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메마른 지혜, 굶주린 사랑 - 열왕기상 3:5~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8-06 13:40
조회
1255
2023년 8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메마른 지혜, 굶주린 사랑
본문: 열왕기상 3:5~15



솔로몬의 재판, 곧 두 여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한 재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각기 한 아들을 둔 여인들이 한 아이가 죽자 살아 있는 한 아이를 두고 자기 아들이라 주장한 사건에 대해 명쾌한 판결로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아기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여인이 엄마라는 판결이었습니다. 과연 지혜로운 왕다운 판결이었습니다(열상 3:16~28).
솔로몬 왕은 그렇게 지혜의 왕으로 기억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그의 이름은 아름다움과 영화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지혜를 가진 현인이었을 뿐 아니라, 성전과 궁전 건축이라는 대역사의 주인공이었고,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군주였고, 뛰어난 국제감각과 경영능력을 지닌 군주였습니다. 또한 그는 로맨스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극치를 다 경험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여러 지혜서들(전도서, 잠언)과 사랑의 노래(아가서) 등이 다 그의 이름과 관련하여 기억될 만큼 모든 것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솔로몬의 영화의 근원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지혜에 더하여 덤으로 부귀와 영화까지 누리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열상 3:13). 솔로몬의 이러한 태도는 후세 사람들에게 내내 귀감이 됩니다. 부귀영화를 구할 게 아니라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입증하는 모범으로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의 기원을 밝혀주는 오늘 본문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그 가치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역사가 전하고 있는 솔로몬의 치적과 그의 삶 전모를 들여다보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처해집니다. 성서의 주인공 가운데서 그 인물됨을 평가하기에 가장 난처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명기 역사는 그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명확한 신학적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느냐 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왕정을 세우고자 한 백성에게 선포한 사무엘의 경고(삼상 8:11~18)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신명기가 전하는 모세의 경고(신명 7:14~20)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만일 백성이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원할 경우 지켜야 할 왕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며, 그 병마를 얻기 위해 이집트로 가지 말 것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금과 은을 너무 많이 모으지 말 것이며, 겨레를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오로지 말씀을 묵상하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공정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적은 이 경고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러니 어찌 평가해야 할지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그저 모든 사람이 선망해야 할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깊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반면교사와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볼 수 있도록 솔로몬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고 있는 성서의 증언이 위대합니다.

본문말씀에 집중하며 솔로몬이 무엇보다 우선하여 지혜를 구한 사연을 헤아려볼까요?
먼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된 사실을 되새기며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정말 그토록 절실하게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교훈 그 자체일까요? 혹시 지혜를 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는 그 부산물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요?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관문으로서의 지혜일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은 지혜를 택한 솔로몬을 칭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네가 스스로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 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열상 3:11). 이 이야기는 솔로몬이 정말로 간절히 소망했던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오래 살아 왕위를 온전히 보전하고 싶은 욕망,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고 싶은 욕망 등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기대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진 ‘원수 갚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누구든 원한관계 때문에 속을 끓일 수도 있지만, 원수 갚는 것을 필생의 소망으로 간직한 사람은 보통의 경우 드뭅니다. 이 사실은 솔로몬이 처해 있던 절실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말해 줍니다.

