 예수운동 주체들의 존립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등장한 것이 교회였다. 하지만 그 교회는 여전히 예수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주체로서 역사 안의 세계질서를 지탱하는 주체들과 다른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역사 안에 발을 딛고 있다는 불가피성 때문에 현실적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직제가 등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초대 교회는 그 직제를 위계적 관계로 설정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의 공평한 배분의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바울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의 비유는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교회관을 말한다. 현실 존립의 요건으로서 직제의 분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직제의 분할이 배타적인 권위의 독점 현상을 정당화하는 위계구조로 귀결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의도와는 상반되게 위계화된 교회구조의 재편을 바라는 오늘 우리들의 관점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역할의 배분이 은사의 차등화를 정당화하는 위계구조가 아니라 공평한 수평적 구조 안에서 재정립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가능성에 대한 판단 여부는 객관적 법칙과 관련된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 가능성을 바라는 주체의 의지와 관련된 문제이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한 역사적 객관적 합법칙성이란 없다.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제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의 결과이다. 위계화된 권위구조의 재편과 동등한 은사의 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의 구조를 만드는 것도 그 의지의 문제이다. 물론 역사적 현실이 꼭 어떤 주체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 현실은 수없이 많은 우연적 요소들의 개입으로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잘못된 현실에 저항하고 새로운 기획을 하려는 의지를 막을 수는 없다. 설령 의도했던 최선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 결과는 의도했던 것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행위의 의도는 분명해야 하며, 그 의도 자체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전략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다소 다른 입장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 다른 입장들을 대별해본다면, 크게 '교회해체 전략'과 '교회재구성 전략'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해체의 대상이든 재구성의 대상이든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현실의 교회라는 것은 두 말할 것 없다.

교회해체 전략은 현재의 교회 존립조건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여 현실의 기성교회의 해체를 의도함과 동시에 탈교회적 주체의 형성을 의도한다. 엄연히 교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탈교회적 주체의 형식이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을지는 열려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인 전략은 일체의 교회 중심주의를 부정하며, 탈교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 더불어 교회가 진정한 소통의 구조를 갖추기를 지향한다.

교회재구성 전략은, 교회해체 전략의 모호성을 극복해보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현실의 권력에 포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권력을 재현하고 있는 현실 교회의 해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해체의 전략과 재구성의 전략은 근본적인 입지점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엄연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그 구체적인 대안을 찾으려 한다.

우리 현실에서 대안을 추구하는 많은 실천 사례들의 유형을 대별해 각기 어느 사례가 해체의 전략에 입각해 있고 어느 사례가 재구성의 전략에 입각해 있는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굳이 말한다면 아마도 많은 실천 사례들이 재구성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잠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초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대별해 본다면 여전히 미묘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체의 전략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강조하고 따라서 교회적 존재방식을 그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면, 재구성의 전략은 그리스도인의 그 다양한 존재방식 가운데서도 교회적 존재방식이 여전히 유력한 형태라는 점을 유념하여 그 변화를 시도한다고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인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주체성 제고 문제는 확실히 교회재구성 전략의 범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적 존재방식을 부정한다면 이미 '평신도'라는 말과 그 지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4. 평신도의 주체성을 저해하는 구체적 요인들


교회 본연의 요청이자 동시에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교회 구조가 쉽사리 변하지 않고 권위적인 위계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안의 요청이 절박하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의 구조 자체가 강고하다는 것을 말한다. 위계적인 교회 구조를 강화하는 요인들은 교회 안팎으로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① 우선 교회의 위계적 구조는 현실 사회의 재현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외적 규모를 중시하는 일반적 현실, 효율적인 능력 배분이라는 측면을 중시하는 일반 사회의 인사관리와 지도력 설정 방식은 교회 안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생활방식마저도 교회는 일반 사회의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사실은 교회의 구조 개혁이 일반 사회관계의 개혁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② 사회적 관계의 교회적 재현은 대개 개별 교회 단위에서는 물론 상층의 교단 차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흔히 평신도의 주체성, 또는 교회운영에서의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말할 때 개별 교회 차원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을 움직이는 힘의 관계는 그 문제를 개별 교회 단위에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교회들에서 개혁적인 조치들을 취할 때 그것이 교단의 법에 위배된다고 하여 문제시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교단 상층의 의사결정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면 그런 현상은 당연하게 보인다. 평신도의 교회운영 참여는 개별 교회 현장에서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교단 상층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것도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 요건이다.

