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위대한 정신의 유산 - 신명기 4:5~2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8-13 17:27
조회
1157
2023년 8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위대한 정신의 유산
본문: 신명기 4:5~20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는 그 이름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서에서는 그저 ‘말씀’(debarim)이었지만,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두 번째 율법’ 또는 ‘거듭되는 율법’이 되었고(deutro nomos), 오늘날 많은 번역본들이 그 의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제한하는 경고와 더불어 주어진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왕위에 오른 사람은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되어 있는 이 율법 책을 두루마리에 옮겨 적어,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신명 17:18~19). 두루마리에 다시 옮겨 적은 율법, 곧 ‘율법의 복사본’이라는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의 왕도를 일깨워주는 말씀 한 가운데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왕도(신명 17:14~20)의 요체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군사력을 확장하거나 군사동맹에 의지해서는 안 되고, 또한 재물에 집착하거나 화려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그 어떤 구성원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공평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 제목 자체가 그 교훈을 다시 환기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백성과 그 지도자가 거듭 새기며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신명기는, 출애굽기 등이 전하는 율법을 집약하여 반복합니다. 그러나 단순 반복은 아닙니다. 기원전 8세기 왕정시대의 불평등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기원전 6세기 유배기에 최종 편집되던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여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결론이자 동시에 이어지는 신명기 역사의 서론에 해당하는 책으로서 사실상 구약성서의 뼈대를 형성하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보다 두드러지고, 그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출애굽 이래 강조되어 온 이웃사랑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신명기의 서설로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의미(5~8), 그 법도를 기억하며 자손 대대로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9~10), 그 법도를 받은 사건에 대한 기억(11~14), 그리고 그 법도를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15~20)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장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를 따르게 되면 그 나라와 백성이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인정받고 칭송받는 것은 그 나라가 공의로운 법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사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돌보고 저마다의 권리를 보장해줍니다. 그것이 공의로운 법도의 성격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법의 정신입니다.
두 번째, 그러기에 그 법도는 내내 기억되어야 하고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말씀은 저마다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함으로써 그 법도가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 배경입니다. 따라서 법도를 기억하고 지킬 뿐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그 역사적 사건을 환기하는 가운데 법도의 의미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 법도를 받게 된 사건을 분명하게 환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일입니다. 율법의 요체, 법도의 요체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십계명은 단순한 금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해방된 자유민이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그 규범은 그야말로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 또는 물질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를 관계짓는 올바른 법도입니다. 사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돌보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어떤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공의로운 규범입니다.
네 번째, 본문말씀은 그 법도를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일깨워줍니다. 십계명(출애 20:1~17, 신명 5:1~20)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말씀으로서, 이 대목에서 그 의의가 더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형상과도 동일시되지 않고 오로지 말씀으로 백성들을 일깨워주신 하나님이기에, 그 어떤 형상이든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로지 그 말씀을 온전히 따름으로써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환기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님께서 용광로와 같은 이집트에서 건져내셔서, 오늘 이렇게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입니다”(4:20).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시는 그 억압의 굴레,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저마다의 권리를 인정하는 공의로운 법도를 따름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오늘 본문말씀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며 다시는 그 억압의 굴레를 매는 일이 없도록 오직 신실하게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그 진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자손 대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나라와 민족이 지혜롭고 슬기롭다 인정받을 것이라 합니다. 그 인정,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긍심의 진정한 근거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데 있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기억하는 사람들의 미래 향방을 결정합니다. 무릇 모든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의지와 소망에 따라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방식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오늘 주일을 평화·통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8.15 광복절과 가장 가까운 주일을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곧바로 이어진 분단과 전쟁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남북이 하나 되어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 평화로 남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8.15를 그렇게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동학에서 3.1운동으로 이어진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면한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저항운동이었지만, 실로 숭고한 정신을 그 밑바탕으로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이 상응하고 그 가운데 서로를 극진히 모시는 개벽을 바랐던 동학의 정신은 3.1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남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불어 세우는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3.1 독립선언의 요체입니다. 그 정신은 모든 사람이 공평해야 한다는 삼균주의(경제, 정치, 교육의 균등) 정신으로 이어졌고, 임시정부의 민주공화국으로 정체화되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지만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 좌우를 아울러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입장으로 또한 이어졌습니다. 언제 들어도 명문인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부력(富力)이나 강력(强力), 심지어 과학기술의 힘이 아니라 인의와 사랑을 배양하는 정신문화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던 꿈입니다. 비록 분단국가의 헌법이 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역시 그 정신의 전통에서 전적으로 비켜 서 있지는 않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형성된 진취적 정신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역사는 그 꿈이 좌절된 역사였습니다. 극단의 분단국가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남쪽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과 과학기술력도 갖추었지만, 그만큼 증오와 적대가 강화되었습니다.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정책이 적대의식을 강화했고,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 내면화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상으로’ 겪었던 세대의 상처는 ‘일상을 전쟁으로’ 겪어야 하는 세대의 상처로 전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곡을 넘어서고자 하는 분투 또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한 번 불꽃을 피운 정신세계의 빛이 그렇게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끊임없이 우리를 비추고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서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거역하는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도를 일깨운 역사가 이어지듯, 우리 역사에서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종 인용하지만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다시 환기합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은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연구하다가 묘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자살율과 살인율이 동반하여 급격히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연구결과를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보고서』(한국어판 2012, 개정판 2023)에 담았습니다. 1900년부터 2007년까지 경향을 살펴보니, 살인율과 자살율이 높은 시기는 공화당 집권기와 일치하였습니다. 그 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불평등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하기 쉬운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찬미하는 문화를 숭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식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는 ‘의도적 살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결론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향도 분명합니다. 포용적인 정책을 펼치는 민주당이 집권하는 시기는 반대로 그 비율이 낮아졌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회적 공동체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 아니 사회구성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정책은 그저 정치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현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토건세력과 정치세력의 야합으로 엉뚱한 장소를 축제장으로 삼았으니 잼버리 축제가 망가지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또한 당면한 상황에서 스스로 해야 할 몫을 챙기기보다 남 탓만을 하니 그 대응 또한 우왕좌왕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자살사건과 묻지마 살인사건이 빈발하는 것도 걸핏하면 편을 가르고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언사가 넘쳐나는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불행한 사태는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 연구결과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고양하는 규범과 정책이 권장되고, 그런 정책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이 지지를 받을 때 더 나은 사회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습니다. 칠면조가 성탄절을 기다리는 격으로 죽음으로 내몰리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어리석음에서 사람들이 돌이킬 때 사회는 더 나아집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전수함으로써 지혜롭고 슬기롭다 인정받고, 공의로운 법도를 구현한다는 자긍심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말씀을 뜻을 새기며 구현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 뜻을 따라 평화롭게 되도록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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