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18] 그리스도인의 자유 - 갈라디아서 5:1~1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3-12 22:16
조회
1325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3월 12일 / 최형묵 목사


제18강 그리스도인의 자유 - 갈라디아서 5:1~15


1. 우리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 - 5:1~6


바울은 이제 마지막 결론을 향하여 가고 있다. 마지막 권면의 첫머리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이자 동시에 바울 사상의 핵심을 선언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말아야 한다.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단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는 것,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를 지켜나갈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다시 할례를 행한다면 그리스도는 할례를 행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바울은 할례를 행하는 것이 단지 하나의 의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들이 종교 전체의 체계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울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율법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입문절차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과거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던 바울이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 부정적 언급에 이어 다시 서두와 같이 긍정적인 언어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언급한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핵심 주장이 일회적 절차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과정임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리라는 소망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 궁극적 목표를 향한 여정에서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다. 바울 서신에서 사랑의 개념이 주제어로 등장하는 것은 이 구절이 처음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곧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의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사랑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각 개인의 믿음에 따른 각 개인의 자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연대성 안에서 구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관계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 내의 윤리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 밖을 향한 윤리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2.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 - 5:7~12


7절에서부터 서신은 격렬한 비방조로 다시 바뀐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을 신뢰하면서 그들을 꾐에 빠지게 만든 사람들을 격정적인 언어로 비방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치 경기장의 주자처럼 지금까지 잘 달려왔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달리는 길을 방해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까지 말한다. 지금까지 갈라디아 사람들을 미혹한 사람들을 비방했을 뿐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을 질책해왔던 논조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다. 이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로서, 바울은 그렇게 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말을 따르게 되리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교란시킨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울은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리가 없다. 바울은 자신이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박해 받을 일도 없고, 또한 십자가의 ‘거리낌’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거리낌’이라 번역된 말은 ‘걸림돌’을 뜻하는 것으로 그 뜻을 헤아리기가 간단치 않다. 두 말 할 것 없이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통념에 비춰볼 때 그 죽음의 사건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그리스-로마의 사고방식에서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이 점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속량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사악함을 폭로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조롱거리로 만든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깊이 헤아릴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걸림돌’에 넘어지면서 세상이 뒤바뀌는 체험을 하는 데서 진정한 자유의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할례를 고집하고 율법의 체계로 다시 들어갈 것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구제불능의 사람들이다. 바울은 살벌한 농담으로 일축한다. “할례를 하려거든 차라리 ‘물건’을 잘라버려라.”


3. 사랑을 위한 자유 - 5:13~15


바울은 다시 첫 대목의 주장을 환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신 뜻은 자유하게 한 데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대목에서 자유가 오용될 가능성을 유념한다. 그래서 적극적인 대안의 필요성을 느끼며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한다.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권면일 수도 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모종의 사태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이 설파한 자유의 의미가 엉뚱하게 받아들여져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들이고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도 그 대안으로 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 율법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자유를 지키는 대안을 제시한다. ‘서로 섬기라’는 말은 ‘종으로 서로 섬기라’는 뜻이다. 자유를 말한 것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사랑의 연대야말로 자유를 지키는 길임을 강조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유명한 명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다시 바울은 이제껏 논조에서 부정했던 율법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서 레위기 19:18을 인용하여 율법의 정신 또한 사랑에 있음을 말한다. 바울의 일관된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논조가 불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율법과 할례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 주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은 요구되지 않지만 율법의 근본 정신을 완성시키는 것은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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