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9:57
조회
4907
대전노회 북부시찰회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 (2002.5.)


최형묵(천안 살림교회 담임 목사 / 대전노회 북부시찰회 서기)


1. 준비와 진행 과정  


성서의 현장을 방문해야 성서의 진수 곧 복음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의 지리적 환경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성서의 배경을 이해하고 더불어 진실에 접근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특히 성서 자체가 구체적 시공간 안에서 형성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역사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심오하고 다양한 상징세계를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신앙의 안목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그 상징세계와 독특한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그에 영향을 끼친 자연적 환경과 문명을 이해하는 것은 유익하다.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성서를 들여다 볼 때 그 배경을 더 잘 알고 싶은 기대를 늘 가지고 있다. 더욱이 매 주일 성서의 본문을 근거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목회자의 경우 그 기대감은 더욱 높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 형편이다. 성지순례를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바쁜 목회 일정 가운데서 공백을 초래할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목회자들은 바로 이러한 장벽에 부딪혀 마음은 원이로되 성지순례를 쉽사리 엄두 내지 못한다. 특히 영세한 교회들이 많은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 채 주변 타교단의 동역자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을 보면서 그저 부러워하기 일쑤다. 마음을 먹어 봐도 개별적으로 결행하기도 쉽지 않고, 또는 각종 여행사에서 내놓는 '상품'이 미덥지도 않아 망설이게 된다.


이번 대전노회 북부시찰의 성지순례는 그런 현실에서 고무적인 하나의 사례로 자평할 만하다. 노회 안에서 평소 비교적 활성화되어 있고 응집력이 강한 시찰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성지순례를 결행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처음 의견이 제기되었을 때 좋다고 공감하면서도 사실상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종의 워밍업을 한다는 자세로 백두산과 중국선교 현장 방문부터 시작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기왕에 해외로 나설 바에는 총력을 기울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계획하자는 의견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성지순례는 계획은 처음 구체적으로 제안되고 공식 합의한 시점부터 결행하기까지 2년(2001-2002)을 준비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합의하였지만 실제 준비과정에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세한 교회 형편이고, 더욱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재정적 부담과 함께 한시라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일정상의 부담이 더욱 분명했다. 또 더러는 각기 목회 현장에서의 어려움도 있었다.


우선 재정적 부담, 특히 개척 교회 목회자들의 재정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시찰회 예산 가운데 매년 개척 교회자 목회자 생활비 지원분을 성지순례 경비 지원 몫으로 지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매년 진행해온 목회자 행사를 축소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각종 재정을 긴축하여 남는 부분을 적립하였다. 예컨대 시찰위원회 회의시 지출되는 교통비는 아예 거의 지출하지 않았고 식사비 등도 최대한 절감하였다. 큰 행사를 위하여 모두 동의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렇게 2년간 모은 결과 상당한 재정이 확보되어, 개척교회 목회자에게는 200만원에 달하는 여행경비의 절반을 지원할 수 있었고 기존 교회의 목회자에게도 소정의 경비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존교회이지만 교회건축 등의 재정적 부담이 큰 교회 목회자에게는 개척 교회 목회자에 준하여 지원을 하는 식으로 융통성 있게 재정을 운영했다.    

