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 이사야 6:1~1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6-04 16:23
조회
1217
2023년 6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본문: 이사야 6:1~13



예언자 이사야의 소명체험을 전하고 있는 본문말씀은,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낯섭니다. 표현 자체가 고대의 종교적 상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거니와 그 논리적 문맥도 언뜻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씀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광산에서 채굴하여 정금을 정련하듯 말씀의 의미를 새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먼저 실마리부터 말씀드리면, 예언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로서 하나님,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입니다. 이사야는 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단순한 신학적 사변의 결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앞에 선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세계를 뛰어 넘음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에 다가서는 길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데 이사야의 선포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개 예언자들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에 앞서 극적인 소명 체험을 합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한동안 예언활동을 펼치고 난 다음 극적으로 소명을 받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그 소명체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본문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것으로 전하지 않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고, 천상의 존재들 곧 스랍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사야 앞에 나타나십니다. 스랍들마저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뵐 수 없다는 관념의 표현입니다. 스랍들은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그 찬양과 함께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하는 고대의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이 때 예언자 이사야는 먼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신을 뵐 때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고대의 종교적 관념에서 일반적입니다. 이사야의 이 두려움은 예언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체험입니다.
이스라엘 옛 조상들의 시대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민족의 편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의례를 치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보증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서 하나님은, 그 전통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낯선 방식으로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함께 하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별안간 내 삶에 개입하여 내 삶을 교란시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비움을 요구합니다. 자기들만의 정당성을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은 ‘만군의 주’ 하나님, 곧 자신들만의 하나님이 아닌 보편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유린당하고 고통을 겪는 현실을 통해 그 깨달음에 이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은 내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내편이 되어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의를 이루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두려움은 그 의를 이루지 못한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의롭지 못한 백성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스스로 또한 의롭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그에게 한 스랍이 타고 있는 숯을 들어 입술을 정화합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백성들과 함께 똑같이 그 한계 안에 갇혀 있던 이사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내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체험하고서야 이사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자기 껍질을 벗어낸 사람만이 답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그리고 예언자의 선포를 통해 일깨워도 깨우치지 못하는 백성의 현실을 말합니다. 스스로 파국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고집스럽게도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반문합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 현실을 말합니다. 당시 신흥 강대국 아시리아는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초토화시켰습니다. 예언자 이사야 당시 아직 유다에는 그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그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파국을 겪기 전까지는 도무지 옳은 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파국을 향해 나가는 데도, 진실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도 알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당대 현실을 아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파국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본문말씀에서는 그 희망의 선포가 매우 미미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훗날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백성이 돌이킬 것을 요구하며 심판 선언의 강도를 높일수록 평화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선언 강도 또한 높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희망의 선언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자기 힘을 자랑하고 그 힘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며 그 심판이 이뤄질 때 평화의 세계가 이뤄질 것을 선포합니다(이사 11:1~11). 모든 적대가 사라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길 만큼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끊임없는 희망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많은 주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두려워했던 체험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의 붕괴를 뜻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소명체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데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정당성에만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의를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무엇이 과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인가 늘 마음에 새기며 그 의를 이루는 길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체험,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 그것이 본문말씀이 전하는 요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익숙하지만 때로는 혼란스러운 하나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이른바 정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본문말씀은 전반적으로 엄격한 정의의 하나님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파국을 불러일으킨 당사자들이 정말 파국을 맛볼 때까지 돌이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당사자들이 파국의 쓰라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은 후에 진실을 똑똑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미에 등장하는 희망의 선포는 사랑의 하나님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비록 십분의 일, 남은 자들이 있어도 파국을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남은 자들이 그루터기가 되어 거룩한 씨를 낳아 새로운 삶을 열게 되리라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잘못한 인간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는 정의의 하나님은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고자 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이루시는 방법은 철저하게 정의를 동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역사 안에서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 곧 사랑을 이뤄가는 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명백히 역사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남은 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매우 투철한 예언자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며, 성서의 역사관 내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높이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조종자가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동행하는 분이라는 인식입니다.

아무 때나 하나님의 이름을 둘러댄다고 해서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놀랍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앞에서 겸허해지는 경외감이 없이는 결코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신실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거룩한 그루터기로서 몫을 다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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