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전쟁과 평화 - 양심적 병역거부를 생각하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02
조회
5116
2002.7.


전쟁과 평화 - 양심적 병역거부를 생각하며


최형묵


작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의 만남으로 한반도에는 모처럼만에 화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위태위태해 보이기는 했지만, 작년 말까지는 그런 대로 일관된 화해의 기운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금년 초 미국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뚜렷한 전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결정적 파국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암초들이 널려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사정이다. 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미사일 방어 체제를 북한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고, 또 영해를 통과한 북한 상선을 두고 강경한 대응책을 주장하는 목소리들 또한 우리를 불안스럽게 한다. 군사적 충돌, 나아가서는 전쟁까지 불사하자는 것인지, 심히 걱정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바로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 자체가 거꾸로 남북간의 평화공존과 이를 위한 민족의 주체적 결단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타의에 의존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불안정한 남북간의 공존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회적 논란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는 살상 무기인 총을 들 수 없다는, 여호와 증인의 신앙양심에 따른 '집총군사훈련거부'에서 촉발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총거부는, 엄밀히 말해 병역거부는 아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병역의무에는 응하되 살인무기인 총을 들고 살상훈련인 군사훈련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들의 태도다. 현행 법률상 병역거부를 하면, 1년6개월의 실형을 받도록 되어 있고, 군대에서 집총군사훈련을 거부하면 군형법상 항명죄에 해당하여 3년의 실형을 받게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와 같은 법률상의 조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군에 입대는 하되 집총군사훈련은 거부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민간교도소와 군교도소를 포함해 대략 1천6백 명이 복역을 하고 있고, 1년에 대략 600 명 가량이 감옥으로 향하고 있다.

흔히 기독교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으로 치부되고 있다. 나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앙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특히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사실상 신앙을 강요하는 전도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심지어는 목사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공세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려는 듯한 자세로 나올 때 심한 거부감을 느낀 경험을 수 차례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단죄할 의사도 없고 권한도 없다. 그리고 오늘 이 문제를 촉발한 데서,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이 소위 '정통'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이냐 '삼단'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자기가 지키고 있는 소신, 곧 양심에 따른 판단과 행동을 국가가 강제적으로 규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따지면 많은 논란이 제기되리라는 것은 뻔하다. 소위 상식적 수준에서 반인륜적인 행동을 낳을 수도 있는 신념을, 양심이라는 미명하에 보호할 수 있겠느냐 하는 논란을 촉발할 수 있다. 범위를 좁혀 반국가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신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해도 논란은 계속 제기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내지는 개정 논란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증인들의 집총군사훈련거부는, 상식적 수준에서 판단할 때 반인륜적 행위도 아니고, 반국가적 행위도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민으로서 의무를 기피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총을 들고 하는 군사훈련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하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다. 그래서 그 악순환을 막기 위해 건전한 대체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병역에 대체되는 사회봉사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상황을 보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남북한을 포함해 48개국이며, 징병제가 있는 나라에서 민간에서의 대체 봉사 또는 군대 내에서의 비무장 복무를 인정하는 나라가 독일 프랑스 등 30개국에 이른다(미국도 징병제를 실시할 당시에는 이를 인정하였다). 최근에는 분단국가인 대만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언론과 시민단체는 말할 것 없거니와 법조계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 5월 31일 18명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 대해 3년형의 실형을 선고한 군 주심판사마저도,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그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회적 여론을 반영하여 국회에서도 몇 명 의원들(민주당 천정배 장영달 의원)을 중심으로, 종교적 신념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인정할 수 있는 입법 추진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발은 엉뚱한 데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기독교계다. '특정 종교를 위한 입법'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 박영률 목사는 말한다.“이 법안은 종교간 형평성을 깨고 특정 종교에 부당한 혜택을 주는 것이다.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거의 100%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자. 과연 여호와의 증인만이 대상이 될까. 어느 종교든 전쟁을 거부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 수 있는 개연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특화하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도 예견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칫 병역기피자의 도피처로 악용될 수 있고 나아가 국방의 근간을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다.”/“...우리나라는 징병제 국가다. 이런 나라에 속해 살아가고 있으면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는 것은 일종의 ‘무임승차’에 해당한다. 그렇지 않아도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갖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법안은 국민들간의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특정 종교를 위한 입법, 위화감 조성, 악용의 소지 등이 그 이유다. 여기에는 신앙양심의 자유와 국가권력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부당한 권리 침해 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며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소중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연민(마태 8:14)도 끼어 들 틈이 없다.

뿐만이 아니다. 아예 교계의 어떤 지도자는 아예 '기독교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집총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여호와 증인들은 태도는, 사회적으로 위화감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기독교는 그 실체로나, 교리적으로 전쟁을 반대해 오지 않았다. 기독교 내에 평화주의자들, 반전주의자들이 늘 있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의 입장은 전쟁을 반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적극적으로 옹호해 왔다. 성서를 들여다 봐도 그렇다. 구약성서의 내용은 맨 전쟁 이야기다.


기독교의 전통에는 분명히 전쟁을 옹호하는 사상과 개념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전쟁'(성전) 이념 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의로운 전쟁' 이념이다. '거룩한 전쟁'은 성서에 그 표현이 등장하지 않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야훼의 전쟁'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 야훼의 전쟁은 히브리인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일어났던 전쟁, 그리고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 전형적인 유형이다. 이 야훼의 전쟁은 억압에 대항하는 히브리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찾아주려는 야훼 하나님이 그 주체가 되는 전쟁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로운 전쟁' 개념도 마찬가지다. '의로운 전쟁'과 함께 '불의한 전쟁'이 대비되는데, 불의한 전쟁이란 이웃나라를 정복하여 지배하려는 전쟁을 말하며, 의로운 전쟁은 훼손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당한 목적과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하는 전쟁을 말한다.