타 노회와 평신도에게도 개방을 했지만, 처음에 원칙적으로 시찰 내 목회자 성지순례로 계획했던 만큼 그 지원은 시찰내 목회자에게 한정했다. 총 17명으로 단체 여행 최소 규모를 갖춘 순례단에는 부득이 참가하지 못한 시찰내 목회자 외에 시찰 내 평신도 부부와 타 시찰 그리고 타 노회 목회자 부부도 포함되었다. 사전 지원은 시찰 내 목회자에게 한정하였으나, 순례 여행 과정에서 소요되는 공동 경비(각종 팁)는 순례단에 참가하는 모든 일원이 공동으로 분담하여 운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또 큰 문제는 일정상의 부담이었다. 애초 12박13일의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순례 일정을 9박10일의 이집트 이스라엘 순례 일정을 줄여 일정상 약간의 부담을 줄였다. 대도시의 시찰과 달리 지방 노회 시찰의 경우 한 시찰이라도 하더라도 범위가 광범위(천안 아산 공주)하기에 13일의 일정에서 주일 아침에 귀국하면 어떤 지역은 2주간 교회 강단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뿐 더러 한 주간 비우는 것도 여유치 않은 개척 교회의 형편을 감안한 일정 축소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행사(감로여행사)에서는 축소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일정 축소로 불가피하게 입국할 수 없게 된 요르단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많은 곳을 순례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짜줬다. 선물 사는 기회가 없을까봐 염려할 정도로, 소위 팩키지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쇼핑 일정은 없었다. 그야말로 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단 한 번의 짧은 쇼핑 기회만 있었을 정도로 빡빡한 순례 일정이었다.


또 한 가지 우려했던 것은 이스라엘 내의 불안한 상황이었다. 최종 순간까지 일정의 변경을 고려해가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출발 예정(5월 13일)일 직전 극한적인 상황이 진정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현지에 당도했을 때는 그 바람에 순례객이 줄어들어 시간을 아끼는 효과도 있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한 시찰 내 목회자들도 있어 아쉬운 면도 있다. 그러나 순례에 참가한 이들은 한결같이 성지순례 여행이 단순히 한가한 '여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례'라는 데 공감하였다. 한 군데라도 놓칠세라 바삐 움직인 여정도 만만찮은 과정이었고(밤이면 다들 녹초가 될 정도로...), 순례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 또한 엄청난 순례였다. 더욱 자신있게 성서의 말씀을 깨닫고 선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누린 것이다. 쉽지 않은 첫 시도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은 참가자들은 한 목소리로 2차 바울 선교여정 3차 종교개혁 성지순례를 계획하자고 입을 모았다. 다른 동역자들도 용기를 내볼 일이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2. 성지순례 소감(일정을 따라)


성지순례 일정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이집트에서의 출애굽 여정과 이스라엘에서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나뉘어졌다. 물론 엄격한 테마 여행은 아니기에 그 여정에서 접근하기 쉬운 군데군데를 뒤죽박죽 방문하기도 했고, 많지는 않지만 현지의 풍물과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경험하기도 했다.


아랍에미리이트의 두바이에서 2시간 정도 기착한 것을 포함해 16시간 비행 끝에 화요일 이른 아침 카이로에 도착했다.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한 고대문화와, 다소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의 실정이 뒤엉킨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국의 풍경에 설레는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대체로 반듯하고 잘 가꿔진 공항 주변의 부유한 지역을 벗어나자 사막의 모레먼지를 뒤집어써 뿌연 건물들이 조밀조밀하게 붙어있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거리의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거의가 고장이 났고 멀쩡해도 소용없고 차선도 희미했다. 우리 나라의 차들을 포함해 신형 고급차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지만, 우리 나라 같으면 벌써 폐차되었을 법한 차들이 백미러도 없이 생생하게 거리를 달렸다. 당연히 교통사고율과 소통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고율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낮을 뿐 아니라 소통상황도 서울에 비해 훨씬 나은 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경이롭지만, 더욱 놀란 것은 도심 한가운데 무덤집들(묘지)이 즐비하고 또 그 무덤집들에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시의 주택들은 대개가 붉은 벽돌 집들인데 선이 반듯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고, 대개가 일부층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위층이나 옆으로는 계속 공사중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모든 주택이 건축중인 듯이 보였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두서가 없고 게으르게 보일 만한 상황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형편에 따라 살아가는 이집트 사람들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삶의 방식의 한 단면인 것 같기도 했다.


