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 기독교, 희망은 있는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12
조회
4392
창원대 교지 <봉림문화> 25(2002.가을) 원고


한국 기독교, 희망은 있는가?


최형묵


1.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 아니면 기대감


한 기독교인으로서, 게다가 '성직'에 몸을 담고 있는 이로서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은 편한 일은 아니다. 비판적 성찰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은 해도해도 끝이 없다는 절망감에 자괴감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몸담고 있는 종교 현실에 눈을 돌릴 수는 없다. 어쩌면 필생의 과제로 삼아 문제를 진단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솔직히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어째서 '자기 일'도 아닌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냐는 옹졸한 불쾌감 때문은 아니다. 어차피 그 어떤 종교이든 한 사회에서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일 수만은 없다. 아무리 고상한 영적 세계와 정신 세계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세속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종교는 그 세속사회와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종교인들 스스로 규정하듯 '영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명백한 '사회적 실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현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당연할 터이다. 그 관심은 종교가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사회적 실체로 인정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그러기에 당혹스럽다는 것은 관심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어째서 갑자기 종교현상이, 특히 기독교의 행태가 주목을 받고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대체 그 관심의 초점이 무엇일까? 요즘 종교, 특히 기독교의 현상이 볼썽사나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어떤 애정 어린 관심과 기대가 있어서일까? 그 관심의 저의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당혹스럽게 한다.

사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덕담보다는 험담의 소문이 빠른 법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의 발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는 짓이 예뻐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이라기보다는, 보다보다 못해 이제는 제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오는 질책성 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래도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름지기 종교란 이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개탄이요, 그러기에 그렇게 개탄하는 것은 단순히 패륜집단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더러는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반종교 반기독교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종교 특히 기독교가 정도를 걷기를 바라는 기대에 있다.  

그런 기대에서 나오는 기독교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사실 기독교 내부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늘 관심 기울여 온 문제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생각해 왔던 것들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반갑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럽기도 하다.

사회적 실체이자 동시에 그 사회와는 또 구별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실체로서 종교에 귀속되어 있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미묘한 감정은 당연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처한 그 미묘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문제시되고 있는 기독교의 어떤 현상들을 주목하고, 가능하다면 그 대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 미묘한 상황을 유념한다는 것은 문제를 진단하는 시각을 굳이 '내부의 반성' 아니면 '외부의 비판'으로 선택해 제한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의 문제는 소통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편집증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세간의 평가와 질책 역시 고립된 종교집단의 문제로 보지 않기에 제기되고 있다. 결국 지금 기독교의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단순히 종교현상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사회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의 현상들을 들여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언론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사태들과는 분명히 다른 경향이 있다. 예컨대 복지시설이나 기도원 등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리, 또는 소위 신흥종교집단이나 유사종교집단에서의 병폐 현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면들이 있다. 소위 '정통 교회' 또는 '공식 교회'로 불리는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사태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껏 한국 기독교의 개가로만 인정되어 왔던 교회의 양적 성장이 문제의 전면에 오르는가 하면, 그와 직결하여 목회자의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세습은 가장 관심이 집중된 문제다. 타종교와 전통문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 문제의 돌출 양상으로 단군상 훼손 및 불사(佛寺) 훼손 등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인 공통 관심사를 둘러싸고 표명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주5일근무제를 교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 역시 기독교의 보수성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이러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는 깊어가고, 그 기류에 편승해 기독교 비판 서적이 종교서적으로는 예외적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 또 다른 문제들이 파생하기도 한다. 최근에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발간한 동아일보사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구독거부운동으로 맞서는 것과 같은 경우다. 얼마 전에는 도올이 논어를 강의하는 중에 '역사의 예수' 연구방법을 공자에게 원용한 것이 기독교인들의 심사를 건드리기도 했고, 니코스 카잔스키의 소설로 유명한 <그리스도 마지막 유혹>의 상영을 둘러싸고도 기독교계의 논란은 만만치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하여 거부 입장을 표명한 이러한 사태들에서 기독교는 학문적 성찰이나 문화적 포용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들은 대개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태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계의 문제는 소위 '보수적' 기독교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최장기간의 파업사태를 초래했던 기독교방송(CBS) 사태는 극적인 노사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사장 선임을 둘러싸고 진통을 앓고 있다. 과거 민주화와 인권 운동의 중추 역할을 담당해왔던 사장의 거취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의 야심과 선택의 문제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 사태는 성직을 빌미로 사실상 교회 문제에 전권을 행사해 온 성직자들의 배타적 특권의식과 그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동시에, 비단 보수적인 기독교계에만 권위주의적인 성직자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감당해 온 기독교계 내에도 그것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소위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금권선거의 문제다. 교단의 총회장과 중요 교직을 뽑는 데 금권이 동원되고 있는 사례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을 정도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개탄하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게 여겨지는 현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여전히 많은 교회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한편에서는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표면에 비친 기독교는 어둡기 짝이 없다. 암만 밝은 얼굴을 그려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아 '어두운 자화상'을 그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3. 영향력의 확대, 공신력의 위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이례적으로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사실 오늘날 지적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많은 문제들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온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발적인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뿌리깊게 자리잡은 구조적 현상인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은 정확하게도 한국의 근대화 전략과 동맹관계를 맺은 데 그 한 요인이 있다.

