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아니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00
조회
5240
<진보평론> 2002. <서평>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2002.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아니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  


최형묵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신학)


1.


2000년 로마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서를 발표하여 교회의 과거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종교재판, 유대인 박해 등과 함께 십자군 전쟁이 그 과거 범죄 목록에 포함되었다. 서 유럽의 역사 또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전'(聖戰)으로 불리던 전쟁은 이제 참회해야 하는 과오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인식상의 중대한 변화이다.

그러나 참회의 선언으로 지난 날 '과오'의 유산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럽 기독교 세계와 아랍 이슬람 세계와의 해묵은 갈등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십자군 전쟁의 유산은 어쩌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랍 세계에서 새로운 십자군 국가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과 그에 이은 갈등의 역사를 포함한 오늘날 중동 문제가 양 세력의 연이은 각축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이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먼 옛날의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않으며 오늘의 정치 군사적 상황을 곧잘 십자군 전쟁시의 상황에 유비하곤 한다.  

또한 교황청의 상징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지배 역사로 더욱 확고해진 서 유럽 기독교 세력의 현실적 영향력 때문에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일반의 시각은 여전히 서 유럽 중심적이다. '성전'으로서의 성격은 기각한다 할지라도, '십자군 전쟁'이라는 명칭 자체도 그렇거니와 제1차 제2차 제3차... 등으로 불리는 전쟁의 국면을 나누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러나 아랍인들에게 그 전쟁은 2세기에 걸쳐 엎치락뒤치락했던 '프랑크인들의 침략 전쟁'이었을 뿐이다(아랍인들에게 중세 유럽인은 이렇게 '프랑크인'으로 통칭되었다).

레바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작가 아민 말루프(Amin Maalouf)는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그 전쟁을 유념하면서, '다른 편' 곧 아랍의 입장에서 그 전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아랍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의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여 일종의 '실화 소설'의 형식으로 2세기에 걸친 사건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아랍인의 편에 선 시각의 전이도 우리에게는 신선하지만 구체적 인물과 사건을 균형 있게 다루며 역사의 한 시기를 그려내고 있는 필치 또한 우리에게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2.


십자군 전쟁이 '성전'이 아니라 단지 서 유럽 세계의 동방 세계에 대한 야만적 약탈전쟁이었을 뿐이라고 시각을 정정한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에게는 그 침략전쟁을 겪어야 했던 이들 편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말루프는 그 무지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먼저 아무런 대비책 없이 갑작스런 침략 전쟁을 겪어야 했던 동방 세계 민중들의 고통에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중대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표면에 등장한 주요인물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기술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민중들이 겪었어야 했던 고통의 참상은 간과되지 않는다.

프랑크인들이 지나치는 길목은 그 어떤 곳이나 살육의 현장으로 돌변하였다. 십자군은 여러모로 잘 예비된 정예부대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의 명을 받아 대의명분을 내세운 왕들 및 기사집단을 선두로 해 어중이떠중이들이 뒤섞인 기괴한 무리들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들이 이교도들의 땅인 동방에 이르렀을 때 가혹한 참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통제하기 어려운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살육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그것을 성전의 명분을 떠받드는 이들은 이교도들에 대한 응징의 행위로 정당화했다. 공포의 살육과 약탈은 그렇게 행해졌고, 동방의 기독교도들에게도 그 참상은 비켜가지 않았다. 아마도 이교도들의 땅에 접해 있거나 그 한 가운데 있는 무리들도 순수할 리 없다고 본 탓일까? 예루살렘이 공략되었을 때 그곳의 무슬림과 유대교도는 말할 것 없거니와 기독교도들 역시 살육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아예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목표로 했던 십자군의 출정도 익히 알려져 있다.

살육을 면한 이들에게는 이전의 이슬람 지배하에서보다 훨씬 가혹한 조세를 징수당해야 했다. 그 전쟁 자체가 민중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전투와 협상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더 가혹한 고통이 안겨졌다. 예컨대 포로 교환시 부유층은 몸값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지만 몸값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난한 민중들의 이 고통은 침략군에 속한 이들에게도 해당되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이슬람 편의 관용의 덕을 그래도 누린 편이었다.  

아랍인의 편에 선 말루프의 시각은, 오히려 '야만적인' 서 유럽인들과 오히려 '문명화된' 이슬람 세계를 대비해 보게끔 한다.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은 프랑크인들이 행한 끔찍한 만행을 전한다.