본격적인 순례 여정에 들어가 맨 처음 카이로 시내에 있는 예레미아 기념 회당, 곧 예언자 예레미아가 이집트로 피신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교 회당부터 들렀다. 그리고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예수님 가족의 피신처라고 알려진 곳의 기념교회당을 들렀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코레아에서 온 것을 알아차린 남루한 행상인들이 "안녕하세요!"에서 시작해 "두 개에 일 불"을 외쳐대며 호객을 하였다. 어디서나 이 풍경은 반복되었다. 아예 남대문시장식으로 "싸요 싸요, 골라 골라!"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혼동한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니하우" "사요나라"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 피난 교회를 뒤로하고 이집트 박물관을 향했다. 서구의 식민 통치 시절 엄청난 분량의 문화재가 서유럽으로 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의 규모는 방대했다. 너무 방대해 다 볼 수는 없고 선별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투탕카멘 왕 유물과 성서에 최초로 그 이름이 등장하는 파라오 시삭 왕의 유물 등을 보면서 찬란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일단을 느낄 수 있었다. 대개 화보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 말고도, 미라와 함께 발견된 30천 여년 전의 정교한 직물도 놀라웠다.    

그 다음에는 이집트를 가본 사람에게나 안 가본 사람 누구에게나 익숙한, 카이로 외곽의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유적을 방문했다. 단지 무덤일 뿐인데도, 그 시설의 규모에 놀랄 뿐 아니라 지금부터 4500여 년 전 천문학과 기하학 고대 이집트 문명의 지혜가 총 집약된 결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단순히 어리석고 허황한 이방종교의 산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느낌이 압도했다. 그것은, 영혼불멸과 부활의 믿음을 간직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의 정수이기도 했다. 파라오를 신의 현신 또는 신으로 믿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세계를 고대의 주변 문명과 구별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의 코가 한결같이 문드러진 사연도 이 때문이다. 이방신의 숨결을 끊는다는 의미에서 서구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사실  성서의 세계는 고대의 주변 문명 그 가운데서도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도 우리가 지키고 있는 영생과 부활에 관한 믿음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우리가 볼 때는 불가사의하게 보일지언정, 그리고 무모해보이기까지 하지만 단지 그렇게 지나치고 말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끔 하였다.


그 다음 여정은 출애굽 여정과 직결된 곳들이었다. 3000여 년 전 히브리인들이 피땀이 고센 지역 방문이었다.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역에 해당하는 고센 땅은 히브리인들이 거주하며 강제노역을 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람세스2세?)이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국고성으로 비돔과, 신도시 람세스를 건설했다고 출애굽기는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 지역으로의 이동이었다.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면서 또 낯선 광경을 경험했다. 관광산업의 비중이 높은 이집트에서는 외국 방문객들의 안전에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카이로 경계에서 무장경찰들이  호위한 가운데 선도차가 따라 붙고 한 명의 경찰이 직접 관광차에 탑승했다. 이것은 카이로를 벗어난 이집트 전역에서 단체 관광객에게는 공통되는 관행이다.

결국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저녁 때 국고성 비돔을 방문했다. 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인공 언덕 흔적과 그 언덕 층층이 쌓여 있는 흙벽돌이 전부였다. 그리고 초라한 주택들과 널부러진 쓰레기,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이곳은 비교적 관광객이 드문 지역이라 남루하기 짝이 없는 행색을 한 아이들이 신기한 듯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시작한 사탕을 받아먹기 위해 순식간에 아우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가난한 아이들을 뒤로하고 첫 숙소로 돌아와 1박을 하고 다음날 고센 지역 가운데 또 하나의 지점 람세스를 방문했다. 거의 폐허가 된 유적지이지만 거대한 석상들과 고대의 시설들, 그리고 역시 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흙벽돌층을 확인하고, 그 어느 층에 히브리 노예들의 피땀이 어려 있겠거니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오고가는 길목에서 과연 비옥한 고센 땅의 실상을 확인했다.