기독교 교회사가의 지적대로 처음 한국 기독교는 일종의 '힘의 종교'로 수용되었다. 조선의 봉건사회 말기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수용한 한국인들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사실상 동일시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발전한 서구 국가의 힘의 원천은 기독교 신앙에 있는 것으로 비쳤다. 그러한 인식은 기독교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개신교의 본격적인 선교와 더불어 학교와 병원 등 근대 서구 제도 또한 활발하게 이입되었다. 그 영향하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말단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해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그 힘을 실감하기도 한다. 일찍이 천주교 박해시대 <황사영백서>에 나타난 것처럼 서양 군대의 힘으로 조선의 개항과 선교의 자유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그러한 일상의 경험을 통해 강화되었다. 지도급 인사들 역시 기독교 수용을 서구적 근대화와 동일시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로 인식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양대인 의식'(洋大人 意識)이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곧 서양의 힘있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종의 변형된 사대의식이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운동의 다양한 노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신앙의 양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중심의 선교사 의존하에 있었고 그 안에서 신앙의 형태 또한 고착화되었다. 때때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선교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평양 전쟁 이전 미국과 일본의 묵계적 동맹(카스라 태프트 조약)하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의 비정치화를 시도하였다. 여기에 교리에 대한 맹종을 가르친 미국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고유 문화를 배척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책임을 방기하고 신앙의 개인화와 내면화를 고착화시키는 데 절대적 기여를 하였다. 힘에 대한 의존과 더불어 배타적 성향의 한국 기독교의 특성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실질적으로 힘을 지닌 세력이 된다. 어느 면으로 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 세력은 미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친미 반공주의 국가 체제의 핵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한국은 전형적인 종교다원 상황이었고 1948년 정부가 '정교분리 원칙'을 헌법에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제1공화국은 정책운영 면에서 사실상 '기독교 국가'로 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독교(개신교) 인사의 광범위한 공직 사회의 진출이 이루어진다. 또한 당시 기독교(개신교)는 전후 미국의 원조 물자를 보급하고 혜택을 누리는 민간부문의 거의 유일한 독점 창구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사회 각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한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후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에서 지속된다.