예루살렘 함락(1099)과 학살 직전 1098년 시리아의 도시 마라에서 벌어진 참극은 아랍인들에게 프랑크인에 대한 인상을 결정지었다. "그곳이 야수들을 키우는 사육장인지, 내 고향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는 마라의 한 무명 시인의 탄식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었다. 평화로운 도시 마라는 점령당하는 즉시 살육과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주민 대부분이 학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도시에서 벌어진 참극의 상황은 십자군의 종군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에서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십자군의 지휘관들은 교황에게 보낸 공식서한에서도 그 사실을 알리고 있다. "마라에 주둔한 군대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엄습하였던 바 사라센인들의 시신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정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불가피한 식인도 광적인 의식도 아닌, 해명하기 어려운 병적 상황, 마성적 상황이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역사가들도 이 사실을 상세히 전하고 있으나, 20세기에 발간된 책들에는 유럽 문명의 전파라는 책무 때문에 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그 마라의 비극은 수세기가 지난 후에도 서 유럽인과 아랍인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깊은 골을 만들어냈다. 이 때 아랍인에게 비친 프랑크인들은 '호전적인 동물' 아니면 '식인종'이었을 뿐이다.

프랑크인들의 야만성에 대한 인상은 또 다른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신명'(神明) 재판이라 불리는 유럽인들의 결투와 처형 장면은, 꾸란을 따라 논고 변론 증언의 절차를 밟아 재판을 행하던 당시 아랍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잔혹극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앞서 있던 과학기술과 의술을 자랑하고 있던 동방의 입장에서 원시적인 서방의 의술도, 프랑크인들이 야만인이라는 아랍인의 인상을 강화시켜줬다. 상처 입은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그 다리를 도끼로 잘라내고, 환자의 병이 머리 속에 든 악마 때문이라 진단하고 두개골을 벗겨내어 소금을 문지르는 행위가 어찌 의술로 보였겠는가. 서 유럽인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의 사상의 빈약함에 놀란 아랍인들이 그들에게 감탄한 것은 오직 놀라운 '전투력' 뿐이었다. 프랑크인들은 전쟁중 맺어진 협약도 언제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면 뒤집어엎는 이들로 인식되었다.

서 유럽인들의 배타성과 이슬람 세계의 관용성도 양 세력의 대결에서 대비되는 한 측면이다. 역사에서 사라센 제국으로 알려진 초기 이슬람 국가 지배하에서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무슬림은, 비잔틴 제국 지배 시절 세워진 기독교의 성묘교회에 맞서 '거룩한 바위'(유대인은 이 바위 위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믿고 있고 아랍인은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믿고 있다.) 위에 황금 돔과 유대인의 솔로몬 성전 자리 위에 알 아크사 사원을 세워 이슬람의 위용을 자랑했을 뿐 예루살렘의 유대교도나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교황 우르반 2세의 십자군 동원령의 명분이었던 셀주크 투르크의 기독교도 박해도 실상과 다르다. 서방의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방 지배에 대한 야욕을 감추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오히려 침입자였던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교도는 물론 기독교도들까지 박해하였다. 그러므로 동방의 기독교도들이 오히려 이슬람의 지배를 그리워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 배타성과 관용성의 차이는 종교적 차원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 지배 지역에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조세가 징수되었다. 또한 전쟁 중 포로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십자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집트를 거점으로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쿠르드족의 명장 살라딘의 태도와 사자 심보를 가진 영국 왕('사자심 왕') 리처드의 태도는 이 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탈환시 전략적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을 구하고 도성의 파괴를 막기 위해 십자군에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기도 하였고, 십자군 포로 문제가 전투에 걸림돌이 될 경우에는 과감하게 포로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반면 지중해변 아크레 성을 점령한 리처드는 과감하게 포로들을 죽이는 편을 택했다. 전쟁 기간 내내 아랍의 포로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된 반면, 프랑크인의 경우 가장 강력한 저항을 하였던 지중해변 도시 자파의 주민들만이 유일하게 그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고 아랍의 역사가는 전한다.