그 다음 일정은 그 비옥한 고센 땅을 뒤로하고 광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관을 경험하지는 못하고, 위쪽의 수에즈운하 지하터널로 가볍게 통과하였지만, 광야 길의 실체는 곧바로 확인되었다. 지금은 나그네들을 위하여 일정구간에 수로를 만들어 놓고 경작지도 일구기 시작했지만 출애굽하던 그 시절에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야 길의 연속이었을 그 길을 지났다. 출애굽한 무리들이 사흘길 걸어 당도했다던 마라의 우물을 거쳐 달리고 달려 바위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 현장이자 동시에 아말렉 족과 전쟁을 벌였던 르비딤에 당도했다. 간간이 오아시스 지역에 자리잡은 베두인 마을을 지났지만, 아마도 르비딤은 광야 최대 오아시스 지역인듯했다. 지금도 제법 많은 베두인들이 양떼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곳의 어린아이들에게 준비된 사탕을 나눠주웠다.

그리고 시내산 아래 미디안 광야에 당도하여 여장을 풀고, 그 다음날 새벽 한 시에 시내 산 등정에 올라 예배를 드리고 일출을 목격하고 하산하였다. 시내 산 광야의 여정을 거치면서,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던 히브리 백성의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그 비옥하고 풍요로운 고센 땅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광야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물 한 모금 찾기도 힘든 그 광야에서라면 비록 자유가 없는 노예로 살아갈지언정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었겠다, 절감할 만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로 자연이나 그 어떤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역설한 신앙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해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정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었다면... 그러나 편리한 문명의 이기 덕분에 단 몇 시간만에 이스라엘 국경도시 에일랏에 이르러,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이스라엘 입국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스라엘 국경의 보안요원들이 모두 예쁜 여자들이어서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느긋하고 여유작작한 이집트 국경의 군인들과 근무요원들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콜콜해보이지만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서는 중요한 질문들에 답한 후 가방 하나하나와 온 몸을 검색당하는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일일이 일정을 확인받은 후에야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편의 관광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북상하여 사해와 쿰란 공동체 유적 주변의 광야를  지나고 유대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를 잠시 당혹하게 사태가 벌어졌다. 차에서 내리면 방열쇠 받고 가벼운 가방만 들고 들어가는 게 관례인데,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호텔로비에 이르렀는데도 방 배정을 받지 못해 한 동안을 서성대야 했다. 이집트에서 칙사 대접받다 시피 하다 이스라엘에서는 국경에서부터 홀대를 받는 듯해 다들 조금씩 언짢은 기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유대인의 두 번째 큰 명절인 오순절이었다. 그래서 온 가족 친지들이 호텔에 모여 명절을 쇠는 바람에 방이 빠듯해서 조정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 바람에 유대인들의 풍습을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셈이었고 저녁식사 때는 오순절 기념 포도주로 만찬을 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런데 또 당황했던 것은 단추를 눌러도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였는데, 그게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잠시 후에 알았다. 명절은 안식일에 준하는데, 단추를 누르는 것마저도 일하는 것에 해당해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는 자동으로 움직이며 층층이 오르내리도록 해 놨다. 어떤 호텔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우리로 치면 청학동 그룹에 해당하는 정통 유대인이 15% 가량, 빵떡 모자 눌러쓴 개량 유대인이 30-40% 가량, 그 나머지는 세속화된 유대인이라 하는데, 유대 율법의 전통이 지금까지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유대인의 명절과 안식일, 그리고 이슬람의 안식일이 계속 연이어지는 바람에 일정이 다소 뒤틀리기는 했지만 순례를 하는 데는 한산해서 좋았다.


