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탄핵정국에서 맞이하는 4.15 총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9:51
조회
4403
* <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원고> 2004. 5월호


탄핵정국에서 맞이하는 4.15 총선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국회의 대통령 탄핵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


3월 12일 국회의 대통령 탄핵으로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까닭은 '우리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탄핵을 주도한 이들은 국민적 저항을 '노사모'를 위시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반발로 호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광화문 촛불행진에 참여한 한 시민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나, 노사모 아니라니까!"라고 쓴 피켓을 아예 몸에 걸쳤다. 물론 촛불행진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노사모를 비롯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탄핵정국으로 정당지지도가 열린우리당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탄핵에 반대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첫 번째로는 국회의 탄핵 가결이 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탄핵을 주도한 세력은 합법적 절차를 따랐음은 물론 다수결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강변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탄핵 직전부터 70%에 가까이 이를 정도로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했으며 탄핵가결이 이루어진 후에는 오히려 70%을 상회하는 반대여론이 꾸준한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야3당이 제기한 탄핵 이유, 특히 그 직접적 빌미가 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발언이 탄핵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탄핵을 가결한 것은 자신들의 위기감 때문에 국회 안에서의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횡포를 부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국회 3당 의원 193명의 의사가 결코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탄핵에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은 '주권찬탈'의 낭패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탄핵을 주도한 세력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 때문이다. "너흰 아니야!"라는 노래 가사는 그와 같은 국민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조로 하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배반감은 이미 상당히 고조된 것이 사실이다. 이라크 파병 결정, 그리고 칠레와의 FTA 체결 및 노동 정책 등을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민중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만큼 커다란 배반감과 상실감을 겪고 있다. 그러나 야3당이 그 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세력이 된다고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의 정권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현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구조적으로 결정지어놓은 세력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현재의 한나라당은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의 후예들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자민련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헌정유린을 밥먹듯이 행했던 세력이며, 부패한 한국정치의 표본이다. 노무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모든 역사를 청산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탄핵을 가결한 세력이 거기에서 면책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가 더욱 크다. 그러기에 국민들은 결코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는 세력이 마치 정의로운 심판관 행세를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위한 기회


그래서 오늘 탄핵정국은 복잡 미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나라당의 말대로 '친노' 대 '반노'의 대결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수구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그들의 의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일까? 그것도 선명해 보이지 않는다. 탄핵을 가결한 야3당은 자신들은 합법적으로 국민의 대표로 뽑혔다는 사실과 함께 탄핵가결 역시 합법적 절차를 따랐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하는 다수 국민들은 이 사태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래서 '민주수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지켰다고 하는데 민주주의의 위기가 왔다고 맞서는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이 사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꼭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상당한 발전을 해왔고, 소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오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더디지만 정상적인 궤도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다. 위태위태했지만 그래도 안착해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하여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의회, 그것은 대의제 정치의 근본 한계이기도 하지만 민의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조차도 미비하고 있는 의회 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나마 17대 총선에서는 1인2표제를 실시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지지율에 그래도 가깝게 의석을 배분하도록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그러한 절차마저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득표율과 합치하지 않는 의석배분이 당연시되었다. 여기서부터 국회는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민의를 왜곡할 수밖에 없었고, 소위 '철새' 정치인들의 당적 변경으로 대표성은 또다시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민의와 다른 정책적 결정을 하여도 소환할 수 있는 절차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국회의원은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권한을 남용해도 되는 것이다. 국민 대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절차와 장치를 최대한 갖추어도 얼마든 민의를 굴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것이 대의제인데, 그와 같은 절차와 장치 자체도 갖추지 못했다. 대표성 없는 대의제는 그렇게 버젓이 자리를 잡았고, 급기야 민의와 상관없는 탄핵정국을 야기하였다.

문제는 그와 같은 절차가 확보되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강력한 주권의 의지가 표명될 때에 비로소 그러한 절차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그 민주적 절차란 사실상 힘 겨루기의 결과로만 확보된다.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세력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스스로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몫을 챙기기에만 급급하게 되어 있다. 오늘 주권이 '찬탈'되었다고 분개하는 이들이 분명히 직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이른바 탄핵정국이 그 사실을 일깨우는 계기로서 몫을 할 때 이번 사태는 비로소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사태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 사기극의 한 기점으로 전락될 뿐이다.


권력의 이동을 위한 선택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국민의 주권이 끊임없이 제도적으로 '찬탈'되어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덕분에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참여정부도 탄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민주화의 성취로 받아들여 왔다. 물론 그 과정은 민주화의 성취 과정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 과정은 사실상 한국의 보수세력 안에서의 권력의 재편과정이기도 했다. 통칭 '수구' 보수에서 '개혁'을 표방하는 보수로 권력이 이동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수구 세력을 압박했고, 위기감을 느낀 수구 세력은 쿠데타와 다름없는 상황을 촉발시켰다. 이 사태를 분명 의미 있게 평가해야겠지만 이 사태가 사실상 피차 한끝 차이인 보수 세력 사이에서의 승패를 가르는 구도로 고착된다면 지금 뜨거운 국민적 저항은 보다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전 기회로서 성격을 잃게 된다. 3당에 대한 지지도의 추락과 함께 열린우리당에 대한 급격한 지지도의 상승은 위험한 조짐이다. 마치 그렇게 뜨겁게 타올랐던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결과가 고작 노태우 정권의 탄생으로 사실상 군사정권을 절차적으로 정당화해줄 뿐인 결과를 낳았던 것과 사실상 다를 바 없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국민의 주권은 또 다시 합법을 가장한 절차를 따라 '찬탈'될 수 있다. 마땅히 수구 세력을 심판해야겠지만, 그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보수 세력의 강화로만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혁'을 표방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펼침으로써 민중의 생존권 자체를 위협해 왔고,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내모는 정책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의 보수 세력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말한다. 당리당략을 따른 3당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4.15 총선은 그 책임을 묻는 유일한 기회는 아니지만, 지금의 국민적 저항의 본질을 표출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열린 공간을 저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상황은 극우 르펜을 견제하기 위해 시라크를 당선시켰던 프랑스 대선에 견주기보다는 이라크 파병 책임을 물어 기존 집권 국민당 대신 파병불가를 내세운 사회노동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스페인 총선에 견주는 것이 옳다.

우리에게 선택의 폭이 제한되어 있기에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과연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는 정책에 제동을 걸고 다른 대안을 내세울 수 있는 책임 있는 대안 세력이 존재하는지 그 의구심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 대안 세력을 만드는 것은 주권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치적 공간을 열어 가는 것은 주권자의 몫이다. 총선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총선의 기회로만 그 정치적 공간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총선에만 목맨다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른다. 표면상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총선 연기와 헌법 개정 논의가 심심치않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정치적 술수로 또 어떤 파국의 국면을 만들어 사태를 반전시키려는 음모를 막아야 한다. 총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총선 이후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정치적 주권의 의지가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 허구적인 국익 논리나 알맹이 없는 경제성장 논리에 호도되어 스스로의 생존권 기반이 무너지는 사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역할  


교회가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어려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교회 안의 다양한 구성원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앙 자체가 현실의 특정한 체제나 세력에 절대성을 허용하지 않는 보다 근본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현실 적합한 판단을 멈출 수도 없다. 신앙은 또한 구체적 일상에서의 육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교회는 상대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 기준을 제시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회적 약자들이 떳떳하게 자기 권리를 누리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이루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묵묵히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휘둘리는 사람들, 이들이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이 분명하다면 정치적 선택의 결단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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