③ 개별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 중심 구조의 문제는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교회 질서에서는 신학적으로, 제도적으로 목회자 중심의 교회구조가 보장되어 있다. 전임 사역자로서 목회자가 교회운영의 중심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 중심 구조가 사실상 목회자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교회가 마치 목회자의 소유처럼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는 마치 주인처럼 평신도는 손님과 같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앞에서부터 계속 지적해온 것처럼, 역할의 분담 또는 은사의 배분이 차별적인 위계구조의 정당화로 귀결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렇게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 교회구조에서 목회자의 역할은 신학적 제도적 요건 탓에 중요성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전임 사역자라는 조건은 교회 밖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평신도의 조건과는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목회자도 다른 직업을 갖고 평신도와 생활상의 동일한 조건을 갖추어야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등성이 실현되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교회 안의 임무에 전임한다는 조건이 교회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은 아닐 것이다. 현실의 교회가 전문 사역자로서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조건이라면 그 조건 안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④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주체성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자,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신도 자신들의 비주체성이다. 목회자가 평신도의 주체성을 적극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목회자로서 이 문제는 가장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수동성 또는 비주체성은 앞서 말한 여러 조건들 때문에 내면화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화란 일방적 강요의 결과는 아니다. 스스로 동의하지 않고서는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교회 가면 위로를 받고 싶고 쉬고 싶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진다. 그러한 기대는 소위 보수적 신앙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교회에서만큼은 번잡한 문제로 고통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양육하는 목회'의 유혹(?)을 받는 것은 신학적 제도적 정당성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평신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평신도들의 그와 같은 기대(?)는 단순히 정신적으로 미숙한 의존 감정의 발로만은 아니다. 일상의 삶에서 비롯되는 지치고 고단한 심신의 휴식을 누리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것은 보편적인 정서에 해당한다. 그 보편적 정서에서 비롯되는 욕구를 권위에 대한 순종과 일방적 의존의 관계 안에서만 충족시키려는 교회의 구조와 기풍이 문제일 것이다. 교회는 동등한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친밀함의 구조를 통해 그 욕구를 총족시킴으로써 건강한 주체로서 평신도를 세울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평신도 자신의 뚜렷한 자의식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를 진단하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주체성을 강화할 방안이 저절로 마련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적 대안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은사의 공평한 배분


현존하는 교회의 구조가 역사적 산물로서 상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조가 신성불가침의 어떤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역사적 현실에서 정당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오늘날 그 정당성의 측면보다는 폐해의 측면이 더 심각하게 노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구조는 당연히 해체하여야 하고 새로운 구조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아니 새로운 구조가 아니라 해체 그 자체가 오히려 정당성을 지닐 수도 있다. 앞서 말했던 교회의 재구성의 전략과 해체의 전략은 바로 이 문제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평신도의 주체성을 모색하는 시도 자체가 교회 재구성의 맥락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듯이, 어찌되었든 문제는 현재의 교회구조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에서 가능한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엄연히 목회자와 평신도가 구분되어 있는 교회 현실에서 그 관계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역할의 구분이 목회자의 배타적 권위의 독점으로, 그리고 그 권위에 대한 평신도의 수동적 복종으로 귀결되는 관계가 아닌 그 어떤 관계로의 재정립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구조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에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실적 실체로서 교회구조 자체 또는 공동체적 존재 형식 자체가 어떤 권위를 필요로 한다는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전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들에게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동체는 필요치 않다. 이 사회가 전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의 어떤 해명이 필요 없는 투명한 개인과 투명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완벽한 자유인들의 결사가 가능한  관계 안에서 대안으로서 공동체는 필요 없다. 그것은 마치 '새 하늘 새 땅'에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요한계시록 21:22 참조). 교회를 포함한 현실의 공동체들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뛰어넘으려는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기존의 관계와 병립하는 대안으로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항구적 실체가 아니고 기존의 사회적 관계가 존립하는 범위 내에서 잠정적 몫을 지닐 뿐이다. 이 사실은 달리 말하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아직 전적으로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다. 주체화란 하나의 과정으로 의미를 지닐 뿐이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가 철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 개인들은 모순적인 존재로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현실 사회 관계 안에서 공동체란 그와 같이 불완전한 개인들의 결사이다. 바로 이 점이 공동체 안에 어떤 외적 권위가 개입할 근거가 된다. 개인의 자율적 의지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그 현실이 그것을 보완하는 어떤 권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도적 형식의 정당성은 바로 이 점에서 제한된 의미를 지닌다. 모순적 존재로서 그 모순을 뛰어넘으려는 대안을 추구하는 주체들의 결함을 보완해주는 차원에서만 권위가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권위는 엄격하게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로부터 위임된 범위 안에 제한된 권위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인정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현실 교회의 제도가 역사적 상대성을 지닐 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한계를 넘어서는 권위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흔히 목회자로서 '소명'의 특권을 강조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는 권위가 정당화되고 있지만, 이른바 '소명'이란 목회자에게만 제한될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에서 이미 '만인사제설'이 제기되었는가 하면 일상의 직업까지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또한 제기되었다. 이 점에서 이와 같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철저화하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평신도 주체성의 강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는 이미 마련된 셈이다. 우리가 말하는 공평한 은사의 배분에 관한 신학적 근거는 그렇게 이미 오래 전에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 신학의 정신이 철저화되지 못한 가운데 현실의 교회가 다시 공평해야 할 은사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거나 위계 관계 안에서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에 오늘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현실을 문제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신학적으로 이미 은사의 공평성에 관한 근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정당화되는 현실적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일반 평신도와는 전혀 다른 전문적 교육과정을 통해 양성된다는 점이다. 교회에 관한 한 평신도들이 습득하기 쉽지 않은 전문적 소양을 목회자들은 습득한다. 성서해석에 관해,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관해 목회자들은 확실히 평신도들보다 우월한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교회가 엄연히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 자리를 잡고 있고, 교회를 구성하는 성원들이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목회자가 갖춘 전문성이 교회 생활 전 영역에서 배타적 우월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조건은 결코 아니다. 돋보이는 목회자와 익명의 평신도 관계 안에서 보면 평신도들은 그야말로 이름 없는 다중에 불과하지만, 평신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결코 이름 없는 다중이 아니다. 사회적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각기 고유한 개성과 몫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다. 그들의 개성과 몫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 하나의 은사를 소중히 하는 것이다. 교회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대안적 공동체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누리는 몫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 재현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목회자가 공공연하게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신도들 개인의 고유성 및 각각의 주체성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