다음 날 예루살렘 순례 일정은 복잡다단했다. 세례요한 탄생지 교회, 승천교회, 마가의 다락방, 주기도문 교회, 예수 눈물교회, 겟세마네 동산, 예루살렘 도성과 통곡의 벽 다윗의 가묘 등등을 순례했는데 그 가운데 절정은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순례였다. 실제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14개 지점을 하나하나 통과해 골고다에 이르렀다. 그 의미상 절정인 것은 분명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본래 원형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성서에 등장하는 처소마다 육중한 고래등같은 교회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당시의 현장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의 처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신앙심에 경의를 표해야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횟칠 떡칠이 되고 만 것 같아 유감이었다. 대개 비잔틴 시대 초기 유적에 십자군 시대에 재건되거나 덧씌어진 교회건축들이었다.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갈등 현장에,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뒤범벅이 되어 종교적 갈등을 생생하게 증명해주는 현장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라기보다 오히려 혼돈의 도시와 같았다. 물론 자연적 조건 및 지형적 조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도 큰 감회를 느낄 수 있었지만, 세계의 성지라는 예루살렘이 과연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거룩한 땅일 수 있을까, 한참 고개를 갸웃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 맞은 편 언덕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했다는 그 심정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예루살렘 순례의 더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을 먼 발치에서 내려다보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날 엠마오 마을을 거쳐 지중해변의 로마 황제의 도시 가이샤리아에 이어, 광야와는 전혀 다른 비옥한 지대인 이스라엘의 북단을 향했다. 갈멜 산과 전략요충지 요새 므기또,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과 가나 혼인 잔치집을 거쳐 이스라엘의 수원지 헬몬산 아래 단 지방을 포함한 점령지 골란고원 일대의 비옥함과 풍요로움을 확인했고 다시 남하하여 갈릴리에 도착하였다.

혼란스러웠던 예루살렘과는 달리 갈릴리는 그래도 옛 정취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기에 빼앗길 것도 많아 오히려 가난한 어부와 농부들의 고장이 된 갈릴리에 이르러, 우리는 예수님 시대 모형대로 복원한 배를 타고 선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호수변 도시 티베리아에 여장을 풀었다. 갈릴리 주변 가장 큰 도시인 오늘의 티베리아는 다소 술렁대는 유흥도시와 같은 느낌이었지만, 다음날 아침부터 막달라를 거쳐 그리 멀지 않게 쭈욱 연결된 갈릴리호수 주변을 순례한 것은 예루살렘에서의 혼란감을 진정시켜줄 만했다. 산상수훈이 행해졌다는 팔복교회와 베드로 고백교회, 오병이어 기적교회, 부활하신 후 식사를 나눈 바윗돌을 지나 예수님의 주요활동지인 가버나움에 이르렀다. 에수님 시대의 흔적을 지닌 가버나움 회당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앞, 예수님께서도 거하셨던 베드로의 집 유적도 확인했다. 지금도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살아가고 있고 농부들이 거름진 땅에서 농사를 일구고 있는 갈릴리 풍경을 보면서, 풍요로운 땅이기에 빼앗길 것도 많아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갔던 그 땅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의 체취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강행군이 순례여정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남으로 남으로 가던 중 요단강 세례 터를 들렀다. 강이라 하니까 대단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야말로 또랑이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투덜댄 이유를 알 만도 했다. 거기서 쭈욱 내려와 갈 때 지나쳤던 사해에 들러 물 위에 뜨는 경험을 하며 환호를 하고 생전 처음 머드팩까지 해봤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다 굳어버린 롯의 부인상이라 불려지는 소금기둥을 보고, 유다 마지막 항쟁지 마사다에 들렀고, 거기서 다시 롯의 새로운 정착지 소알 성을 들러 순례의 마지막 지점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에 아브라함의 우물을 보고 다시 광야를 거쳐 카이로에 도착한 후 하룻밤을 더 묵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귀국길 비행기를 타고 하룻밤을 지새워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9박 10일이 일정이 끝났다.


성지순례기 3


"불모의 땅은 없으며 거룩하지 않은 땅 또한 없다"



성서 현장 답사 여행을 하는 동안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환경과 신앙의 상관관계였다. 역사적 환경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자연적 환경과 신앙의 상관관계는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금방 떠오를 만큼 인상적인 자연환경이었다. 과연 그 환경이 그러한 신앙을 배태했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예컨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 광야의 환경을 목격하면서, 오직 야훼만을 부르짖은 그 신앙이 이해되었다.