경제성장 정책이 본격화되었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 기독교는 최대의 교세확장을 이루게 된다. 박 정권이 일면 친불교적 성향을 지닌 것은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에 그다지 의미있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는 경제성장 정책의 효과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렸다. 급격한 경제성장 정책으로 붕괴된 전통사회의 공동체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힘을 숭상하고 동시에 서구 근대 문명을 기독교와 동일시하였던 기독교에게서 경제적 근대화의 성취는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되었다. 양적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경제규모를 키운 방식은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구현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공세적인 성장 전략은 공세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더욱이 근대화의 모범국가인 미국이 잘 사는 이유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고 못사는 나라들은 비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성장과 교회의 양적 성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면관계로 인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종교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대표하는 세력이 된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분포를 보더라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예컨대 2000년 기준으로 우리 나라의 종교인구 비율 현황은 불교 26.3%, 개신교 18.6%, 천주교 7%인데, 국회의원 273명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은 무려 64.8%(개신교 39.5%, 천주교 25.3%)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단순 비례를 넘어 과잉 대표하는 현상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 사이에서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적 공신력의 측면에서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 까닭은 한국 사회 근대화의 병폐를 기독교 역시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4. 욕망과 배제의 구조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지니는 양극의 모순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리지만, 그 욕망 충족의 한계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당한다. 창업 신화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신화를 이룰 수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1등을 향해 경쟁을 하지만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1등뿐 나머지 사람은 모두 패배자가 되고 만다. 광고의 문구처럼, '누구도 2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 냉혹한 현실이 바로 근대 자본제가 사람들에게 강요한 삶의 양식이다. 한국 기독교가 근대화의 병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용인할 뿐 아니라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기독교가 근대화의 성공과 더불어 영향력 확대에 성공했지만, 근대화의 병폐가 노출되는 순간 공신력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그 사회의 병폐와 기독교의 병폐가 얼마나 닮았는지는 아주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간에서 지적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의 문제는 경제적 정의를 등한시하고 규모만을 키워온 경제 그 자체와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사실 양적 규모로 '성공'을 거둔 소위 대형교회는 1,000명 이상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2%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교회의 거의 60%는 50명 미만의 영세한 교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성공한' 교회를 모든 교회들이 선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분립하는 것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을 닮았고, 교회 세습마저도 재벌의 행태를 닮았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70%에 가까운 비율이 교회법상 절차의 하자가 없다면 교회세습에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절차상의 합법성 여부에 교회세습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의 독점적 소유와 배타적 특권이 문제이고, 교회도 마치 하나의 사유재산처럼 여기는 의식이 문제다. 후임 목회자를 찾기도 어려운 가난한 교회의 세습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가난을 세습할 뿐이다. 맘몬을 섬기는 세상을 넘어서야 한다는 교회가 맘몬의 포로에 매여 있는 현실이 문제다. 교회 안에서마저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사태, 공적인 종교 기관을 대표하는 지위를 연장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행태도 재력과 권력을 탐하는 일반 사회의 풍토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저 높이 계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세상의 법도는 그 어떤 것이라도 무가치하다고 여겨서일까?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심각한 윤리의식 부재를 발견한다.  나는 그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곧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들'라고 표현한다. '신앙 따로' '삶 따로'인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저 높은 곳만을 향하는 일방적 맹신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정상을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는 뒤를 돌아다보거나 옆을 둘러보는 일은 한가한 유희일 뿐이다. 앞을 선망하면 뒤에 쳐지는 것은 거들떠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냉혹한 법칙이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그대로 배어 있다. 그저 높이 계신 하느님만을 선망하는 신앙은 높은 업적을 이룬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선망을 낳고 그 선망은 이룬 것 없이 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불신앙의 탓으로 질책하게 만든다. 세상에 들어와 세상 만물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는 하느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몸으로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서의 근본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5. 진리를 독점한 사람들


