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민족자존의 촛불이 세계평화의 불꽃으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19
조회
4071
<충남시사> 2002.12. 21. 칼럼


민족자존의 촛불이 세계평화의 불꽃으로


최형묵(천안 살림교회 담임목사 / 본지 칼럼위원)


지난 6월 붉은 물결로 뒤덮인 한반도가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는가 했더니,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즈음에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반짝이는 한반도가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군 장갑차에 무참히 짓밟혀 스러져간 효순이와 미선이는 그렇게 되살아나 온 나라를 밝히고 있다. 지금 연일 온 나라를 밝히고 있는 촛불은 다시는 그렇게 불행한 일이 이 땅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요 희망이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을 운운해가며 '불순한 세력'의 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화뇌동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누군가의 배후 조정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촛불을 밝히겠는가? 그것은 조작된 국민행동이 아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하고 비통해하며 희망의 불씨를 키우기 위해 그렇게 나서는 것이다. 짓밟힌 민족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이라면,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가슴 저려하는 이라면 누구나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미국이 최소한 그 재판만이라도 공정하게 했더라도, 사과의 태도라도 진지하게 표했더라도 국민의 좌절감이 그렇게 깊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은 계속해서 불난 집에 석유 끼얹는 듯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남북 관계를 방해하는 행동을 계속하는가 하면 조지 부시의 사과 발언마저도 지극히 사적인 유감의 표현이 고작이었다.

미국의 오만한 태도는 우리 국민들에게 한국과 미국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더욱 실감하게 해준다. 그 불평등한 관계의 대표적 사례로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있다. 그래서 거리에 나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살인 미군의 처벌과 미국 대통령의 공식 사과 그리고 소파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뭉개진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고 추락한 주권국가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수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거리를 밝히는 촛불은 그 이상의 의미로 승화되어야 한다. 민족적 국가적 불평등 관계 밑바탕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독단과 힘의 우위 논리를 거부하는 불꽃의 대열로 이어져야 한다. 미국은 우리의 딸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공무중 일어난 일이라 하여 미군의 우발적 범행과는 다른 것이라 강변한다. 그 논리에는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오만한 질시의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공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주한 미군이 한국의 안보를 돕는다는 것이다. 한국을 돕다가 발생한 일이니 그 정도 사건쯤은 양해해달라는 이야기다. 그 논리는 공무중이라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과실치사 행위마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덮어버린다. 만일 자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렇게 유야무야 할 수 있었을까? 결단코 그럴 리 없다.

미국은 세계 안보 파수꾼으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자국의 추악한 이익을 추구하는 야욕을 감추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도 알만큼 알지 않는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과연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가져다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늘 이 세계에 커다란 상처만을 하나 더 안겨주었을 뿐이다. 이라크에 대한 봉쇄와 공격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라크 문제가 평정되고 나면 그 다음 화살은 한반도를 향할 것이 틀림없다. 지금 이라크 문제로 골몰하느라 북한에 대해 대화의 여지를 남겨둔 것처럼 말하지만, 이라크 문제가 일단락 되면 그 태도가 돌변하리라는 것은 지금의 태도를 보아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미국에 요구할 것은 미국 대통령의 공식사과와 소파 개정만이 아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를 열등시하고 자신들만이 세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인종적 우월감이 잘못된 것임을 외쳐야 한다.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배제와 독단의 논리가 설 자리를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반미 분위기가 경제에 미칠 손실을 감안해 하루 빨리 오늘의 사태가 진정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한 미군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지 않았느냐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족이 민족으로 동등하게 인정받고 사람이 사람으로 동등하게 존중받는 일은 경제적 이해득실보다 우선한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세움과 아울러 모두가 존엄한 존재로 서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들과 우리의 어린 자녀들의 손에 쥐어진 작은 촛불이 그 희망의 불꽃으로 크게 타오르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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