3.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우리의 뇌리에 박힌 이 구호가 서 유럽인들의 얼마나 지독한 편견인지는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라는 구호가 어찌 회자되지 않는지 오히려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한마디로 말루프의 이 저작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그간의 무지를 넘어서게 하며 그 세계를 향한 의혹을 떨치고 거꾸로 서 유럽 세계에 대한 의혹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말루프는 이 책에서 단순히 시각의 반전만을 노리지 않는다. 말루프는 서 유럽 기독교도들을 '악마'로 동방의 무슬림을 '천사'로 전환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 세계의 실상을 전하는 것일 뿐, 그것이 이슬람 세계를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루프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데 훨씬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당시 바그다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아바스 왕조는 이슬람을 대표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 패자는 셀주크 투르크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내부는 단일한 패자의 지배하에서 통제되고 있었다기보다는 다양한 세력들이 부침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전통적인 중심세력인 아랍인들과 동편의 페르시아인, 그리고 새롭게 이슬람 세계에 부상한 투르크인과 쿠르드인 등 종족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분파들간의 정쟁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각기 왕조나 토호세력들 내부에서 권력 계승의 문제로 더더욱 어지러웠다. 이슬람 지배층 내부에서의 권력자의 죽음은 곧 권력투쟁을 의미할 정도로 권력의 승계를 둘러싼 갈등은 일상화되었고, 그만큼 권력자에 대한 암살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지배자들에게 서방의 프랑크인들의 등장은 이슬람 세계 자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서보다는 또 하나의 경쟁자의 등장인 것처럼 비쳤다. 토호세력들 가운데서는 전쟁 기간 내내 오히려 프랑크인들과의 동맹으로 이슬람 세계 내의 다른 경쟁세력을 견제하려는 현상이 지속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 십 년간 그 일대에서의 십자군 지배를 허용한 것도 사실은 그와 같은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동방의 이슬람 세력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히 기현상이었다. 그러나 프랑크인과의 동거를 택한 세력들에게서 그것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물론 거기에서 일반 민중의 안녕이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저자 말루프는 십자군 전쟁이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동방의 이슬람 세력의 대결이라는 기본 구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지만, 그와 같이 이슬람 내부의 문제를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는 대목에서는 지배의 욕망이 빚어낸 참극으로서의 전쟁의 성격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피차가 종교적 신념을 내세우고 서로가 '성전'임을 주장했지만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종교도 종족도 상관하지 않는 권력의 실상은, 거꾸로 종교적 신념도 민족적 내지는 국가적 경계도 지배의 권력욕을 충족시켜주는 한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현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말루프는 이 책에서 추상적인 반전론을 펼치거나 막연한 평화론을 제창하지 않는다. 2세기에 걸친 전쟁의 실상을 전하는 이 책에서 지배의 욕망을 추론하고 그로 인한 참극을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일 뿐이다.


4.


말루프는 분명한 자신의 의도를 갖고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서 유럽인들 또는 서유럽 중심의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아랍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루프가 정작 바라는 것은 오히려 아랍 세계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크게 보면 '이슬람' 세계일 수도 있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아랍' 세계이다. 아마도 아랍인, 그리고 상당 부분 아랍 세계에 동화되어 있으면서도 독자성을 갖고 있는 투르크인(터키)이나 페르샤인(이란) 또는 쿠르드인 등 말고도 아랍 세계에 동화된 적이 없는 지역까지 이슬람 세계를 묶어 말하면 훨씬 광대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말루프는 십자군 전쟁을 총평하면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서 유럽 세력의 동방 진출을 제지했다는 점에서 십자군 전쟁의 결과는 아랍 세계의 승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앞선 문명의 보고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던 아랍 세계는 십자군 전쟁  이후 세계의 중심축을 서 유럽에 내줬다. 그 점에서 아랍 세계는 표면의 승리와는 달리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루프는 진단한다. 이후 또 하나의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발흥으로도 치료되지 않을 만큼 그 쇠락의 상처는 깊었다. 그런데 말루프가 주목하는 것은, 아랍 세계의 상처는 십자군 전쟁으로 비로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부터 지닌 '결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결함으로 아랍인의 자기 결정권의 상실을 들고 있다. 2세기에 걸친 프랑크인의 점령 기간 내내 수많은 통치자들 가운데 진짜 아랍인은 거의 없었고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실권자들은 한결같이 아랍에 동화된 이민족 출신 인물들뿐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랍 세계의 쇠락은 이렇게 그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두 번째 결함으로는 아랍인들이 확실한 제도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동방진출 당시 프랑크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서 유럽의 봉건제도의 확립을 유념한 듯하다. 신명(神明)재판에서 드러난 것처럼 프랑크인들에게 야만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제도의 확립은 권리를 나누는 사회로서 장점을 낳았고 그것이 나중에 '시민'의식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아랍 세계에서의 재판은 합리적인 절차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실권자의 권력을 제한할 아무런 장치도 없었다는 점을 말루프는 주목한다.

아랍 세계는 유럽 세계의 그 장점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내내 수세적인 입장만을 취했다는 것이, 말루프가 지적하는 아랍 세계의 또 하나의 결함이다. 예컨대 프랑크인들은 아랍어를 배우는 데 열성적이었고 지적 유산을 수용하는 데 열성적인 반면 아랍인들은 정복자의 언어를 배우는 것을 타협과 배신 행위로만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표면적인 전쟁의 승패와 달리 유럽이 경제적 문화적 혁명의 기회를 누린 반면 아랍 세계는 쇠락과 암흑의 시기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아랍 세계의 병적 증상을 치료하기 위한 고언으로서, 이와 같은 말루프의 지적은 일견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너무 성급한 결론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서 유럽 세계에 대한 수세적 '증오'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은 공감할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순식간에 그 '증오' 대신에 '선망'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랍 출신이기는 하지만 카톨릭교도로서 서 유럽 문명의 시혜를 누리고 있는 그  자신의 조건 때문일까? 그 자신도 헤아리고 있듯이 정복당한 민족이 정복자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일까? '강요'나 '순응'이 아닌 차원에서 말이다. 따라서 이처럼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설령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탐색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점에서 말루프의 책은,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서구적 발전의 길이라는 과제 또한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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