또한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낮의 태양과 찬 공기가 스미는 밤의 대비, 짧은 기간 동안 계절의 순환을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비가 계속 내리는 우기와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건기의 극단적 대비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극단적인 선택의 신앙을 키워온 환경이라는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광야에서의 경험을 깊이 간직한 구약성서의 신앙 전통에서 심판의 하나님이 두드러진 반면, 신약성서의 예수의 신앙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두드러진 까닭도 이해할 만했다. 삭막한 광야에 반해 갈릴리는 물이 풍족하고 땅이 비옥했다. 지금은 휴양지로 각광받을 만큼 갈릴리는 넉넉하고 편안한 풍경이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았다고 전해진 유대 광야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공생애를 사셨다는 갈릴리의 대비도 인상적이었다.    

소위 성서 시대 가나안 지역은 결코 넓지 않은 땅이지만, 다양한 자연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광야에 인접한 남쪽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반면 헬몬산 아래 북쪽은 풍요로웠다. 따라서 성서시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남 유다가 야훼 신앙의 정통을 지킨 반면 북 이스라엘이 가나안 토착 종교들의 풍요제의를 쉽사리 받아들이게 된 사연도 이해할 만했다. 그 표상으로 남 유다가 인위적인 건축물인 성전을 하나님 임재의 장소로 삼은 반면 북 이스라엘이 단과 베델에 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요의 상징 금송아지('바산의 암소 떼들')를 제단에 세운 이유도 알 만했다. 남 유다의 시각에서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겼다고 보고 있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그 풍요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자연적 환경이 인간의 삶과 의식, 신앙에 이렇게 큰 결정력을 지니는구나 하는 것을 절감한 셈다. 자연환경을 거슬러 생존할 수 없기에 어떤 지역에서든 누구이든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흔히 '순리'라 한다. 요즘 환경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 또는 생태주의자들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 곧 자연에 동화된 삶의 양식을 강조한다. 옳다. 누구든 자연을 거슬러 생명을 영위할 수 없다. 인류가 자연적인 진화궤도를 이미 이탈한 생명체라 하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오늘 인류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전환을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성서의 현장을 보면서 우선 저마다의 삶의 양식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사실을 더욱 극적으로 확인한 것은 광야에서 발견한 생명들에서였다. 사시사철 조화로운 계절의 순환과 어떤 계절이든 적당한 햇빛과 적당한 비가 내리는 자연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생명의 존재방식을 확인한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광야 곳곳에 가시나무 같기도 하고 선인장 같기도 한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하면, 우리의 수박 축소판과 같은 '하다'라고 하던가, 하는 식물을 보면서 그 앙증맞은 모양과 생명력에 감탄했다. 또한 뿌리가 120여 미터까지 뻗는다고 하는 싯딤나누,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법궤를 만드는 재료로 쓴, 광야에서 유일하게 줄기가 솟는 나무도 경이로웠다. 선택의 여지없이 거룩한 법궤의 재료로 채택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광야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솟아 우뚝 서 있는 그 생명체가 거룩하게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불모의 땅처럼 여겨지는 광야 곳곳에, 물론 지하수가 있는 오아시스지역이지만, 베두인들이 자리를 잡고 양을 치며 살아가는 사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평화롭게 나그네들을 맞이하며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실이 놀라왔다.

또 한 가지 저의 눈길을 끈 것은 광야 한 복판에 삥 둘러져 있는 돌 표지들이었다. 그 실체를 확인해 보니, 이슬람을 믿는 베두인들이 기도 시간이 되면 기도하는 처소 표시라 했다. 그 때는 그저 흥미있는 장면으로 생각되어 사진을 찍어 돌아왔지만, 사진을 뽑아 놓고 지금은 황금 돔의 이슬람 모스크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 자리 사진과 대비해보면서 목격한 여러 장면과 겹쳐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스쳤다.


세상에! '세상에 불모의 땅이란 없다, 세상에 거룩한 땅이 아닌 곳은 없다.'는 깨달음이다.