6. 평신도 주체성 확립을 위한 대안


교회 안에서 평신도 주체성의 인정은 교회생활 전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예배에서는 물론 교회운영 전반에서 평신도들이 받은 은사가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에서의 역할을 잠시 생각하면(이 문제는 전 강의의 주제에 해당하므로 약술하기로 한다), 오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 예배의 중심 개념부터 바꾸어야 한다. 중세 카톨릭 교회 예배가 '영성체'를 중심으로 했고, 근세 개신교 교회 예배가 '말씀'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제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 예배는 '공동체의 참여'를 중심으로 할 수 있다. 예배의 중심개념을 '공동체의 참여'로 설정하는 것은, 성사의 집전과 말씀 선포에 독점적 권한을 갖는 성직자/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서 탈피하여 온 회중이 함께 드리는 예배양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이 점에 대해서는, 최형묵 "위계적인 교회의 신앙 문화", <대안교회 대안신앙> 강좌 자료집, 2003 참조). 이와 같은 예배에서의 참여 정신은 곧바로 교회제도 및 그 운영의 차원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평신도의 능동적 주체성을 저해하는 여러 제도들을 타파하여 최대한 평신도의 의사결정권을 존중하는 제도의 수립 및 그 제도의 취지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 운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평신도의 주체성을 저해하는 여러 차원 가운데 역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개별 교회 차원의 구조와 관행이다. 현재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는 정확하게 직분에 따라 차등화된 참여-배제 구조로 되어 있다. 직분이 분명하게 위계적 서열관계로 설정되어 있고 그 서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권 또한 결정된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안은 그 위계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이미 위계관계 안에서 그 역할이 확정된 직분 자체를 재검토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직분 자체를 재검토하거나 폐지하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의사결정 구조만큼은 꼭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실질적으로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현재의 교회구조상으로 볼 때, 대의기관으로서 역할하는 당회나 제직회보다는 가능한 한 전교인의 총의를 모을 수 있는 공동의회를 사실상 최고 의결기구로 재설정할 수 있다. 교회의 규모상 전교인의 총의를 상시적으로 모으는 것이 어려워 의사결정을 대의기구의 효율성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한다면 그 대의기구 자체를 기존의 직분 중심과는 달리 활동단위 중심으로 바꾸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와 같은 대의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난관에 부딪힐 만큼 교회의 규모가 방대하다면, 이미 그 교회는 평신도 주체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회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가늠하기 쉽지는 않지만,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한 적절한 규모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평신도의 주체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형교회의 구조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교회 형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의사구조를 시도할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시도는 개별교회 차원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지만, 예컨대 기존의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들이 교단의 헌법에 명시된 교회정치 제도에서 이탈할 때 그에 대한 제재는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도 있다. 이 점에서 교회구조의 개혁은 개별 교회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단 상층의 구조를 바꾸는 것과 병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교단 상층의 구조개혁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개별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동할 때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데 교단의 상층구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개별 교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이 교단 상층 구조에 의해 저해를 받는 경우라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개별 교회 차원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도 상당한 모험을 필요로 하지만, 교단의 상층 구조와의 관계에서도 모험은 불가결할 것이다. 새로운 대안적 교회는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정한 교회됨을 내세우기보다는 교파적 정체성, 그것도 교회 제도상의 정체성이 강조될 뿐인 오늘의 경직화된 교단 구조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평신도 주체성을 보장하는 교회의 대안은 요원해진다.