그 사연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은 처음부터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유명한 스캔들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위 계승자가 되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적자인 아도니야에게 이어져야 할 왕권(열상 1:5; 2:15)이 솔로몬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왕자 아도니야, 장군 요압, 제사장 아비아달 등의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정적들이 그의 대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형 아도니야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왕권이 늘 위협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객을 보내 형을 제거합니다. 그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장군 요압마저 제거하고, 형 아도니야와 요압을 제거한 바로 그 인물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또한 솔로몬은 제사장 아비아달마저 낙향시켜 중앙정치 무대에서 퇴장토록 합니다. 아비아달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과 동고동락을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를 대신하여 제사장 자리에 사독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앉힙니다.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위협요소를 제거하고 솔로몬은 확고한 친정체제를 구축합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어떤 확증도 없이 솔로몬은 순전히 자신의 권력의지로 그렇게 나섭니다.
그의 말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솔로몬 왕의 국가발전 정책과 확장 정책은 내부의 불만을 누적시켜 여로보암으로 대표되는 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은 선왕 다윗을 계승하여 실질적으로 왕권체제를 확립한 왕으로서 왕궁의 건축과 성전 건축 등 대역사를 완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의 성전으로 기록된 솔로몬의 성전은 칠 년의 공사기간을 통해 완성되었고, 왕궁의 완공은 십삼 년이 걸렸습니다. 두 건축의 공사기간만도 무려 이십 년으로 그의 통치 기간 사십 년 가운데 절반을 대공사에 몰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별궁과 함께 도처에 요새를 지었으며, 군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였습니다. 무역을 위하여 배를 축조하는 일도 커다란 국가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대규모의 인력동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성전을 짓는 데 동원된 인력규모만 하더라도 단순 노무자 삼만 명, 운송노동자 칠만 명, 채석장 노동자 팔 만명, 그리고 그 작업을 관리하는 책임자만도 삼천삼백 명이었다고 하니 사실상 통치 기간 내내 동원된 인력규모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물론 성서에 기록된 그 인력동원 규모가 얼마만큼 역사적 실제와 얼마만큼 부합할지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솔로몬의 통치체제 자체가 국가 총동원체제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와 같이 통치 기간 내내 총력 동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통치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뒤집어보면 수없이 많은 저항세력을 양산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왕권 초기의 정적들로 곤경을 겪고 왕위 기간 내내 불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던 솔로몬에게는, 그 얽힌 관계를 무마할 수 있는 묘안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지혜를 간구해야 했던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정적들을 물리치면서도 명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묘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혜’는 솔로몬 왕이 개인적으로 난국을 타개해 나가는 데 절실한 묘안으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은 위대한 ‘문화군주’로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안정된 왕권을 기반으로 하여 대외팽창 정책을 실시하면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물질적 풍요에 걸맞는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이집트 등의 선진문물을 거침없이 수용하였고, 왕실에 지혜학교를 세워 학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의 이름은, 바로 그 선진문물을 수용한 면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은 탁월한 국제감각을 지닌 화려한 문화군주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곧바로 그 자신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국가적 부의 팽창과 화려한 외국 문화의 수용은 한편으로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켜나갔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영화는 겨우 그 자신만의 당대에 꽃피우고 사라질 운명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습니다. 옛 동맹의 전통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북쪽 열 지파의 이탈은 필연적인 수순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임종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사실상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열 지파가 다윗 가문에서 돌아서서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는 사실은 솔로몬의 통치의 성격을 단적으로 반증해줍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의 허상을 보게 됩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의 허상은 집요한 그의 애정행각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과도 결혼을 했고 수없이 많은 이방 여자들을 후궁으로 맞이했습니다(열상 3:1; 11:1). 후궁이 칠백 명에 첩이 삼백 명에 이르렀다고 합ㄴ다(11:3).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솔로몬 왕이 과도하게 여인들에게 집착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아름다운 남녀간의 사랑을 읊은 아가를 솔로몬의 작품으로 간주한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솔로몬은 사랑의 화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을 도대체 어찌 이해야 할까요? 대외팽창을 추구한 솔로몬의 정략상 당연한 결과로 보아야 할까요? 여인들에 대한 그의 집착은 어느 모로 보나 단순히 정략적 선택이라 보기만은 어렵습니다. 성서에는 수없이 많은 그 후궁들의 출신지가 일일이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 명 아니 칠백 명의 후궁을 필요로 했던 사실을 해명하지는 못합니다. 많은 문학작품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스바 여왕과의 로맨스도 국제관계 자체로만 해명할 수만은 없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외교상의 관례를 뛰어넘어 솔로몬 왕이 스바 여왕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성서는 다윗 솔로몬의 통일왕국이 분열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여인들 탓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방 여인들이 믿는 신들을 솔로몬이 용인한 탓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고 합니다. 이 평가에는 물론 남성주의 시선이 배어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성서 기자의 눈에도 솔로몬이 여인들에 집착한 행태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병적으로 여인들에 대해 집착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암투과정에서 성장하여,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손에 쥔 솔로몬에게 누구 하나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는 마음놓고 사랑을 베풀 수도 없었고 마음 편하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통치자로서 그에게 절실했던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는 냉혹한 현실을 헤쳐 나갈 방편은 되었을지언정 그가 정말 목말라하는 사랑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풍족한 사랑을 누린 것 같지만, 사실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갈증에 목말라 했던 사람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여인들마저 ‘소유’함으로써 사랑을 충족시키려 했으나, 그것은 결국 자신과 왕국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지름길일 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를 다 부여받고 있는 인물이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사랑에 굶주린 그의 어두운 그늘입니다. 사랑에 굶주린 그에게 주어진 지혜는 냉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로 얻은 영화도 덧없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헛되고 헛되다.” 솔로몬의 저작으로 알려진 전도서의 첫마디입니다. 물론 전도서는 솔로몬의 저작이라기보다는 고대 근동의 지혜를 모은 후대의 저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저작으로 간주되어 온 사실은 오히려 의미심장합니다. 어쩌면 그 책은 솔로몬의 인생 자체를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구하는 ‘지혜’마저 헛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전도서의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삶을 그저 선망하고 있을 때, 그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도록 일깨워주는 신앙의 전승이 있었다는 것이 위대합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과연 솔로몬만큼이나 세상에서 많은 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임금이 된들 무엇 하며 부자가 된들 무엇 하랴 하고 노래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솔로몬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도 그 영화를 누리려는 헛된 기대를 하기보다는 우리의 진솔한 일상의 삶 자체가 영화롭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정말 내면으로부터 갈구했던 사랑입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피니티: 무한의 세계로>를 보다가 출연한 한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광대한 우주 가운데 찰나의 미미한 점에 지나지 않는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사랑에 빠졌죠.” 바로 그 사랑이 모든 것을 의미 있게 해줬다는 답입니다. 오히려 매 순간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동력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진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통해 거꾸로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새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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