출애굽한 무리들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설전을 벌였다(민수기 14장). 열두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똑같은 땅을 두고도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과연 그 땅이 풍요로운 땅이라는 데는 다들 공감하지만, 열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땅이라고 한 반면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과연 사실일까? 부분적으로 사실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르다. 결코 넓지 않은 그 땅은 다양한 자연 풍광을 보여준다. 남부의 광야에서 북부의 옥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성서는, 현재의 지명으로는 확실치는 않지만, 정탐꾼들이 마치 가나안 전역을 둘러본 것처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실제로 이들이 정탐한 지역은 가나안 남부 지역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남부지역은 사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다.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여리고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땅을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식한다. 광야에서 굶주린 탓에 헛것이 보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희망으로 그 땅을 바라본 것이다. 더더욱 확실한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 땅을 자신들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누리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 믿음이 그 희망이 그들을 인도하고 마침내 그들은 그 땅을 누린다.

그들이 그 땅을 누린 것은, 그 어느 곳도 불모의 땅일 수 없다는 사실, 그 어떤 땅도 거룩하지 않은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이 아니라 자유민으로 누리는 땅이라면 그 어느 곳도 옥토요 그 어느 곳도 성지라는 믿음, 그 믿음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가나안을 누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을 누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역사를 떠올리고 동시에 오늘의 갈등을 떠올리며 또 다른 생각을 하였다. 각각의 지역에서 벌어진 역사적 상황이 항상 같은 것이 아니기에 쉽게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라도 언뜻 떠올릴 수 있는 생각, '역설의 상황'이다.

옛 북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갈릴리 지역이 풍요로운 땅이라면 어째서 가난한 민중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을까?, 광야와 옥토의 중간 산악지대에 위치한 유다 지역이 오히려 상대적인 안정을 누린 사연은 무엇일까?, 그러나 지금은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기는커녕 세계 분쟁의 시원지가 되어 있을까?, 하는 등등의 생각이다. 자연적 환경과 어긋나 보이는 현상의 실체가 무엇 때문일까?


배타적 소유의식, 그것이 문제다. 풍요로움을 함께 누리기보다는 소수가 독점하려 한 데서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로 말미암아 갈릴리는 풍요의 땅으로서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향으로 알려졌고, 민중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졌다. 농토가 가장 넓은 전라도가 '반역'의 땅이 되었던 이치, 황해도 신천 땅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최대의 비극의 현장이 된 이치와 같다. 자연적 환경상으로 별로 자랑거리가 없던 유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군사적 요새이자 동시에 상대적으로 인위적인 질서와 전통이 강하게 자리잡았던 곳이다. 성서시대 상대적인 안정을 누린 실상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은 힘에 의한 지배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했고, 왜 성전을 허물라 했겠는가?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그 후 역사에서도 예루살렘은 힘에 의한 지배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현상은 되풀이되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분열과 갈등의 땅으로 돌변시킨 것은, 지배의 욕망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로 자유를 빼앗겼던 그 삶의 또 다른 반복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후의 대로마항쟁지  마사다에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또 다른 지배의 욕망을 함축하고 있다면 불순하다.


시민권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또한 거대한 성전이나 모스크를 갖추고 있지도 않지만 양떼를 몰며 살아가는 베두인들이 차라리 평화스럽게 보인 것도, 적어도 그들은 그 지배의 욕망에서 한 발치 떨어져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그 어떤 대표적 기구도 없이 살아가기에, 다른 집단이나 타민족을 지배한다는 꿈을 꿀래야 꿀 수 없는 그들이지만, 오히려 가진 것이 없기에 행복해 보이는 그들이었다. 척박한 땅을 저주받은 땅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도 항구적으로 독점하려기보다는 언젠가 또 떠날 수도 있는 곳으로 그저 지금 누리고 있을 뿐이며, 어디서나 돌 몇 개로 '거룩한 땅'을 표시하고 예배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이 피상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세계 어디에서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늘도 땅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우리는 새삼 깨우쳐야 한다.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그 어떤 땅도 옥토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어떤 땅도 거룩한 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떠한 상황도 절망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희망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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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