'거룩한 전쟁' , '의로운 전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있겠느냐, 그건 형용모순 아니겠느냐라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될 만하지만, 그러한 개념은 엄연히 분열되어 있는 인간 세상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등장한 개념이다. '거룩한 전쟁' 개념과 '의로운 전쟁' 개념이 꼭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 있다. 방어적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전쟁의 효용성을 인정한다는 점, 그리고 그 전쟁을 통하여 침해된 권리와 자유를 지킨다는 점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해방의 사건 맥락에서 옹호되는 전쟁은, 강제적인 힘으로 지배하는 세력에 맞선 히브리 노예들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흔히 말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바로 그 상황에서 '다윗'의 편에서 옹호되는 전쟁이다. 사무엘서 17장 45-47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말한다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여기에서 골리앗과 다윗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골리앗은 신체적 조건으로 보나 그가 갖추고 있는 무기들로 보나, 다윗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수였다. 다윗은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갖춘 무기라고는 무릿매 돌 다섯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교 대상은 소위 군사적 무기들이 아니다. 칼과 창과 투창 그리고 방패와, 무릿매 돌의 대비가 아니다. '군사적 무기'와 '하나님의 이름'이 비교 대상이다. 여기서 골리앗이 지니고 있는 무기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물리적 군사적 힘, 곧 폭력을 말한다. 그에 대항하는 다윗의 폭력적 무기란 돌덩이 다섯 개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군사적 무기들과 하나님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과 도덕적 이념적 정당성의 대결을 의미한다. 무릿매 돌은 그 정당성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무기요, 최소한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폭력을 상징한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다윗의 위대성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일화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상황을 상징하는 이야기이다. 이집트 대제국에서 도망쳐 나오고, 가나안의 지배세력에 저항해 싸웠던 하층 농민들의 가나안 정착은, 물리적 힘 군사적 힘의 논리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파라오와 야훼의 대결' '가나안의 지배세력과 히브리의 대결'은 곧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이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다윗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주변 지배세력과의 대결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바로 이와 같은 대결의 상황을, 이스라엘은 야훼의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께서 약한 이스라엘 편을 들어 이끈 전쟁이라는 것이다. 물리력 군사력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전쟁이지만, 야훼께서 친히 나섬으로써 이길 수 있다고 믿은 전쟁이다. 그 믿음, 그 정당성이 이집트 대제국의 지배와 가나안 군주들의 지배를 물리치고,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을' 때 야훼는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해방'의 전쟁을 수행한다. '야훼 전쟁', '거룩한 전쟁'의 정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야훼 전쟁의 기본 도식이다.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권리를 지키는 한계, 그 경계를 넘어설 때 그 전쟁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그 한계를 넘어 남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는 정복 전쟁으로서 변화될 때 전쟁은 더 이상 '거룩함'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 때 전쟁은 더 이상 '야훼의 전쟁'이 될 수 없고 '의로운 전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는, 거룩한 전쟁, 의로운 전쟁의 이념이 남용되어 왔음을 증언한다. 중세기 무력을 통한 기독교 왕국의 확장, 정치적 지배와 물질적 욕망으로 얼룩진 십자군 전쟁, 근대 제국주의 침략과 선교는 그 분명한 증거다. 거룩한 전쟁 이념의 오용과 훼손은 이미 성서시대에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의 주인공 다윗이 제왕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방민족에 대한 정복 전쟁을 수행한다. 그리고 후대의 왕들도 끊임없이 그 유혹을 받는다. 스스로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변 강대국과의 동맹을 통해 군사원조를 받으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바로 그 지배에의 욕망은, 해방된 자유민의 전사 여호수아마저도 무시무시한 정복자로 돌변시켜 버리고 말았다.    

군사력 증강을 위한 다윗의 인구조사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이야기(삼하 24장)는 그 경계의 이탈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물리적 힘과 군사력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는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경고와 종말론적 환상(이사 2:4; 미가 4:3-4), 그리고 시편 등의 전승(시편 20:7)은, 폭력에 의한 지배를 부정하고 있다.

요컨대, 성서는 지배의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 행위로서 전쟁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야훼의 전쟁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 결론은 아니며, 종국에는 모든 폭력이 종식되는 종말론적 평화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성서의 입장이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미가 4:3-4 / 참조 이사 2:4). 이것이 바로 성서가 염원하는, 모든 폭력이 극복된 새 하늘 새 땅이다. 이러한 전망은 모든 형태의 지배적 폭력을 거부한다. 타인에 대한 지배의 욕망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국가의 안보를 빌미로 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근거로 해 전쟁 자체를 옹호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것은 성서에 대한 맹목적인 문자주의, 교리적 맹신을 따르는 편의주의,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지배에의 욕망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적대적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는 불행한 현실에서 지배의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의 의미를 인정한 것이, 거꾸로 궁극적인 폭력의 극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사실은, '거룩한 전쟁', '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도 남발하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설령 많은 사람들의 상식에 반하여,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양심에 따라 집총군사훈련을 거부한 행위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다면 칭송받아 마땅한 행위이지 공격을 받아야 할 행위가 아니다. 적대적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상에서, 대항 폭력이 지배의 폭력을 막는 길이 될 수 있고, 따라서 그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은 그들의 행위가 순진해 보일지언정 그 행위가 비난 거리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순수한 믿음을 지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누구나 한두 번은 교통사고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에 살고 있다고 해서, 교통사고 한 번 내지 않고 당하지 않은 사람을 '똘아이' 취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사회의 양심과 인권의 또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한다.

지배와 경쟁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고, 따라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그들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지배와 배제를 당연시하는 그 폭력적 발상을 거두라는 경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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