우리가 바라는 요체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본연의 교회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주체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이 한편으로는 남용되고 한편으로는 제약당하는 불균형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불균형을 뛰어넘어 동등한 은사의 배분 구조를 갖추기 위해 지금 평신도들의 각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 각성으로 지금 여러 차원의 장애를 뛰어넘어서야 한다.


7. 마지막 문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 재설정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은사의 공평한 분배라는 차원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동등한 관계이며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동역자라는 관계설정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공동체적 존재방식 자체가 일정한 권위를 요구하는 측면이 있고, 목회자가 그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원칙은 목회자의 권위는 엄격하게 교회 공동체 성원이 위임하는 범위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쌓은 신학적(성서 해석과 교회 전통 등과 관련한) 전문 소양, 그리고 일반 평신도들과 달리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생활조건 등은 평신도들로부터 위임된 일들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목회자의 몫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목회자의 권위가 평신도들로부터 위임받은 범위 안에 있다는 개념 자체가 평신도를 양육의 대상으로 보는 전통적인 목회의 관점에서는 낯선 것이다. 전통적 목회의 관점은, 평신도와 상관없이 목회자는 이미 배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목회자가 교회를 시작함으로써 평신도는 탄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소명' 또는 '은사'가 배타적으로 목회자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동등하게 내린다는 신학적 입장에서 보나, 오늘 평신도들 스스로가 교회를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 보나 그 타당성을 재검토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평신도만으로도 교회를 세우는 사례가 아직 그렇게 많지 않은 현실이 그와 같은 교회 탄생의 의미를 축소시켜보아야 하는 조건은 아니다. 아직 그렇게 많은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의 의의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어쨌든 그와 같은 신학적, 현실적 이유에서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리는 지금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통한 평신도 주체성 강화라는 전제하에서 이 물음을 새삼 던지고 있다. 동등한 은사의 나눔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원칙적으로 교회생활 안에서 평신도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은 없다. 예배에서의 능동적 참여는 물론 교회운영 전반에서 능동적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직무에 전념하는 목회자와 달리 교회 밖의 일상생활 영역에서 자기 몫을 갖는다. 그 점이 교회 안에서 전문가로서 목회자와 구별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차이이다. 정신적 가치 면에서 마땅히 교회생활이 추구하는 가치가 중심이 되어야 하겠지만/되겠지만, 생활상의 조건은 교회의 직무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 평신도의 처지다. 바로 그런 조건 때문에 평신도는 교회 직무의 전문가로서 목회자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어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교회 안의 평신도의 경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저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모순적 존재로서 인간 일반의 조건 때문이고, 하나는 바로 방금 말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생활상의 차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전자의 조건에서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목회자도 인간이다. 그 점에서 목회자나 평신도 모두 동등하고, 또한 공동체 안에 인정되는 권위는 그야말로 공공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의 생활상 차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 권위가 목회자라는 특정한 사람에게 전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묘안은 달리 없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공히 그 권위가 인정될 수밖에 없는 맥락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이 독점적 권위로 귀결되지 않도록 제도로 보완하고 그 가운데 새로운 기풍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말한 평신도 주체성 확립을 위한 대안은 그런 맥락에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말을 해야 할 때이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기울어진 현실에서 그 관계를 공평하게 하는 길은 무엇보다 먼저 평신도 스스로의 각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신도들 스스로의 각성이 따라야 이렇게 저렇게 심사숙고한 끝에 모색한 여러 대안들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