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닷새만에 만났으니 한 잔 허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9:49
조회
4488
<천안아파트신문> 칼럼 2002. 5. 5.


"닷새만에 만났으니 한 잔 허세!"


최형묵(천안 살림교회 담임목사)


가지고 나갈 게 없으면 측간의 재라도 짊어지고 나간다는 오일 장날! 사는 곳이 아우내 장터 근처이다 보니, 주말과 장날이 겹친 날 마나님께서 장에 가자고 하면 따라 나선다. 정확하게 말하면, 따라 나선다기보다 운전대 붙잡고 모시고 나선다. 마나님을 모시고 장을 보러 나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시내에 있는 대형 매점들 또는 백화점까지 포함해서. 어쩌겠는가, 마나님은 '장롱 면허'다 보니 그리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명감을 갖고 나서지만, 시내의 대형 매점으로 나설 때와 시골장터로 나설 때의 장보러 가는 기분은 거의 하늘과 땅 차이다. 까르푸나 이마트, 롯데마그넷, 겔러리아 등에 가지고 하면 거의 죽을상으로 질질 끌려 다니느라 마나님께 부담을 팍팍 주지만, 아우내 장터에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먼저 앞장을 선다.

꼭 순대나 잉어빵 한 봉다리 정도는 덤으로 얻어먹는 기쁨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저기 생기 띤 얼굴들! 뿌리 뽑힌 놈이나, 뿌리 내릴 놈이나 할 것 없이 싱그러운 야채와 모종들! '국산'이나 '중국산'이니 명찰 달고 울긋불긋 옹기종기 유치원생 마냥 앉아 있는 잡곡들! 만원에 석 장 하는 '빤스' 하며, 아기자기한 장신구들!

저 귀퉁이에 축 늘어진 강아지와 토끼, 그리고 그야말로 좁은 닭장에 갇혀 있는 병아리들, 또 대야에서 눈만 껌벅리고 있는 가물치 하며, 빠글빠글 몸 비비고 있는 붕어새끼들과 미꾸라지 새끼들이 안쓰럽고, 며칠 전 장가간 '삼춘' 대신 나와 아직 익지 않은 일손에 어그적거리며 이른 아침인데 벌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야채 가게 아르바이트생 총각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 옆에 좌판을 펴고 한 손으로 거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펼치고 있는 '뎀뿌라' 장사 아저씨의 손놀림이 경이롭다.

사시사철 꽃이며 나무를 파는 아줌마는 계절의 여왕 장미꽃 모종을 잔득 쌓아 둔다. 백 장미, 흑 장미, 빨간 장미, 연분홍 장미, 노란 장미! 그 곁에는 예전에 뉴스에서 한국산 비아그라의 원재료로 소개된 번데기를 파는 아줌마가, "정력제 뻔듸기가 한 되에 오천원!"이라며 아저씨들을 유인한다.

장터 한복판 '불법' 카셋트 장사 아저씨 리어카에서는 주현미의 노랫가락이 온 장터를 뒤흔들어 사람들의 흥을 돋구고, 그 가락에 장단을 맞추듯 마치 밴드 중간중간에 터지는 큰북 소리 마냥 저 건너 뻥튀기 아저씨의 "뻥" 소리가 흥겹다. 그 장단에 맞춰 벌써 흥에 겨운 병천 수신 아저씨들은 이른 아침부터 돼지 껍데기며, 순대며, '보신 알'이며 등등을 안주 삼아 한 잔 걸친다. "닷새만에 만났으니 한 잔 혀야지!"

동네 궂은 일 다해 주고 밥 한 끼며 술 한 잔이며 얻어먹는, 그래도 멀끔하게 생기신 아우내의 '명물' 일꾼 아저씨는 아침부터 부산하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그 양반보고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그 양반이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데 모자라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이 동네가 그 양반이 살기에 모자라는 것 같지도 않다. 저녁때면 어김없이 그 양반도 좌판에 앉아 한 잔 걸치고 얼굴이 불그레해진다.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은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시골 장터 풍경이다. 살아 있는 것마저도 죽은 것처럼 꽉꽉 묶어 진열해 둔 대형매장의 숨막히는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물론 편리한 것으로 따지면야 두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게 어디 그 편리함으로만 잴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 사는 냄새 팍팍 풍기는 아우내 장터를 내가 기꺼이 따라 나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도시 생활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 훌쩍 한 번 다녀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니 움직이는 데 부담도 없다. 매번 1일과 6일 날짜만 잘 맞추면 된다. 게다가 출출하면 한 그릇에 얼마 안 되는 순대국밥으로 한끼 식사까지 가볍게 해결할 수 있다.

이거 오해 살지도 모르겠다. '아우내 장터 번영회' 같은 데와 '결탁'한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런 단체가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각박한 세상살이 가끔 틈새를 열어 보고 싶을 때 시골 장터의 정취를 맛보시라는 뜻 외에는 달리 숨은 뜻은 없으니 오해들 없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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