주5일근무제를 교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여기는 태도,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역시 교리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그 입장 역시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주5일근무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눌 수 있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의 확대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계에서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으니 사람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그 말씀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신봉한다면 어째서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 해지기 전까지 지키지 않는지 의아스러워진다. 기독교가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문자적 진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근본 뜻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엿새 노동 하루 휴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노동과정 마지막 완성으로서 휴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계가 주5일근무제를 반대한 것은 일요일 예배에 대한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문제라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대책을 찾아야 할 일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곧바로 자본의 편을 드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은연중 그런 효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분명하게 노동의 경시 풍조를 낳을 것을 우려해서 반대한다고 표명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소위 공식적인 한국 기독교의 입장이 어떠한 사회세력에 가까운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에서는 특권적 배타의식에 사로잡힌 한국 기독교의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은, 그 문제가 소위 '이단 종파'로 간주되는 여호와의 증인들 때문에 제기되었다는 점이 한몫 거든 것 같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병역기피현상이 만연하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특정한 집단에 특혜를 베풀게 됨으로써 국민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대체적인 이유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살인 무기를 들 수 없다는 그들의 평화주의 교리를 반박하는 데서 더 분명하다. 기독교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역설하며 기독교인들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실 많은 문제가 내장되어 있다. 국가주의와 개인의 권리 문제, 병역 의무의 차등, 평화주의와 전쟁불가피론 등 실로 복잡한 문제들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여호와 증인의 경우 병역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살상무기를 들지 않는 '집총거부'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동시에 그 어떤 이유로든 잊혀지고 배제된 이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여호와의 증인 뿐 아니라 최근에는 불교도 오태양 군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신념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이들이 있다. 신념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고 그들의 주장의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까? 더욱이 무조건 거부도 아니고 대체근무 방안까지 모색되고 있는 마당에 양심적 병역거부 행위 자체가 곧바로 국민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말인가?

결국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기독교인들은 명시적으로 그렇게 선언하지 않은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그래서 열정이 과도한 이들은 노상에서 전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대기도 한다. 공식적 교회들에서 보이는 태도는 그와 같은 열광주의적 행태와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자기의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타자의 부당성을 외치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다.

진지한 학문적 연구 결과 또는 예술적 작품을 두고 신앙을 해치고 신성모독을 범한다는 이유로 단죄하려 드는 태도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력을 행사해 출간과 판매 금지를 강제한다든지 상영 금지를 강요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논증하고 토론하면 족할 것을 아예 실력으로 저지 차단하려는 행위는 신념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아적 태도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종교현상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전통문화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의 경험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은 진리 그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진리는 절대적일지언정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은 모두 상대적이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 하지도, 교회라는 집단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선포했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을 뿐이다. 기독교나 교회는 그 뜻을 과연 따르기 위해 헌신하는가 하는 점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6.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예수는 좋지만 기독교나 교회는 싫다." 이 말은 역사의 예수와 현존하는 기독교 및 교회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예수가 만일 다시 오늘 이 땅에 온다면, 그리고 기독교의 현실을 보면 뭐라 할까? 복음을 전하느라 애썼다며 '구원을 확신하는 이들'을 데리고 하늘에 오를까? 아니면 옛날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처럼 다시 외칠까? 아니, 그저 망연자실해 할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심문관>에서 그린 것처럼, 제발 우리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대심문관 앞에서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본 그 모습이 정확할지 모른다. 욕망과 권력의 후견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가 차지할 자리는 저 으리으리한 교회당이 아니라 오늘도 역시 십자가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예수는 분명히 교회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오늘 기독교와 교회를 되돌아보는 근거는 예수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가진 것으로 높은 방벽을 쌓았던 이들을 질책하고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나섰던 그 예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기독교는 이미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기독교와 교회의 어두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예수의 믿음을 살기 위해 애쓰는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들만의 천국'을 지키기 위해 급급해하기보다는 누구나 넘나들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기 위해 애쓰는 교회들이 있고, 자본의 효율과 경쟁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 때문에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갈라진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자신만을 정의의 수호자로 알고 안하무인의 패권을 행사하는 국가를 향해 진정한 국제사회의 평화를 호소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 또한 있다. 그 일을 위해 교파와 종교의 경계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가 궁극적 희망의 근거라면, 이러한 모습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희망의 근거들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미하다고 평가절하 할 일이 아니다. 그 믿음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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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