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국민의 이름을 팔지 말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18
조회
4718
<충남시사> 2002.11.19. 칼럼


국민의 이름을 팔지 말라


최형묵(천안 살림교회 담임목사 / 본지 칼럼위원)


나는 요즘 '국민'이고 싶지 않다. 걸핏하면 '국민'의 이름으로 허망한 말을 뱉고 허튼 일을 하는 정치인들 때문이다. 나는 동의한 적도 없는데 정치인들은 말머리마다 국민의 이름으로 이러니 저러니 한다. 정치인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다면 내가 국민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에 사는 이 최 아무개처럼 국민의 이름을 남용하는 정치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는 다소 양심적인(?) 정치인들도 있기는 하다. 그들은 '국민'이라는 이름 대신에 '대세'라는 말을 즐긴다. 얼마 전 당적을 옮긴 우리 지역의 국회의원도 '대세'를 따라 그리했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래서 나는 그 해당 지역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이제 천안 '시민'인 사실도 부끄럽다.

'국민' 대신에 '대세'라고 한들 문제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추상적 언사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정치인들의 안일한 태도다. 자신의 기득권과 정치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유권자들, 이른바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정치인들의 태도가 문제다. 그들은 언제나 표리부동하여 정직하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다. 그 정직하지 못하고 일관성 없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항상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를 즐긴다. '국민'이니 '대세'니 하는 말이 다 그런 경우다. 그 뿐인가 '지역의 발전과 화합' 운운하는 것과 같은 언사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이라면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국민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지역의 화합과 발전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 내뱉는 추상적인 언사에서 그 사람의 정견이나 소견을 확인할 수는 없다. 요즘과 같이 언어의 남용으로 도무지 그 진의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사정이 그러고 보면 우리는 유권자로서 스스로 '양과 이리떼'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추상적인 언사를 즐기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유권자들에게 분별력과 기억력이 요구된다. 정치인들이 얼마나 사리에 맞는 말을 하는지 그것이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따질 수 있는 분별력 그리고 그 말을 따라 실행하는지를 지켜볼 수 있는 기억력 말이다.    

온갖 궤변으로 자신의 영달을 좇으며 이리저리 떠도는 정치인들의 구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정비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국민소환제를 정착시키는 것은 물론 전국구 의원이건 지역구 의원이건 간에 당적을 이탈하면 의원직을 박탈하는 제도의 정비도 생각해봄직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도의 정비와 함께 꼭 수반되어야 할 것은 소위 국민의 대표라는 이들이 국민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사회적 기풍을 확립하는 것이다.

볼썽사나운 정치인들의 난맥상을 개탄하고 푸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그렇게 개탄하고 푸념하다 정치에 무관심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오늘 한국 정치인들의 속내가 아니겠는가. 그래야 아침에는 이랬다 저녁에는 저랬다 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떠받들기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기를 뽑아준 사람이 국민이기에 그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우리 현실에서 거기까지 바라겠는가. 그저 정치인들이 국민을 성가신 존재로라도 제대로 인식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분별력과 기억력으로 따지고 들고 질책하는 국민을 정치인들이 두려워하는 풍토 말이다. 그렇게라도 대접을 받는다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지도 않을 것이며, 천안 시민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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